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렘 8:18-22)

  • 잡초 잡초
  • 635
  • 0

첨부 1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렘 8:18-22)
  

안톤 슈낙(Anton Schnack)이라는 작가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글은 우리나라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는 유명한 수필입니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 정원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있을 때. /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라고 시작되는 글입니다.
  
그러다가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소행(所行)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不眠)의 밤을 가져오게 했는지 모른다...' /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 하나의 치기 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 하지만 그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애를 태우셨던 것이다."라는 부분에 가서는 저도 절로 가슴이 찡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체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슬픔을 느껴야 할 때에는 느낄 줄도 알아야 하며, 더욱이 마땅하면서도 적절한 슬픔은 이 안톤 슈낙의 수필이 보여 주는 것처럼 매우 아름다운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희로애락'를 골고루 느끼게 하심으로써 그 풍부한 감정 작용을 통하여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운 친지의 경사에는 못 가도 '애사(哀史)'에는 꼭 가주어야 함을 인간의 기본 예의로 알고 있으며, 부모가 돌아가셨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릴 줄 모르는 자식을 보면 '저 사람도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됩니다.
즉 '마땅히 슬퍼해야 할 일에 대하여 슬퍼할 줄 아는 것' 역시 '사람다운 사람'의 당연한 모습인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다운 사람'이 느끼는 슬픔보다 한 차원 더 높게 '신자다운 신자'가 당연히 슬퍼해야 할 것에 대하여 진정 뜨거운 눈물을 흘릴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18절과 21절에서 "18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21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라고 애통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 하면 우리에게 소위 '눈물의 선지자'라고 알려져 있을 만큼 슬픔과 눈물로 점철된 사역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별명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잘 우는 성격의 소유자'라서 얻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많이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단지 그가 '사람다운 사람'이었으며 더 나아가서 '신자다운 신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예레미야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와 환경이 '선지자다운 선지자'라면 진정 슬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울 수밖에 없었던지 그 이유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참된 기독신자라면 당연히 슬퍼하며 안타까워하고 애통하면서 기도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바로 섬길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볼 때에 진정으로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8절부터 19절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18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19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르시기를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 하시니"라고 애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9절의 내용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말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독백의 형식으로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딸 내 백성"이란 유다 백성에 대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지극한 민족애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심히 먼 땅"이란 바로 유다 백성들이 사로잡혀 가게 될 바벨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시대적으로 남조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에 사역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유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망하게 될 것을 훨씬 전부터 경고했을 뿐 아니라, 결국에는 자기가 예언했던 그대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백성들을 죽이고 그 남은 자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광경까지 직접 목도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미래의 모습, 즉 황폐한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의 귀에 저 '심히 먼 땅' 바벨론에서 자기 백성들이 "부르짖는 소리"가 어떻게 들려올지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유다 백성들이 부르짖는 소리는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 왕이 그 중에 계시지 아니한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조국이 이방 군대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자기네 육체는 포로된 땅에 매이게 된 현실을 두고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라고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왕"이란 말도 다윗 왕조에 속한 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말 기가 막힐 소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하던 유다 민족은 막상 망국의 환난을 당하게 되자 한다는 소리가 "아니, 하나님이 정말 우리 중에 함께 계시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왕이시라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비극이 우리 조국과 민족에게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가 그런 징벌을 받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스스로 반성하며 돌이켜 볼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대신에 그저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만 돌리면서 원망의 목청을 높였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도, 제대로 섬길 줄도 몰랐음을 여지없이 보여 주는 말입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하나님이란 그저 자기들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하나님, 자기들이 어려울 때에 도와주어야 마땅한 하나님일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유다 백성들은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면 당연히 우리에게 이렇게 해 주어야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라고, 마치 자기네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들을 받들어 모셔 주는' 신이 되어야 당연한 것처럼 말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어지는 19절 하반절은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시기를"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 하였는고"라고 반박하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내가 너희들에게 잘 못해 주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내게 잘못을 범한 까닭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하여 항의의 아우성을 치는 유다 백성들에게 "너희들이야말로 소위 선민이라고 큰소리치면서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우상들을 집안에 들여다 놓고 그것들을 섬기면서 살아왔으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내가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에게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말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그따위 행위로써 나를 격분케 해 놓고서는 이제 와서 내가 살아 있느니 없느니, 내가 도와주지 않았다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웬 말이냐?"라고 격노하며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오로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충하는 데에 있었지, 조금이라도 하나님 편에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그야말로 주객전도처럼 자기네가 하나님 앞에 저지른 죄악은 조금도 생각할 줄 모르고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면서 원망의 항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로 그런 유다 백성들의 뻔뻔스러운 심령 상태를 인하여 '슬퍼하고 근심하며 위로를 받을 길 없는 번뇌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을 순전히 자기 자신의 행복을 채워 주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기복주의' 교인들이 수두룩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일천번제'의 기도를 드렸는데도 제 자식이 대학에 떨어지다니 이게 웬 말입니까?", "제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쳤는데도 왜 제 사업은 아직도 별무신통입니까?"라는 원망을 함부로 내뱉는 것입니다.
절대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무슨 '도깨비 방망이'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조금 세련되었다는 '현대인' '문화인'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유치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대신에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주일 아침에 자기 자녀를 주일학교에 좀 보내 달라고 집에까지 찾아온 주교교사에게 "우리 집 아이들을 그래도 교회의 주일학교에 보내면 정서교육에 좋을까 기대했는데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아서 이제부터는 안 보내기로 했습니다."라고 거절합니다.
  
