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의 믿음 (막 16:1-13)

  • 잡초 잡초
  • 253
  • 0

첨부 1


부활의 믿음 (막 16:1-13)


* 교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때문에 실망하지 말라 -범브란트 *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교회에서 보게 되는 어떤 일-그것이 그대의 기대에 어긋나는 일이 될지라도 실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중세의 타락한 교회를 보고나서 오히려 기독교인이 된 유대교 랍비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타락한 지도자들이 있는데도 존재하는 교회라면 분명히 교회는 사람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다." 

나는 교회 안에 추한 면이 있어서, 그래서 교회를 더욱 사랑한다. 병원에 들어가면 당신은 악취, 피, 고름, 신음소리 등으로 구역질이 날 것이다. 병든 자들을 받아들인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 불쾌한 상황 속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능력과 시간을 바치는 것, 이것이야말로 병원의 아름다움이다. 
병원이 그러하다면 교회의 아름다움은, 죄인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있다. 죄인들은 교회에 들어온 뒤에도, 이번에는 그리스도교의 외투자락 속에서 새로운 범죄를 저지른다. 하지만 사랑하는 어머니와도 같은 교회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으로 가득 찬 가슴에 품어준다. 나는 여기에서 아름다움을 본다. 

한편, 교회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 교회에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교회에는 교황 그레고리 대제 같은 사람도 있다. 그는 예배를 집전하고 있다가 굶어 죽은 사람 이야기를 듣고는 입고 있던 예복을 벗어놓고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 로마에서 사람이 굶어 죽는다면, 교황에게는 미사를 집전할 자격이 없다." 교회에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긴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왔고, 지금도 많이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교회 안에는 거기서 무슨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 일어나든, 한 가지 결정적인 사실은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예수님의 부활! 그것은 참으로 진짜이다. 

그분은 죽었다. 그런데 그 시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제자들이 그것을 훔쳤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사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이고, 자동적으로 모든 신앙을 상실하고 말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 거의 모두가 순교자로서 죽었다. 세상에 자기가 가짜로 알고 있는 사실 때문에 고문을 받아 죽는 사람은 없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로써 분명하다. 

만일 그의 시체가 적대자들 손에 들어갔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애초에 싹도 트지 못했을 것이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전했을 때, 그분을 십자가에 단 대사제들이 당장 그 시체를 공개했을 터이니까. 여전히 무덤에서 썩고 있는 예수님의 시체를 사람들이 보았다면 하루에 수천 명씩 개종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의 친구들도 원수들도 그분의 시체를 손에 넣지 못했다. 왜냐하면 사흘 뒤에 그분은 더 이상 시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살아 나셨다. 지금도 살아 계시고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교회의 주인이시고 그분이 당신의 종들을 쓰고 계시며, 그분이 죄인들을 친히 받아들이고 계시는 것이다. 

당신은 이 세상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계신 예수님이 그 고난 중에서 당신에게 기쁨을 주실 것이다. 당신이 칼빈의 말대로 구원이 예정된 자라면 그 고난을 통해서 더욱 믿음의 뿌리가 견고해질 것이다.

먼저 생각할 것은 무덤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는 무덤을 자랑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모하멧의 무덤을 자랑합니다. 또 많은 위인들의 무덤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세계적 위인들의 무덤을 가는 곳마다 한번쯤은 가보기도 합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아예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곳도 있습니다. 

