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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믿음이 크도다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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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크도다 (마 15:21-28)
  

오늘 살펴볼 내용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후반기에 있었던 은혜로운 한 사건을 말해 줍니다. 그 즈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이방인의 땅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는 갈릴리나 유대 지역에서는 어딜 가든지 사람들이 모여 와서 제자들과 더불어 조용하게 보낼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따라올 수 없는 이방 땅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당하실 십자가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그 일이 닥칠 때 당황하지 아니하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완전히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큰소리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습니다. 나중에는 제자들이 성가셔서 예수님께 와서 “주님, 저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따라오고 있으니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시면서 가나안 여자의 외침을 무시하셨습니다. 

조금 후에,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라고 호소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면서 그 여자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물러서지 않고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면서 매어 달렸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큰 감동을 받으시고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습니다.

우리가 한 세상 사노라면 이 가나안 여자와 같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시련과 위기를 만나 압도당하고 두려워 떨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우리는 이 가나안 여자와 같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호소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기도하는 한 어떤 시련과 위기도 우리를 파멸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에게서 칭찬받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에 관하여 살펴봄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가나안 여자는 메시아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졌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을 보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 것은 이 여자가 예수님을 성경의 예언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로 믿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이 여자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고 천대받는 이방인에 불과하였지만 메시야에 대한 지극히 성경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귀한 것입니다. 이 믿음은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믿음으로서, 비유컨대 건물의 기초와 같습니다. 이번에 태풍 ‘말로’호의 영향으로 비가 많이 왔는데, 울산의 어느 고등학교의 옹벽이 무너지는 바람에 옹벽 위에 짓고 있던 5층짜리 건물이 넘어질 위험에 놓였습니다. 이처럼 기초 공사가 부실하면 건물이 견고하게 설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믿음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초가 든든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성경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만 하면 다 성경에 기초한 믿음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단에 속한 사람들은 빈번히 성경 구절을 인용하지만 매우 그릇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보다 더 시급한 것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중심주제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말하기를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습니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저희가 다 그 여자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겠습니까?”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가문에 속하여 세습적으로 제사장 직분을 이어 받는 유대교의 지도층에 속했고 유대 사회의 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므로 부활에 대하여 큰 오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 안에는 성경을 오해한 나머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다음 글귀는 한국교회협의회(NCCK)가 2008년 5월부터 2009년 7월까지 NCCK 홈페이지에 게재한 ‘생명의 강 살리기 종교여성 공동기도문’의 일부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성모 마리아님과 소태산 대종사님의 마음에 연하여 오늘 4대 종단의 종교여성이 일심(一心)으로 간구하오니, 부디 이 땅에서 죽임의 굿판 대신에 신명나는 살림의 굿판이 벌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아멘.” 

이 기도문은 기독교를 비롯하여 천주교, 불교, 원불교의 여성종교인 대표들이 모여서 공동기도문으로 채택한 것인데, 여러 종교의 기도문을 섞어서 만들다보니 이런 해괴한 문구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가증스러운 일은 한국교회협의회에서 이런 망령된 글귀를 홈페이지에 버젓이 그것도 일 년이 넘게 올려놓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고도 한국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일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는 타종교를 비난하거나 미워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를 밝게 만들어 나가는 일에 서로 협력하는 것을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타종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성경의 진리를 흐리게 하고 혼잡하게 하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인류의 구주시라는 성경의 진리를 믿어야 합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타종교들도 나름대로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행 4:12). 사람들이 싫어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구원의 진리는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탐구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성경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이라는 대주제에 입각해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구약성경 66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경을 상고하면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구원의 언약과 그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는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으며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진정한 저자가 성령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성경을 읽기 전에 우리는 성령님께 우리의 마음을 밝혀주셔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 나시되 특히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로 믿은 유대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들도 있었고, 또 어떤 자들은 무슨 신기한 일을 보기 위해서, 또 어떤 자들은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 또 어떤 자들은 떡을 얻어먹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무슨 이유로 예수님께 나왔는지 몰라도 곧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이신 것을 알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를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하므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여자는 이방인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을 보고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에 대한 많은 소문을 듣고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결과 이 분이야말로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그 메시야임에 틀림없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 여자는 예수님을 보고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하나님의 성호가 나오면 그 성호를 감히 입에 올릴 수 없어서 ‘아도나이’ 곧 ‘주님’이란 호칭으로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란 곧 ‘하나님’을 뜻하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경배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가나안 여자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또한 그리스도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이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없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만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가나안 여자처럼 주님 앞에 나아가 간구하십시오. “아무개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는 주님의 응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가나안 여자는 믿음으로 장애를 극복했습니다.

