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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해결해야 될 일 (룻 1: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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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해결해야 될 일 (룻 1:19-22)


고난과 신앙 사이에 선 사람에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난 때문에 튕겨 나간 사람이고 둘째는 고난을 꾹 참는 사람이고 셋째는 튕겨나가지도 못하고 참지도 못하고 입이 대문만큼 튀어나온 사람입니다. 나오미는 이 세 번째 부류에 속합니다. 그가 자기의 이름을 거부하는 데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아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난히 자신들의 이름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삶이 매치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별로 안 그렇지 않습니까. 

제 이름은 준수한 영웅이라는 뜻입니다. 영준-준수한 영웅. 그래도 이름을 안 바꾸고 그대로 잘 살지 않습니까. 하지만 나오미는 즐거움이라는 자기의 이름을 갖는 데 대해서 자격지심을 느낍니다. 나는 즐겁지 않다, 나는 나오미가 아니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 거기까지만 해도 이해가 되는데 한 술 더 뜹니다. ‘나를 마라라고 불러다오.’ 마라라는 말은 쓰다, 괴롭다는 뜻입니다. 

마라의 쓴 물처럼. 이쯤 되면 그에게는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누구보고 들으라고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일인시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으라고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에게 하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들으시라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직접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느냐’

나오미는 하나님에 대해서 할 말이 있지만, 원망할 것이 있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았어요. 하나님을 부인하면 자기 손해입니다. 탓할 대상으로라도 하나님이 있어야 됩니다. 만일 우리에게 탓할 대상도 없으면 누구에게 우리의 사연을 털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일차세계대전 참전군인 중에 가장 고령자, 100세가 다 된 할아버지가 기관총 사수였습니다. 그 당시 기관총은 순행식 기관총으로 부피가 컸어요. 그런데 자신의 전투 경험을 말하면서 그 할아버지가 말하기를 기관총 사수가 평소에는 세 명이 팀을 이루어서 다루는데 두 명이 해도 가능은 하지만 좀 외롭다고 했습니다. 흥미로운 발언이 아닙니까. 두 명이 하면 가능은 한데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외롭다고 했어요. 사람은 하소연할 대상으로라도 하나님이 있어야지 하소연 할 하나님도 없다면 그것처럼 외로운 인간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는 영혼처럼 고독한 영혼은 없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은 알겠는데 관건은 그게 옳은 발언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이 옳으냐. 그가 지금 하나님이 자기의 불행의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풍족하게 나가기는, 이스라엘에 기근이 있어서 나갔는데 어떻게 풍족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고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헌법이 말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말의 자유를 다 누리지 못합니다. 

어느 아내가 남편 앞에서 말의 자유를 다 사용합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느 아내 앞에서 남편이 말의 자유를 다 쓰겠습니까. 임금님 앞에서도 말의 자유가 없어요. 직장 상사 앞에서도 말의 자유가 없고 당연히 선생님 앞에서도 말의 자유가 없고 목사 앞에서는 말의 자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담임목사님 앞에서 부교역자는 말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말의 자유가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일수록 말의 자유를 많이 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은 동네북이에요. 제가 한국에 와서 살면서 눈여겨보는 것은 한국인의 정서상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동네북입니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데 제일 욕먹는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대통령입니다. 어느 당을 막론하고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욕을 합니다. 그러면 말 다했지요. 

그 다음이 교회가 욕을 먹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오래 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하도 욕을 먹기 때문에. 교회가 동네북이에요. 저는 다른 종교의 어떤 부족함에 대해서 이런 저런 탓하는 것을 별로 못 들어봤지만 교회의 부족함에 대해서 이 사람도 탓하고 저 사람도 한마디 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심리적으로 솔직히 생각해보면 정말로 사람들이 탓하고 싶은 대상은 대통령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사실 하나님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있는 거예요.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느냐. 나는 왜 이렇게 사느냐. 나는 왜 이런 부족함이 있느냐. 나는 왜 불행하냐. 나는 왜 외로우냐. 나는 왜 내 소원을 이루지 못하느냐…. 결국 모든 사람들이 원망하고 싶은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게 책임이 없더라도 최고 결정권을 하나님이 갖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최고 결정권. 최고 결정권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지만 하나님은 너무 멀고 눈에 안보이고 막연하기 때문에 대신 사람에게 탓하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탓하고, 아내는 남편 탓을 하고, 국민은 대통령 탓을 하고, 미국 탓을 하고. 사실 누군가를 탓하는 것은 결국은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다면 탓을 안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나하기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탓할 시간이 없지요, 내가 잘하면 되고 내게 책임이 있는 게 다라면. 굳이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바라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은 탓한다는 것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은 정서의 문제이고 영혼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번은 제가 병원에 입원한 교인을 심방하러 갔는데 그 교인이 저를 보자마자 하는 말이 ‘목사님, 하나님이 저를 연단하시나 봐요.’ 그래서 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거라면 왜 입원했습니까. 그냥 앓고 죽지. 하나님이 연단한다면서 그러면 그냥 앓지 왜 병원에서 고치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연단하려고 준 것을 왜 피하려고 합니까. 그 이론적인 모순을 아시겠지요. 한편으로는 살기 위해 병을 고치기 위해 입원하면서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병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순이에요. 둘 중의 하나이어야지요. 하나님이 병을 주셨다면 앓고 죽어야지 왜 고치려고 합니까. 반대로 내가 이 병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도 나를 낫게 해 주실 줄을 믿든가.

