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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소원 (갈 5: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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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소원 (갈 5:16-23)


오늘의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구절은 부자와 바늘구멍도 아니고 오른뺨 왼뺨도 아닙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부자와 바늘구멍에 대해서는 ‘그래도 뭔가 길이 있겠지. 내가 들어갈 구멍 정도는 있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하고 오른뺨 왼뺨에 대해서도 ‘내가 살면서 왼뺨을 돌려야 될 일이 몇 번이나 있겠나.’ 이렇게 생각하지만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은 일평생 살면서 하루 24시간, 일 년 365일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열일곱 살에 예수님을 처음 영접하고 나서 이 구절을 접했을 때 그때의 충격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 믿고 신앙이 뜨거워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이 구절을 읽을 때 제가 일평생 살면서 씨름해야 되는 구절이 여기 있다는 것을 저는 느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해서 육신의 소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아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육체의 욕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평소의 종교관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육체의 욕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건한 사람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처럼 오해가 없습니다. 그건 오해중의 오해입니다. 남에 대한 오해도 오해지만 내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큰 오해가 없고 그 오해는 실수를 낳습니다. 

1978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즉위했을 때 세상의 언론은 그 교황이 과거에 다른 교황들과는 이미지가 다르게 살았다는 점을 주목하려고 했습니다. 이 새 교황은 젊었을 때 배우활동을 한 적도 있고 스포츠를 좋아하고 특별히 스키 타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을 신기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타임지 만평에 교황이 가운을 입고 머리에 모자를 쓴 채로 스키를 타고 슬로프를 내려오는 장면을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하나도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교황이 스키를 타는 것이 뭐가 이상합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직자는 골방에서 기도나 하는 줄로 생각했는데 스키를 탄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과거 양재천에서 조깅을 할 때 성도님들과 마주치면 얼굴의 충격을 읽을 수가 있었어요. 목사님이 반바지를 입고 운동을 한다, 그럼 제가 운동을 할 때 이 가운을 입고하겠습니까. 제가 캐주얼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마주칠 때 놀라지 마세요. 제가 잠잘 때도 넥타이를 매고 잘 것 같습니까. 그러니까 세상과는 단절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종교관이 얼마나 편협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됐다고 해서 육신의 욕심이 없어지게 아닙니다. 만약에 없어진다면 오늘 이 본문 말씀은 불필요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해서 육신의 정욕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대립현상이 더 첨예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저녁에 교회창립 기념음악회에 출연했던 어린이들이 음악회가 끝나고 나니까 허탈감을 느끼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대에 섰을 때의 흥분, 청중의 환호는 좋은데 공연이 끝나고 불이 꺼지고 나니까 적막함을 느끼는 것이고 여기에서 허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의 기쁨 ․ 감동을 체험한 다음에 그때는 당장 천국이 임할 것 같지만 그 순간이 끝나면 현실로 돌아가야 됩니다. 집에 가야되고, 학교에 가야되고, 직장에 가야됩니다. 돈 벌어야 됩니다. 일해야 됩니다. 여기에서 허탈감 ․ 허전함을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라는 것은 지속적으로 받아야 되는 것이지 일회적인 경험이 그 다음날을 책임져 주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매일아침 들에 나가 무엇을 거두어 들였습니까. 만나를 거두어 들였지요. 안식일을 빼고는 매일 아침에 나가서 그 날에 먹을 만나를 거두어 들여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매일 그 날의 흡족한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받은 은혜가 오늘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이 아니에요. 오늘은 오늘대로 내가 할 일이 있고 오늘대로 나의 믿음에 시련이 있습니다. 오늘 성령이 나를 도와주시고 오늘 내가 믿음으로 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성령이 충만했더라도 오늘도 성령이 충만해야 되고 내일도 성령이 충만해야 됩니다. 한번 성령 충만을 경험한 것이 영원히 성령 충만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일회적으로 특별한 은혜를 받으면 죄의 문제가 다 해결되고 더 이상 유혹이 없고 더 이상 육신의 욕심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특별한 치유를 경험하면 내 안에 갈등이 없어지고 육신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오늘 성경의 본문은 불필요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육신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육신을 어떻게 하면 없애느냐. 죽으면 됩니다. 죽으면 육신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육신이 필요하고 육신이 유용할 때도 있습니다. 육신 자체가 꼭 나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에게 육신이 없다면 식욕도 없고 예술이나 음악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도 않고 결혼을 하지도 않고 인류는 멸종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이 필요하고 유용할 때가 있습니다. 만일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갔는데 육신의 정욕이 없다면 그것처럼 지루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차라리 친구들하고 동네 축구라도 하지요. 상상이 되시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만드셨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좇아 살려면 육신의 정욕만을 좇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굳이 그리스도인만이 동의하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고 하면 자기의 본능대로만 살 수 없습니다. 그건 짐승이에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육신의 본능뿐만이 아니고 더 높은, 더 귀한 가치관을 추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짐승들은 육신의 욕망대로만 삽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가 거두어들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만 공중의 새를 유심히 살펴보면 깨어있는 동안에는 늘 먹이를 찾아다닙니다. 들의 짐승도 깨어 있는 순간에는 늘 먹이를 찾아다닙니다. 이것이 그들의 소일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본능대로만 삽니다. 