죽고 나서 시신을 산 사람처럼 만들어놓은 사람이 네 사람입니다. 레닌, 모택동, 호치민, 김일성입니다. 존경스럽기보다는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제대로 죽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는 무덤을 자랑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시신을 자랑하는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시신도 무덤도 없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무덤이 빈 것을 자랑하는 종교입니다. 죽음이 아닌 생명의 종교입니다. 시신이 아닌 부활의 종교입니다.
칼 바르트는 “부활절과 성탄절의 설교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이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가정이 아닙니다. 신화가 아닙니다.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부활에 관한 말씀이 204회나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덤을 가로막고 있는 돌문이 여인들의 힘만으로는 옮기기가 쉽지 않는 크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른 새벽 같이 무슨 사람들이 무덤 근처에 있어서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걱정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염려였을 뿐입니다.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컸습니다. 그래 얼른 무덤으로 들어가 보았더니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게 되어 깜짝 놀랍니다. 청년이 말하기를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여인들이 무덤을 찾았던 이유는 죽은 예수에게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오랜 풍습이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그들도 여러 번 듣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죽었던 자들이 다시 살아난 것을 세 차례나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누구도 예수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은 당사자가 예수라고 하는 것이 그 하나요 예수님이 처참한 모습으로 아주 무기력하게 돌아가시는 모습을 그들은 두 눈을 뜨고 똑바로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불과 사흘 전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게 그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장사지내는 것까지 그들은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예수가 다시 살아날 것을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곧 다가올 추석을 앞두고 성묘 준비에 바쁜 분들이 계십니다. 이미 벌초를 마치신 분들도 계시고 곧 벌초를 할 계획을 갖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네 문화는 특히 무덤 문화라고 할 정도입니다. 전 국토의 1/10이 무덤일 정도입니다. 가는 곳마다 무덤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화장 문화가 많이 장려되고 있습니다만 화장을 한 뒤에도 다시 화려하게 묘를 꾸미는 사람도 있는 형편입니다. 한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어째서 살아 있을 때는 그렇게 하지 않던 사람들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그토록 정성을 다해서 무덤을 가꾸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들이 이렇게 조상을 잘 모시고 있다고 과시하고자 하는 그런 차원도 있고 또 그래야 자기들과 후손들이 잘 된다고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결국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사람들을 위한 무덤이 되고 있는 형편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 인생들이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죽은 조상신들을 생각합니다. 조상이 죽어 신이 되어 후손들을 살피는데 그렇기에 조상신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기 위해 차례도 드리고 성묘도 하고 합니다. 그래야 조상신들이 후손들을 위해 준다나요? 그런데 과연 죽은 자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요? 오히려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무덤을 찾아야 하는 이유도 죽은 자를 위해서가 아닌 부활의 삶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덤은 죽음의 상징이 아니라 다시 살아날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증표입니다. 죽었기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이 바로 다시 사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기에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다 다시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 부활의 생명이 오늘 저와 우리 모두 안에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믿음 안에서 주님의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모든 성도들이요 그래서 부활의 몸으로 하나님 나라에 다 함께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터키에 선교하던 선교사 한 분에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나는 여행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두 갈래의 길을 만났습니다. 어느 길이 내가 목적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려고 하다가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요 또 한 사람은 죽어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산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입니까?”