장결자 교인을 어찌하든지 교회에 정착시키려고 매주 전화를 거는 구역장에게 "주일 하루쯤은 교회에 나가면 좀 마음도 평안해지고 생활에 안정감도 찾을 것 같아서 다녀보았는데 오히려 이런저런 교인들 때문에 머리만 복잡해지는 것 같아서 그저 집에서 편안히 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라고 잡아뗍니다.
교회를 무슨 사교단체나 교양클럽 쯤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무슨 친목회장이나 심리치료사 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행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즉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보다는 재물을 더 중히 여기고 자기 자식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하나님조차 그 재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 자녀의 뒷바라지를 해 주어야 할 하인처럼 여기게 되는 것이며, 실로 사신 여호와 하나님을 '격노케'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신자는 이처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내게 이것도 안 베풀어 주시고 저것도 안 해 주실까?'라고 원망하는 사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그저 자기 인생의 심부름꾼쯤으로 여기는 사람을 주위에서 보게 될 때 진정 슬퍼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생이 아직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믿음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그로 인하여 날마다 근심하며 기도드리고 계십니까?
  
구역원들 가운데 간신히 교회 출석은 하지만 걸핏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원망을 일삼는 약한 교인들로 인하여 자신의 중심이 번뇌할 정도로 안타까워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불신하고 그 하늘 아버지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하여 진정 슬퍼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신자는 '구원의 기회를 놓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에 마땅히 애통의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런 슬픔을 20절 이하 22절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20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21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22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에게 내려 주신 여러 차례의 구원의 기회를 다 놓치고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말았음을 두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슬퍼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말 번역의 20절 끝에 "하는도다"라는 단어가 첨부되어서 이것이 유다 백성들의 말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이 '하는도다' 즉 '그들이 말한다'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전체 문맥을 볼 때에 이 부분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독백으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유다 백성들이 적군의 침략으로 인하여 농사를 다 망치고 식량난에 빠지게 된 것을 한탄하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사실 이 말은 이미 추수 시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산을 얻지 못했다면 닥쳐올 남은 일이라고는 굶주림의 겨울밖에 없듯이, 유다 백성들은 이미 모든 구원의 기회들을 다 놓치고 이제는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멸망밖에 남지 않았음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훨씬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여러 차례 경고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끝까지 그들의 우상숭배의 죄를 회개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허락된 '용서받을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다 날려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그 안타까운 사실을 생각할 때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라고 애통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길르앗"은 유다의 동북쪽에 있는 산악 지역의 이름입니다.
그곳은 유향의 산지로도 유명했는데 이것은 당시 병 치료의 약재로도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약도 있고 의사도 있는데 왜 내 백성은 치료를 받지 못했을까?'라는 말은 '왜 내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큰 은혜로써 허락해 주신 풍성한 기회들을 바로 지척에 두고도 끝내 용서받지 못하고 멸망에 빠지고 말았을까?'라는 탄식의 비유인 것입니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장이었다면 어떤 기분이었겠습니까?
목이 터져라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전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자기를 멸시하면서 오히려 매국노라고 몰아세우던 그들이 결국 자신의 말을 듣지 않다가 자기의 예언 그대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된 것을 여러분이 보게 되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모르겠습니만 제가 만약 예레미야였더라면 "그것 봐라. 내가 뭐라고 그랬니? 정말 고소하다."라고, 옛날에 당한 수모를 기억하면서 분풀이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라고 자기 민족을 향한 끝없는 연민의 정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다 백성들이 그야말로 손만 내밀면 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은혜의 기회들을 끝내 거절하고 말았으며 그 결과 이제는 이미 추수때가 다 지나간 것처럼 모든 구원의 기회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음을 생각할 때에, 실로 자기 백성을 '딸처럼 사랑하는' 선지자로서 도저히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저와 여러분은 과연 이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실로 이 시대는 '가까운 곳 길르앗에 풍부하게 있는 유향과 의사'처럼 구원 얻을 수 있는 온갖 좋은 기회들이 넘쳐나고 있는 듯합니다.
어느 동네를 가든지 십자가 탑이 서 있는 교회당을 찾을 수 있고, 언제든지 텔레비전을 틀기만 하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으며, 기독교 서점에 가면 온갖 성경공부 교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정말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는 너무나도 가까이, 정말로 풍부하게 산재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척에는 아직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이 '은혜의 기회'들을 다 놓치고 영원한 멸망의 지옥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구원의 확신이 있는 '신자다운 신자'라면 이 기가 막힐 비극 앞에 '놀라며 슬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매학기 '어린이 선교원'에 등록하는 어린이들을 통하여 그 부모들을 교회에 등록시키고, 주말마다 운영되는 '어린이 새소식반'을 통하여 전도의 열쇠들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며, 매년 두 차례 '태신자 갖기 운동'을 통해서 전도 대상자를 정하고 기도드리는 등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 그야말로 무진장의 기회가 주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가지 않고 내 입을 열지 않음'으로써 지금도 수많은 영혼들이 아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교회 안에만 해도 각 교육부마다 담당 교육전도사와 교사들이 임명되어 있고 주일학교와 SFC 조직도 잘 되어 있고 온갖 다양하고도 재미있는 프로그램들도 잘 운영되고 있는데도, 아직도 이 강서지역에 한 번도 교회에 출석해 보지 못한 학생들이 수두룩하며 아직도 '공짜 선물'만 바라면서 특별 행사할 때만 반짝 출석하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중심이 번뇌하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계십니까?
  
