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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합당하려면 (마 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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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합당하려면 (마 10:34~39)


어떤 젊은 부부가 새 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하다가 옆집 여자가 빨래 너는 것을 보더니 아내가 말합니다. “빨래가 저게 뭐야. 빨래를 할 줄 모르는군요. 세제를 좋은 것으로 써야 하는데” 라며 혀를 찹니다. 남편은 밖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이웃집 여자가 빨래를 널 때마다, 아내는 옆집 여자가 빨래를 잘 못한다고 핀잔을 늘어놓았습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옆집 빨래 줄에 깨끗하게 세탁된 빨래가 널린 것을 보고 아내가 깜짝 놀라며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옆집 여자가 오늘은 빨래를 제대로 했네.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남편이 말합니다. “응,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우리집 창문을 닦았지.” 인생도 이같이 마음의 창문이 얼마나 깨끗한가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입니다.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말씀도 먼저 깨끗한 내 마음의 창을 통하여 받아 들여야 허락하는 은혜를 소유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내 마음에 맞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합당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적 신앙에 치우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모습과 거리가 멀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멋대로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합당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것 때문에 하나님의 가치를 잃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즉 세상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모세, 욥, 다니엘, 오바댜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와 성도들은 박해가 있었지만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승리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하였을 때 얻어진 결과였습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박해나 어려움 앞에서도 무릎을 꿇거나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순간을 위해 영원을 포기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더 더욱 안 됩니다. 

본문 34절 이하는 예수께서 복음이 세상에 전해질 때 일어날 일과 이에 대해 제자들이 견지해야 할 바른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침은 매우 역설적인 내용입니다. 일반적 기대와는 어긋나는 당혹스러운 내용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검’과 ‘불화’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화평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화의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진주와 같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헌신할 때 필연적으로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일이 있음을 가르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편하고 쉽게 믿으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통과 눈물의 대가를 치르지 못한 사람은 물에 떠내려가는 죽은 고기처럼 세파에 휩쓸려 믿음을 버리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고통과 대가를 치른다 해도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되는 길을 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하려면,
 
첫째로 더 사랑해야

중국의 어느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의과대학을 졸업하시고 큰 병원 원장으로 일하셨는데,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던 이 분이 예수를 알게 되고, 만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알고 나니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주를 위해서 살겠다는 생각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병원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달란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중국 의료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중국의 한센병 환자를 위해 병원을 세우는 등 열심히 의료선교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교사에게 “선교사님, 한국의 안정된 직업과 명예를 포기하고 중국의 선교사로 가셨는데 힘들지 않으십니까?” 라고 묻자 선교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알고 난 뒤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편안하게 원장으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했고, 목숨을 걸고 거룩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복음 전하는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많은 물질을 바쳤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37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혈연적이고 인본적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물론 가족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우선된 본분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차선이나 여분으로가 아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 자신보다 다른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하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자란 예수를 적당히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자입니다. 크게 쓰임 받은 자들의 공통점은 예수를 상대적으로가 아닌 절대적으로 사랑한 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지금 보다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것보다 예수를 우선적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합당한 자의 모습이 됩니다. 
 
둘째로 더 따라야

제임스 마이트너(James Meitner)는 알래스카(Alaska)를 연구하여 책을 많이 썼습니다. 40세부터 80세까지 40년간 연구하였기에 알래스카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알래스카에 대한 책은 많이 썼지만 알래스카를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추워서, 죽으면 아내가 과부되고 아이들이 고아될 것 같아서 못 갔습니다. 80세가 되도록 안 갔습니다. 심장병이 들어 수술하고 누워있던 그가 생각했습니다. “알래스카 연구를 40년 했는데 알래스카를 못보고 죽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아니다.” 그는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알래스카로 갔습니다. 

영하 52도에 에스키모들과 같이 살고 고래잡이도 같이 나가고 연어잡이도 같이 나가고 알레스카를 경험하게 됩니다. 생생하게 보고 연구를 하고 나서 남긴 말이 있습니다. “어째서 40년 전에 이런 결단을 못했을까? 어째서 40년 전에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과감한 결단이 없었던가?” 누구나 제 때 결단하지 못한데 대한 후회가 많습니다. 단순해야 합니다. 집중해야 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주께서 부르시는 대로 응답하고 나갈 때 비로소 제자가 될 것입니다. 

본문 38절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 도구로써 관례에 따라 죄수들은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반역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형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은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십자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동참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인간의 인내로 견디기 어려운 최고의 고통이지만 가치 있는 일이기에 따라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십니까?. 지금보다 더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를 따라야 합니다. 더 이상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머뭇거려도 안 됩니다. 언제나 바라보는 십자가가 아니라 지고 따르는 십자가가 되어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더 잃어야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일제 치하에서도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였습니다. 7년 옥고를 겪다가 1944년 4월 21일 순교하였습니다. 한때 일본 경찰은 그를 회유하려 가출옥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 목사는 산정현 교회에서 최후의 유언 같은 설교를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80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나의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떼를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산정현의 이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발자취를 따라 가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맙시다. 풀과 같고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결단코 하나님 외에 무릎 꿇고 절할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 보다 차라리 죽어 없어져 주님 향한 정절을 깨끗이 지키려 합니다. 주님 따르는 죽음은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 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주님 때문에 순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잃은 주기철 목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39절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여기의 목숨에 해당하는 원어 ‘프쉬케’ 는 ‘혼이나 생명’으로 번역됩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다는 것은 시한부적인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며 잃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영원한 가치를 버리는 자는 영혼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순교를 피하기 위하여 신앙을 버린다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버리고 포기하며 잃어야 합니다. 

예수를 위해 잃어버리십니까? 얼마나 포기하십니까? 예수를 위해 생명을 드릴 때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며, 재물을 바칠 때 그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고,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게 될 것이라’ 역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보다 더 잃어야 합니다.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보다 더 예수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보다 더 예수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지금 보다 더 예수를 위해 잃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 멋대로의 신앙이 아닌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서의 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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