그렇기 때문에 짐승이에요. 인간이 그렇게 산다면 인생이 굉장히 괴로운 것뿐만이 아니고 인간다운 삶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문명이 가능하고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공의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은 본능 이외에 우리의 삶에 더 높은 가치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건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동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고 말씀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셔서 율법이 밖으로부터 사람들을 인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밖에서 왔습니다. 대조적으로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인도가 안으로부터 옵니다. 이게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인도가 밖에서부터 왔는데 신약시대에는 안으로부터 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말씀드리는 것을 귀담아 들으셔야 되는데 육신에게만 소욕이 있는 게 아니고 성령에게도 소욕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17절을 보시면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육체만 소욕이 있는 게 아니에요. 성령에게도 소욕이 있습니다. 우리는 욕망이라는 말을 들으면 민망하게 생각합니다.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지된 욕망, 이런 식으로. 영화제목 같지 않습니까. 금지된 욕망. 반대로 선한 것 ․ 의로운 것 ․ 경건한 것은 욕망의 문제가 아니고 의무사항이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로운 것은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 옳기 때문에 하는 것, 억지로 하는 것,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몸에 좋은 음식이 맛은 없지만 몸에 좋기 때문에 먹는 것처럼. 반대로 맛있는 것은 전부 다 몸에 나빠요. 설탕 ․ 지방… 이런 것. 몸에 나쁜 음식은 왜 다 맛이 있고 몸에 좋은 시금치 ․ 버섯 등, 일반적으로 별로 맛이 없지요. 적어도 아이들의 입맛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도덕에 대해서도 신앙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의 욕망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의로운 것 ․ 경건한 것을 할 때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게 아니고 하고 싶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욕망을 주시고 이 욕망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인도는 어떻게 오느냐. 거룩한 욕망을 통해서 옵니다. 만약 여러분이 욕망이라는 말을 들을 때 민망하시다면 여러분의 종교관이 왜곡돼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당신의 뜻을 우리가 마지못해 하는 게 아니고 하고 싶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열일곱 살에 예수님을 믿고 자연스럽게 목사가 되고 싶은 소원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 소원이 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라든가 환상이라든가 꿈이라든가 이런 어떤 초자연적인 계시보다도 더 신뢰할 수 있는 더 분명한 하나님의 인도라고 저는 믿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누가 예언을 하던 환상을 보든 간에 그것에 대하여 마음에 평강이 없고 마음에 그것에 대한 소원이 없는 상황에서 예언을 듣든 환상이든 꿈을 볼 때 그것을 선뜻 신뢰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시다면 성령의 소욕을 내가 분명히 느낄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그것이 부재한 상황에서 누가 예언을 해주고 나의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 대해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환상이나 꿈에 좌우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에게 소원을 주셔서 그것을 원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것이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고 신뢰할 만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인격적인 방법입니다. 

저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어떻게 분별하고 따라가느냐.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소원이 드는 것, 그것을 좇아 하면 대체로 결과가 좋고 해야 될 것 때문에 했을 경우에는 결과가 그저 그럴 때가 많아요. 이번 음악회도 제가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기획을 하니까 재미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에 드는 대로만 살 수 있느냐고 묻지만 그건 세상의 상식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가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자녀를 두신 분들, 자녀를 가르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설득해서 그들이 부모가 원하는 것을 자기도 동의하고 거기에 대한 마음이 생겼을 때 가장 효과적이지 않습니까. 그러지 않고 본인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체질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가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게 하시고 그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합리성과 위대함과 긍휼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우리 안에 성령의 소욕만 있는 게 아니고 육신의 소욕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도는 없습니다. 교황이든 총회장이든 목사든 평신도든 오래 믿은 사람이든 처음 믿은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노인이든 장로교든 순복음이든 교파를 막론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육신의 정욕을 이루지 않는 유일한 길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뿐입니다. 이건 지속적인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좇지 않는 길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순서를 기억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을 안 좇으면 그 결과로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되는 게 아니에요. 거꾸로 입니다. 먼저 성령을 좇아 행하노라면 육신의 욕심을 안 이루게 됩니다. 이게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모이기에 힘쓰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선하고 건강한 방법으로 인생을 즐기고 또 바른 사랑을 주고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이렇게 하노라면 육체의 욕심이 그 빛을 잃고 그 매력을 잃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육체가 하고 싶은 것을 안 하려고 애쓰고 그것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씨름하는 그런 고행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런 고행이라면 구원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어디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예수 믿는 젊은이들일수록 더 모이기에 힘쓰고 서로 예수 안에서 교제하고, 또 성인도 마찬가지에요. 모이기에 힘쓰고 예배하고 성령을 체험하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영으로 찬양하고 예수 안에서 즐거워하고 그 즐거움이 육신이 주는 것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때 신앙생활에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회성이 아닙니다. 천국 갈 때까지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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