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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날에 (사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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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에 (사 4:2-6)
  

제가 군복무를 하고 있을 때에 군인들 사이에서 흔히 돌던 말 중에 하나가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꾸로 매달아도"라는 말은 '아무리 지금 이 시간에 겪는 근무나 기합이 힘들고 괴로워도'라는 뜻이고,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는 말은 '제대 날짜만큼은 어김없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보통 사람의 귀에는 군대의 수많은 속어 가운데 하나로 그저 하찮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루하루를 육체적으로 아주 고되고 또한 정신적으로도 극심한 압박감 가운데서 보내는 병사들에게는 적잖이 격려가 되는 말이며 어쩌면 그들의 군생활을 지탱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지금도 병역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 사병들의 대부분은 오늘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언젠가는 분명히 다가올 제대 날짜, 이것 하루가 줄어드는 보람으로 하루하루를 견디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그 제대 날짜라는 것이 국방부에서 기분 내키는 대로 연기시킬 수 있다거나 혹은 아예 평생 군복무를 시킬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병사들은 하루하루의 그 고된 훈련이나 근무를 견디어 낼 힘을 일찌감치 잃어버리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미래에 어떤 소망스러운 한 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비록 오늘 하루는 힘들고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넉넉히 극복해 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소망을 끝까지 놓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더러는 바벨론 땅으로 포로로 잡혀 가고 더러는 황무지가 된 유다에서 근근이 연명해 나가는 그 비참한 기간 중에도 결코 잊지 말고 끝까지 소망해야 할 한 날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일러 주신 말씀입니다.
사실상 70여 년 동안 나라 없이 지내는 기간 중에 모든 유다 백성들의 눈앞에 닥친 현실은 괴로운 것뿐이며 그들 자신과 민족의 장래는 그저 암담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그 날"을 그들에게 약속해 주심으로써 이 한 날을 믿고 기다리는 자들은 그 모든 현실적인 환난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과연 그 소망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유다 백성들이 그토록 큰 민족적인 환난 가운데서도 가질 수 있었던 소망, 오늘날의 참된 이스라엘 백성 된 기독신자들이 아무리 현실은 힘들다 해도 자신의 미래를 두고 늘 간직해야 할 소망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남은 자의 인내를 통하여 주시는 축복'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본문 2절에 "2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그 날"이란 직접적으로는 유다 민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될 날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조금 어렵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이 "여호와의 싹"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는 말이라고 해석되어 왔으며, 실제로 구약 성경에서 메시아를 '싹'으로 표현한 구절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에서만큼은 문맥상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어서 유명한 성경해석학자이기도 했던 칼빈 이후로 두어 가지 다른 해석이 대두되어 왔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이 "여호와의 싹"을 '유다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며,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베푸실 '새로운 축복의 시작'으로 보는 해석인데, 물론 어느 해석이나 다 나름대로의 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2절의 첫 번째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이 둘 다 '영화롭고 아름답다'는 말로 서술되는 병행 구조인 것을 염두에 두고 보면 "여호와의 싹"과 "그 땅의 소산" 역시 동의어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여호와의 싹"은 메시아나 유다 민족으로도 해석될 수 있지만 "그 땅의 소산"이란 말은 그렇게 해석하기가 어색해지고, 그렇다면 앞의 세 가지 해석 중에서 제일 마지막 해석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즉 이 구절의 말씀은 장차 미래의 '그 날'에는 "여호와의 싹"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유다 민족 가운데서 다시 돋게 하시는 축복의 기운'이 "아름답고 영화롭게" 피어날 것이며, "그 땅의 소산" 곧 '그처럼 다시 내려 주시는 축복의 결과로 맺히게 될 열매' 또한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유다 백성들이 회복된 조국에서 받게 될 축복의 '싹'과 '소산'이 그들에게 왜 그토록 '영광스러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우선 "그 땅"은 70여 년 동안 축복의 산출지가 될 소망이 전혀 없어 보였던 곳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유다 땅이나 예루살렘성은 축복의 근원이기는커녕 오히려 이방 민족 앞에서 저주의 대명사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둘째 이유는, 유다 백성들 역시 전혀 회복될 가망성이라고는 전무한 백성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그 황폐한 유다 땅에 남게 된 사람들이나 혹은 포로로 잡혀 가서 바벨론 이국땅에서 살던 사람들이나 모두 다 다른 민족들이 보기에는 그저 구제불능의 찌꺼기 인생으로 보였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지극히 절망적인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 가운데서는 끝까지 소망을 버리지 않고 견디어 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본문에서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라고 밝히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 말은 나중에 3절에 나오는 "시온에 남아 있는 자"와 같은 의미인데, 바로 그 모든 역경의 시기를 인내로써 통과하고 버티어 낸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들이 끝내 그 유다 땅에 다시 모여서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축복의 '싹과 소산'을 누리게 될 때, 그것은 실로 이방 민족들 앞에서 그 얼마나 큰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기나긴 고통의 기간을 통과하면서도 끝까지 인내함으로써 '남은 자' 된 성도들에게는 그처럼 아름답고도 영광스러운 축복이 약속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성도가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소망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할 정도이고 아무리 현재 자신의 살아가는 꼴이 남들 눈에 창피하게 보인다 해도 결코 자포자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내 처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오늘의 내 상황이 절망적이면 절망적일수록, 장차 미래에 우리가 받게 될 하나님의 축복은 그것과 비례해서 더더욱 큰 자랑거리요 영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교회가 세상 권력의 압제 앞에서 무력하게만 보이고 기독신자들이 불신사회의 핍박 앞에서 속수무책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코 우리 쪽에서 스스로 먼저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시작이 힘들면 힘들수록, 처음이 미약하면 미약할수록 주님의 교회와 성도가 받게 될 '나중 영광'은 '지금 현재에 받는 고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축복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 그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인내한 자에게만 '축복의 싹'이 자라고 그 '열매'가 맺히게 될 날이 반드시 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나긴 환난의 기간을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그 고통을 인내한 만큼 더욱 아름답고도 영광스러운 축복이 예비되어 있음을 기억하면서 이 소망을 끝까지 지키는 '남은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녀에게 내리시는 징계를 통하여 이루는 성화'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3절과 4절에 기록하기를 "3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4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고 했습니다.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는 물론 다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들을 두고 특별히 "녹명된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 첨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특별한 수에 포함되고 기록되어 있는 택자'들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 날'에 바로 그 택자들에게만 일어나게 될 또 하나의 일이 바로 "거룩하다 칭함"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도의 성화'를 가리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는 말씀대로 성화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내리신 대표적인 명령 중에 하나입니다.
또한 사람 편에서 볼 때에 이 성화란 '죄인이었던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므로 성도에게는 실로 귀중한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자동적으로 그 성화의 은총을 입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성화되는 과정도 결코 사람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소유'가 될 때에 가능하게 됨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속한 것'은 그것이 성막이든지 성물이든지, 제물이든지 사람이든지 간에 그처럼 하나님께 속하여졌다는 자체만으로 절로 거룩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그 소유주이신 하나님이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4절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을 어떤 과정을 거쳐 거룩하게 하셨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거기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이란 말에서 '영'이라는 단어를 '성령'으로 해석한다면 이것은 바로 '성령의 불로 태우는 심판 사역'을 의미합니다.
혹은 이 '영'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바람, 기운'이라는 뜻도 되는데, 그렇게 본다면 '심판의 바람과 소멸하는 바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상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문맥상 잘 맞으며 두 해석 사이에 근본적으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남아 있어서 녹명된 모든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 '심판'과 '소멸'이라는 과정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유다가 망한 후에 다시 회복될 때까지의 과정은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완전히 멸망시키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공의의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멸하는 불과 같은 징계'를 사용하셔서 유다 백성들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시고 그들의 "피"로 물든 죄를 다 "청결케" 해 주시는 아주 의미 깊은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 백성들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성에서 고생하며 살던 시간이나 포로로 끌려가서 비참하게 살던 나날들은 단순한 '저주의 때'가 아니라 실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민을 위하여 오묘하게 섭리해 주신 '성화의 과정'이 아니었겠습니까?