그러자 그들은 말하기를 “그야 물론 산 사람에게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살아 계신 예수님께 찾아가지 않고 죽어버린 마호멧을 찾아가겠습니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무덤 안에 있던 천사의 말을 들을 때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면 기뻐서 펄쩍 펄쩍 뛰면서 지금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고 빨리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해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나머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니 이처럼 어이없는 일어 어디 있겠습니까? 한데 우리네도 너무 놀랍고 기쁜 소식을 듣게 되면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며 오히려 자기 뺨을 꼬집어보고 심지어는 옆 사람 보고 자기 뺨을 때려달라고도 하지를 않습니까? 그토록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그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한데 그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립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그 후에 글로바와 다른 제자 두 사람이 걸어서 엠마오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합니다. 그뿐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된 제자들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도마에게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그 예수님을 우리들 모두가 다 만나 보았다고 하니까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합니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다 한결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가르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다면 전에는 믿지 못했다고 해도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시 만났노라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다고 하면 할렐루야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주님 속히 뵐 수 있기를 소원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부활은 그들에게 생소한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아닙니다. 그들 모두가 직접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손과 발 옆구리의 상처까지 그들은 생생하게 보았고 만져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식사하시는 장면도 보았습니다. 정말 귀신이라면 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더 이상 십자가와 죽음이 그들에게는 두려움도 공포도 아니었습니다. 그래 보았자 다시 살게 될 것을 비로소 그들도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왜 부활 신앙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더 이상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다시 살아날 것을 믿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압니다. 죽음이 더 이상 끝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러기에 이 땅에 오래 남아 건강한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도 또한 귀한 은혜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도 또한 귀한 은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품에서는 더 이상 눈물도 아픈 것도 근심도 염려도 없는 행복한 날들만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비록 이 땅에서 아직 살고 있다고 해도 이 부활 신앙은 모든 면에서 다시 새 힘을 얻어 살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더 이상 죽음은 죽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고난도 고난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새 생명이 있고 그 뒤에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부활로 이어지고 고난은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아플 때 병원을 찾는 이유도 거기서 주사도 맞고 이런 저런 수술을 하게 되면 그 아픔과 힘든 것은 말로 다할 수 없지만 그 다음에 있게 될 평안을 알기에 오히려 그 아픔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의 가장 큰 무기가 환난과 죽음인데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우리의 두려움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고난과 죽음을 이기고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 참으로 나의 외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너의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채워 주겠다.”  
무엇이 부활 신앙입니까?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 모든 약속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신명기의 말씀처럼 복과 생명을 택하는 부활 신앙의 사람으로 오늘을 살아 하나님의 약속대로 모든 기쁨과 평안과 풍성함을 누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몇 년 전에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실습용 대상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부모님의 평생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소.”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웃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면 죽음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들은 죽음을 미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살 예찬론까지 등장하기도 합니다. 죽음에 관한 미화는 죽음에서 도피하고 싶은 인간 본능의 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죽음은 필연적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분리시키기 때문에 아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의 최대 업적은 그분이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이고 그 메시지로 다시 사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삶이 우리를 좌절과 어두움과 절망에 몰아넣더라도 주께서는 부활과 생명으로 다가오십니다. 주께서는 무덤 저 건너편의 놀라운 소망을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을 치유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기 원하십니다. 
문제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죽음의 극복은 불로초를 먹고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영혼의 불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부활로 인해 모든 종교나 사상을 뛰어넘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은 다 망가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망가졌다는 것은 폐기처분한다는 뜻도 되지만 새롭게 빚어진다는 뜻도 됩니다. 차가 여기 저기 흠집이 생기고 심지어 사고가 나게 되면 온통 찌그러지고 아주 볼품사납게 되지만 정비 공장에 들어가 수리하고 난 다음에 보면 감쪽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새 차로 바뀐 느낌입니다. 세상의 정비사도 그럴진대 하물며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만들어 가시면 나의 모습이 나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차를 정비공장에 맡기는 것처럼 나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나는 다 망가졌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나 같은 죄인을 어디다 쓴단 말인가 하며 탄식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그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 더 이상 우리의 죄와 허물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계속해서 새롭게 만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주님께 맡기는 부활 신앙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데없이 망가져 버렸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불신앙입니다. 그것도 아주 큰 믿음입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믿으면 그렇게 끝나고 맙니다. 그래 둘째 사망이 그들을 기다립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하지만 우리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순간 우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펼쳐져 있고 우리네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꾸어주고 계신 것을 믿으십시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이 그토록 아름답게 비치는 것은 그들 곁에 그들을 꾸며주는 코디네이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리 모양부터 시작해서 화장까지 그리고 입는 옷까지 일일이 챙겨줍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꾸며진 모습일 뿐입니다. 심지어 조금 안 생긴 부분은 뜯어고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형 왕국이라는 말까지도 합니다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가꾸어주시면 내가 어떻게 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부활 신앙이 중요합니다. 부활 신앙은 곧 나를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평안을 누릴 수 있고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데도 밝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이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 주님이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지금 우리를 새롭게 빚어가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따라 풍성하게 채워주실 줄로 믿으시고 아픈 사람은 건강을 구하십시오. 피곤한 사람은 새 힘을 구하십시오. 지혜든 물질이든 건강이든 평안과 기쁨이든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날마다 믿음의 고백 승리의 고백을 또한 드리시기 바랍니다. 너희 말한 대로 된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이제는 부정적인 고백이 아닌 긍정적인 고백이 항상 우리들의 입에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