오늘 본문의 나오미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나오미가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을 탓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세상에 기근이 오게 하고 하나님이 그의 가족이 죽게 하고 남편을 잃게 하고 아들을 잃게 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난폭하고 잔인한 분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 환란이 있고 기근이 있고 흉년이 있고 고난이 있지만 그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는 것은 아니에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도 타락했어요. 자연도 타락하고 인간의 체질도 타락하고 성향도 타락하고 그래서 그 이후부터 병과 가난과 또 기근과 아픔과 전쟁과 이런 것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고 하나님이 나를 징벌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건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자유지만 그렇지만 지금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논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논리적인 담론의 한계입니다. 사람이 상처를 입고 아플 때는 이런 생각이 옳으냐 그르냐, 그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아플 때 당장 필요한 것은 위로이고 사랑의 증거를 원하는 것이지 그때에 어떤 논리를 펴서 이런 생각이 옳지 않다 저런 생각이 옳다, 이건 사실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셨든 하지 않으셨든 간에 하나님은 최고 결정자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막을 수 있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막을 수 있었는데 왜 안 막으셨느냐.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면 사실 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대체로 침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기의 저자는 나오미가 한 말을 그대로 기록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논평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 다른 곳에도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라가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기가 생기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내게 자식을 주시지 않았거늘~’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사실 옳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병 주고 약주는 분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으면 그걸 믿어야지 자기가 생각할 때 아기가 생기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내게 자식을 주시지 않았거늘’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라의 이런 말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것을 기록할 뿐입니다. 두고 보면 알게 되기 때문에. 할렐루야.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이런 저런 말에 대해서 하나님이 일일이 대꾸하지 않습니다. 기다려보라는 겁니다. 기다려보면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도적으로 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왜곡하고 의심하고 악의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안 기뻐하십니다. 그 사람을 꾸짖거나 바로잡거나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프기 때문에 하소연하는 것은 그건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일부러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과 사람이 괴롭기 때문에 자기 하소연하는 것, 그 차이를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욥기를 보면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나무라셨지만 욥은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자기의 고난 중에 괴로움을 말한 사람이기 때문에 욥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당장 대꾸하시지 않고 침묵하시고 기다리게 하십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세상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항의를 하면 대체적으로 안 듣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G20 정상회의를 할 텐데 아마 세계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시위를 할 겁니다. 외국에서도 찾아와서 반세계화 시위를 하는데 그렇다고 세계 지도자들이 대꾸할 줄 압니까. 아닙니다. 저 사람들 또 저러네, 하다가 피곤하면 가겠지, 그냥 내버려둡니다. 사람에게 하소연을 하던 불평을 말하면 대체적으로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하소연을 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대답하시는 날이 옵니다. 그게 참 신기한 것입니다. 대답하시는 날이 옵니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온다는 얘기입니다. 신명기 10장을 보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신다’고 했고 마태목음 18장을 보면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소자라 하면 세상에서 제일 작은 사람을 말하는데 그들에게 천사가 있어서 그 소자를 대표하는 천사가 하늘에서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 사람들의 입장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얘기입니다. 그 사람들의 괴로움을 하나님이 매일 보고받으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의 사정을 하나님이 모르시는 게 아니에요. 알고 계십니다. 

다만 가급적이면 하소연을 하기 보다는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낫습니다. 불평하기 보다는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나님에게 할 말이 있으면 간접적으로 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공손한 말로 해야 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기도가 항상 공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하는 말이 항상 공손할 수 없어요. 우리가 항상 하나님에게 좋은 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질문할 때도 있고 불평할 때도 있고 여러 가지 항의할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기도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기도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기도하지 않고 마음이 괴롭다고 기도하지 않고 기분 나쁘다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때가 정말로 기도할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어렵게 생각하는데 그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말을 받아주십니다. 다만 의심으로 하는 말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이라도 믿음으로 불평하면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안 그러시는 줄로 제가 알고 있지만 왜 나에게는 이렇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남들에게는 사랑과 긍휼이 참 많으신 분이라고 알고 있는데 왜 나에게는 이렇게 하시는지….’ 이렇게 하면 하나님도 들으시겠지만 ‘하나님은 남들에게도 사랑이 없고 나에게도 없다’ 이러면 이건 의심이지요. 한 마디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할 말이 있으시면 하세요. 하나님께 직접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후에 나오미는 어떻게 됐느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오미가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아직 1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에요. 룻기가 모두 4장까지 있는데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하는 장면이 1장이에요. 다시 말하면 앞으로 변화의 가능성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장을 보면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나오미라고 부르고 나오미가 그것을 더 이상 거절하지 않습니다.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다’ 결국 룻기뿐만이 아니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것만도 아니고 인간에 대한 것만도 아니고 인간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끝나기 전에는 사람이 끝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끝났다고 말씀하시기 전에는 사람이 함부로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끝내시기 전에 사람이 단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에게 기회를 드려야 됩니다. 할렐루야. 

Give God a Chance! 베트남 전쟁 시의 반전 구호 중의 하나가 Give peace a Chance! - 평화에게 기회를 주어라! 는 것이었는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에게 기회를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되고 내 삶속에 역사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 됩니다. 그 기회가 다 오기 이전에 사람이 섣불리 자신의 삶에 대하여든,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든, 하나님에 대하여든, 교회에 대하여든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끝내기 전까지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아직 다 끝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직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오미가 마라가 되는 날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마라가 나오미가 될 수는 있지만 나오미가 마라로 이름을 바꾸는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앞으로 기뻐할 날이 많을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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