이것 또한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참으로 놀라운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 즉 택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결코 버리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슨 과정을 거쳐서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온전히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가 어떤 죄를 지으면 그의 남은 생을 통하여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서라도 결국 그 더러움을 씻고 하나님과 영원히 동거할 수 있는 '완전 청결'의 상태, 즉 영화(榮化)에 반드시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그 어떤 경우에도 낙심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루살렘 안'에만 남아 있으면, 비록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직 때를 완전히 씻지는 못하고 아직은 불완전하고 추한 모습이 내 인생에 많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기만 하면,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어떤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소유주 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도 점점 더 거룩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시련의 바람이 나의 온 인생을 다 날려 버릴 것처럼 거세게 느껴지십니까?
그 '바람'은 오히려 당신의 자녀를 더욱 '청결'케 하고자 하나님께서 일부러 보내시는 사랑의 징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혹 내가 받은 고통이 너무나 커서 하나님께서 이제 내 인생을 여기서 완전히 끝내 버리시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생기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를 더욱 순수한 정금처럼 성화시키시려고 내리시는 '소멸하는 불'의 연단 과정인 줄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라면 징계를 통해서라도 회복시키시고 더욱 거룩한 당신의 양자로 서게 하고야 마시는 것을 깨닫고, 이 놀라운 은혜 역시 끝까지 소망하고 체험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교회를 통하여 보장되어 있는 궁극적인 안위'가 우리의 소망입니다.