이 가나안 여자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호소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보이신 반응은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본문에 보니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이 여자는 자기의 외침이 너무 적어서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셨나 보다 생각하고는 더 큰 소리로 호소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곧 그 여자는 예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듣고도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무시를 당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이 여자는 자비로우신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찾아 왔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답조차 않으셨습니다. 그 때 가나안 여자가 느낀 당혹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래도 이 여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여자가 끈질기게 매달렸으면 나중에 제자들조차 성가셔서 “주님,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계속 소리를 질러대니 한 말씀 하셔서 돌려보내시지요.” 라고 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요청에도 아랑곳 않으시고 도리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면서, 왜 이 가나안 여자에게 긍휼을 베풀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럴 즈음, 가나안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하소연하였습니다. 어쩌면 이 여자도 방금 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메시야의 은혜를 받아 누릴 자격을 갖고 있지만, 이 여자는 고대로부터 이스라엘의 원수인 가나안 족속의 혈통을 타고 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긍휼을 받아야 할 유대인들이 많이 남아 있는 마당에 그들을 제쳐놓고 가나안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수는 없다는 것은 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간청하는 가나안 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보다 더 가혹한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처럼 논리 정연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면 ‘더 이상 가망이 없구나.’ 생각하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 앞에 나아와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면 해결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무관심하신 것처럼 생각 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음의 장애물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한 때 우리는 기도할 힘을 잃고 물러서면 안 됩니다. 주님의 침묵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가 될지는 몰라도 기도를 그만 두어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느낌이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 극복해야 할 장애에 불과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가나안 여자가 보여준 기도의 모범을 우리에게도 적용해야 합니다.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 앞에 절하며 도움을 호소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 가련한 여자를 개처럼 여기셨다는 것은 너무 야박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더구나 사람을 보고 개 취급을 하다니, 이보다 더한 모욕이 어디 있습니까? 

어쩌면 이 한 마디는 예수님께 걸었던 한 가닥 소망의 줄을 사정없이 끊어 버리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여자가 지금까지 듣고 마음속에 그려왔던 메시야의 모습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편협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대 랍비를 대하는 듯 했을 것입니다. 한 번 이 여자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 여자와 같은 경우를 당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메시야로 믿고 나온 이 여자에게 너무 심한 처사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나안 여자는 그러한 예수님의 태도에 개의치 않고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응수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께서 저더러 개라고 말씀하신다 해도 저는 상관치 않습니다. 어쩌면 저는 개만도 못한 존재입니다. 귀신이 제 딸을 사로잡았으며 저의 가정을 농락하고 있음에도 속수무책인 가련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듯이 저에게도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십시오. 부스러기 은혜라도 저에게는 큰 은혜가 될 것이니까요.’하는 고백과 같습니다.

가나안 여자의 대답에 주님께서 감동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줄곧 이 여자의 믿음이 어떠한지 살피고 계셨지만, 이 같은 큰 믿음을 보시자 조금 전까지의 태도를 180도 바꾸시고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고, 그 시로 그 여자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자기를 보고 개라고 불러도 악감을 품지 않고 계속해서 간구한 가나안 여자의 신앙은 참으로 귀한 신앙입니다. 이 여자가 보여준 인내는 단순히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비굴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었으므로 어떤 괄시와 모독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하심을 추호도 의심 없이 믿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도에 응답을 받기 원하십니까? 가나안 여자처럼 주님의 선하심을 의심없이 믿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우리의 믿음이 부끄럽지 않도록 위대한 응답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을 만나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으십니까? 먼저, 마음에 기도의 응답을 불신하게 만드는 장애물들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가나안 여자와 같이 주님의 위대하신 응답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가나안 여자는 응답 받기까지 물러서지 않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한두 번 기도해서 들어주시면 감사하고, 응답이 없으면 그만 두는 식으로 해서는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응답해 주실 때까지 기대를 가지고 간절히 매어 달려야 합니다. 가나안 여자는 마지막 기대를 품고 찾아온 예수님께 무시당하고 무안을 당하면서도 뒤로 물러가지 않고 끈질기게 매어 달렸습니다.

성도님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함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너무나 값진 것이기 때문에 간절히 간구해서 갖게 되어야만 그 가치를 제대로 알고 그 은혜를 제대로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얻은 재물은 헤프게 낭비하고 맙니다. 이와 같이 간절히 구하지 않았는데도 주어진 은혜는 귀한 줄 모르고 허비하고 맙니다.

가나안 여자는 예수님께서 주실 은혜의 가치를 잘 알았습니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주시기만 하면 자기 딸을 귀신의 억압에서 놓여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 가나안 여자는 주님께서 끝내는 그의 간구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들어주실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근거에 대하여 로마서 8장 32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도하면서 낙심치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어느 도시에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가난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생면부지의 재판장을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이 이 과부의 호소를 들어줄 리가 없었습니다. 돈 보따리라도 들고 와서 부탁한다면 몰라도 빈손으로 와서 하소연하니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과부가 날마다 찾아가서 애원하자 너무나 번거로웠습니다. 

견디다 못한 재판관이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마지못해서 한 일이지만 그 과부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이 비유 끝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하였고, 고라 자손들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는 환란에 처한 유다 백성을 향하여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2,13)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이신 기도의 본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힘쓰고 애쓰시면서 간절히 눈물로 간구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이 가나안 여자를 본받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함으로 풍성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을 뿐 아니라 질병과 가난도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간구하시되,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기도를 훼방하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끝까지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아무개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는 주님의 칭찬과 아울러 당면한 문제가 기적적으로 해결되는 은총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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