'유향도 풍부하고 의사도 많은 것 같은데' 왜 나와 피를 나눈 부모자녀형제자매 중에, 바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이웃 중에, 매일 얼굴을 맞대는 직장 친구 중에 아직도 여전히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할 줄 모르는 자들이 남아 있는지 이 비극적인 현실로 인하여 애통하면서 그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새벽마다 눈물로 간구하고 계십니까? 

실로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다시는 기회가 없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 임박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구원을 얻지 못한 백성'들이 바로 내 주위에 있음을 볼 때에 저와 여러분이 진정 목사다운 목사라면, 부모다운 부모라면, 심방장다운 심방장이라면 '딸 내 백성이 상하였는데도 아직도 치료받지 못하고 있음'을 인하여 진정 '슬퍼하며 놀라움에 사로잡혀서' 울 줄 알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죄를 치료하는 복음의 '유향'을 풍성하게 제공해 주시며 교역자라는 '의사'를 세워 이들을 고쳐 주고 계시는 이 '은혜의 기회'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원 얻지 못하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진정 사랑의 눈물을 흘리면서 구령의 간구를 계속 올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면 된다."는 말을 흔히 합니다.
본인이 태어날 때, 자기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조국을 잃었을 때, 이렇게 세 번만 울면 된다는 뜻입니다.
꼭 맞는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값싼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꼭 흘려야만 할 정말 '귀한 눈물'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기독신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처럼 많이 흘렸던 눈물, '교역자다운 교역자' '신자다운 신자'라면 반드시 흘릴 줄 알아야 하는 눈물, 바로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불쌍한 영혼들을 인하여 근심하고 슬퍼하면서' 절로 흐르게 되는 눈물인 것입니다.

처음에 인용했던 안톤 슈낙의 수필은 어떤 결론은 없이 그냥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하나하나 나열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만, 거기에다 누군가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나를 아는 사람으로부터 잊혀져 가는 일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슬픔들이란 다들 사실상 '자기중심의 슬픔'이 아니겠습니까?
즉 세상 사람들은 그저 '나를 슬프게 만드는 주변 상황이나 타인들 때문에' 슬퍼할 뿐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와 같은 '나를 위한 슬픔'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안타까워하는 슬픔'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슬픔'을 느낄 줄 아는 분이셨으며 바로 그 슬픔을 인하여 가장 많은 '눈물'까지 흘리신 분이 아니셨습니까?
  
주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는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인하여 '통분히 여기시며 민망히 여기시면서' 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수난주간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그들이 '권고 받는 날을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결국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도록 멸망당하게 될' 날을 바라보시면서 우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전 인류의 죄짐을 지시고 '고민하고 슬퍼하시며' 눈물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사복음서의 어디를 보아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눈물'은 단 한 번도 흘리지 않으셨고 오로지 죄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심으로써 '슬픔'을 당하셨고 '질고'를 아는 자가 되셨으며 '피땀'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이보다 더 고귀한 슬픔, 이보다 더 값진 눈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지자와 사도들이 맡겨 주신 영혼들을 생각할 때마다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던 근심과 슬픔,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시던 동안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그토록 많이 흘리셨던 눈물 - 구령의 사명을 생각할 때 신자로서 마땅히 느껴야 할 슬픔으로 인하여 사람으로서 흘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이 사랑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