5절과 6절에 "5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 6또 천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은 회복된 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다 백성들이 누리게 될 가장 기본적인 은혜를 약속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그들이 모일 성회에 항상 나타날 '하나님의 임재'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시온산"을 중심으로 "집회"를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 그들의 조상이 출애굽하여 광야생활 하던 중에 보았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은혜를 그들 역시 똑같이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구름과 연기"나 "화염의 빛"은 모두 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든지 이스라엘 공동체와 동행해 주셨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들인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임재'해 주시는 곳에는 또한 하나님의 '영광'이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5절 하반절의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라고 번역되어 있는 부분은 '그 모든 것들 위에 영광으로 천막을 덮으시며'라고 번역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모인 장소와 그 모인 백성들 위에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이 '천막처럼' 완전하고도 충만하게 감싸면서 덮이게 된다는 뜻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곳은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영화로운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처럼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뚜렷한 '시온산의 집회'야말로 모든 인생의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이기도 합니다.
6절에서 말하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과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될 수 있는 "천막"이란 곧 세상의 그 무엇도 더 이상 성도를 괴롭힐 수 없는 '완벽한 피난처'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 어떤 악의 세력도, 원수의 공격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으로 천막을 치시고 보호해 주시는 '교회' 안에 거하고 있는 성도의 생명을 결코 건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완벽하고도 은혜로운 소망이겠습니까?
다시 재건된 예루살렘의 시온산에 성회로 모일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전처럼 그들 가운데 임재해 주신다는 사실이 회복된 유다 백성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집회'의 장소는 그 어떤 인생의 '풍우'나 '더위'도 결코 유다 백성들을 해할 수 없는 완벽한 평안의 피난처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까?
자신의 인생에서 '곤고한 날'이나 '괴로운 일'을 당할 때에 여러분은 과연 어디에서 위로와 평안을 구하고 계십니까?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그의 영광이 그늘이 되어 주시는' 곳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시온산'인 교회가 그 완벽하고도 안전한 피난처인 것입니다.

괴로울 때에 술집에 가서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하는 자들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 방탕에 빠짐으로써 인생의 안위를 구하는 '탕자'들은 참 얼마나 불쌍한 인간들이겠습니까?
그야말로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며 스스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한 주일 내내 힘들게 살다가도 주일만 되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아무리 헤어나기 힘든 역경의 와중에서도 성도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음의 창을 열고' 기도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즉시 내려 주시는 새로운 영력으로 충만하게 재충전됩니다.
  
온갖 인생사의 복잡한 일에 시달리고 불신사회의 거짓과 술수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다가도 이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진정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천막처럼 치시고 안위의 그늘을 만들어 주시는 영적 피난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눈앞의 현실이 아무리 다급하고 위험스럽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그 영광으로 감싸 주시는 교회를 중심으로 사는 성도는 세상의 그 어떤 '더위'나 '풍우'도 건드릴 수조차 없는 완벽한 평안을 누릴 수 있음을 확신하면서, 우리의 남은 평생에 계속 이어질 가장 확실한 이 소망을 끝까지 붙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유다 백성들은 그들이 당하는 현실적 고통 때문에 몸과 마음이 다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조국은 불에 탄 폐허만 남은 황무지가 되고 민족은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등, 실로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비참할 대로 비참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란 유다 백성들 스스로 보나 주변 이방 민족들의 눈에나 공히 구제불능의 절망 그 자체였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유다 백성들의 종말은 아니었습니다.
사람 편에서는 절망적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그 절망을 통하여 오히려 놀라운 소망의 '그 날'을 예비해 두시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이 오면 유다 백성의 '남은 자'들은 '인내 끝에 누리게 되는 축복'과 '연단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성화'와 '시온산의 집회 중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안위'를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물론 바벨론에 포로생활을 하던 유다 백성들에게 '그 날'은 결국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에게 '그 날'은 더욱 완벽하게 임하고야 말았습니다.
그 '그 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육강세하신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구주로 이 땅에 오신 날 '모든 택자'들에게는 구원을 비롯한 온갖 '축복'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심으로써 그 제자된 자들은 날마다 그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통하여 결국 주님과 똑같이 '영화'에까지 이를 수 있는 실로 놀라운 소망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몸 되신 교회의 머리가 되어 주시고 동행해 주심으로써 성도는 이 위대한 '천년 왕국' 안에서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끝내 세상을 이기고야 마는 놀라운 은혜까지 입게 된 것입니다.
이것들이야말로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성도의 최고 소망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눈앞에 '절망'이 가로막을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해 주신 이 '소망'을 꼭 보시고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인내'의 기간이 길고 고통스러울수록 우리가 받을 미래의 '축복'은 더욱 찬란히 싹으로 돋아나고 풍성한 열매로 맺히게 될 것입니다.
  
'징계'가 아프면 아플수록 우리는 더 빨리, 더 성숙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자라게 될 것입니다.
그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예루살렘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주님의 도우심과 당신의 날개 그늘로 가리어 주시는 주님의 안위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육강세하신 '그 날'부터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지기 시작한 이 소망을 남은 생을 통하여 끝까지 붙들고 살아감으로써, 그 모든 소망이 완전히 성취될 주님 재림의 '그 날'까지 함께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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