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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심판 (롬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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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심판 (롬 2:1~16)


오늘 본문에 앞서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롬1:20)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므로(롬1:21)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그들을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두시고(롬1:24),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주시며(롬1:26),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고(롬1:28)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사람들이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롬1:25) 대신 우상을 숭배하며 순리를 버리고 부끄러운 일을 행하며 온갖 합당하지 못한 일로 가득한 자가 된 것이라 했습니다(롬1:24-31).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기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 뿐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유대인도 마찬가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2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사실대로”, “아주 공정하게” 되는 줄 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 곧 그의 은혜를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인자하심”은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마음에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4-5절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앞에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면서 사람들을 그들의 마음의 정욕과, 부끄러운 욕심과,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 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최후의 심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5절을 다시 봅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의 진노가 온전히 드러나고 그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의 심판입니다. 

이 심판에서는 유대인과 헬라인의 차별이 없을 것임을 사도 바울은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9절과 10절에서 반복해서 말하기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이 이방인에 비해 어떤 혜택이나 우선권을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일에 선택된 민족으로서 갖는 일차적이고 더 무거운 책임을 지적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는 유대인이라는 신분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을 밝힌 것이 본문 11절의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한 말이고, 이에 앞서 6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한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냐 아니냐를 따라 심판하실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할 것 없이 다음 두 가지 종류의 사람 중 어느 쪽에 속하느냐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7-10절을 봅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한쪽에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전자에 속한 이들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과 영생이 주어질 것이고, 후자에 속한 자들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보응하시겠지만 각 사람의 행함을 심판하시는 기준은 다를 것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알고 있었던 백성이고, 이방인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그들의 행함에 대한 심판을 받을 것이고, 이방인들은 율법이 아니라 그들의 양심의 증거를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본문 12-15절입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을 따라 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즉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살지 않았어도 자기 양심을 따라 살기만 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어차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는 모두가 합당하지 않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의 고발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고, 이방인들은 율법 대신 양심의 증거에 따라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 제 아무리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 해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따라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양심대로 산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그 양심의 행위로 의인이라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서 롬1:17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뒤따르게 될 3:28에서는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개신교의 출발을 가져온 종교개혁운동과 그 신학의 중심사상이 된 이신칭의론을 세우는 핵심구절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두 구절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즉 6-7절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신다.”는 말과, 10절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는 말과, 결정적으로 13절의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들은 이신칭의론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한 편지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같은 사도 바울의 말들 사이의 이 외면상의 모순을 어떻게 해소시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선 오늘 본문의 말들이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행위로인지 믿음으로인지를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즉 본문 6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한 것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믿음을 따라서가 아니라 행함을 따라서 보응하신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13절이 더 분명하게 보여주듯이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라.” 한 것도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대립시키고 그 중에서 믿음이 아니라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것과 율법을 행하는 것을 대립시키면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에 있어서 믿음을 배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 믿음이 중요함을 지적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 믿음은 율법을 그저 듣고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알기만 하는 형식적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라 율법을 알고 그대로 행하는 참 믿음의 소유자이어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이신칭의론을 배격하거나 그것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아무런 본질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핑계하지 못할 죄인이고 다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본문 1-3절). 유대인은 율법을 갖고 죄를 범했으며, 이방인은 율법 없이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죄인인 것은 율법이 고발하며, 이방인이 죄인인 것은 그들의 양심의 증거가 말해줍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방인들 가운데는 양심을 따라 선하게만 산 사람도 있을 텐데 왜 그들이 모두 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16절을 봅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하신다.”는 말과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는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권세를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리라는 것은 맞는 말이고 우리의 신앙고백이지만, 만일 그저 최후의 심판자는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 이 말뜻의 전부라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기쁜 소식이 되겠습니까? 누가 심판한들 우리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누가 최후의 심판자인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기 위하여 무엇을 결정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겠다는 결정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판하신다.”는 말의 뜻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는 말의 뜻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속생각까지도 다 들여다보고 계시며 그의 심판대 앞에서는 감추어질 것이 하나도 없이 다 드러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그것도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대로 될 줄 압니다. 그러나 그 “은밀한 것”이 단지 우리의 숨은 생각을 말하는 것이고 감추어진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의 은밀한 생각과 행동이 주님 앞에 다 드러난다면 우리는 더 무서운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고 더욱 더 무겁게 정죄당할 일밖에 없을 터인데 무슨 복음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은밀한 죄까지도 다 용서하시고 도말해버리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할 때 그것이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러므로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모든 사람의 유일하신 구원자로 믿으며 그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믿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이면”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모든 죄까지도 다 용서하신다는 말입니다. 또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신다.”는 말은 우리의 눈에는 누가 참 의인이고 누가 죄인인지 알 수 없고, 누가 참 믿음을 가졌고 누가 믿음 없는 자인지도 확실하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것조차 다 아셔서 올바른 심판을 하실 것이라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지 않으면 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정죄를 피할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으면 누구나 다 죄의 용서와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사도 바울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그 믿음을 가지고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생과(본문 7절)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라(본문 10절)는 것입니다. 반대로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로 말미암아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라(본문 8-9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심판을 받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심판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로 믿으면 됩니다. 그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이제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과 영생을 누릴 수 있음을 믿으면 됩니다. 이 복된 소식을 널리 전하고 한 사람이라도 우리 주님께로 데리고 나오는 일은 정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일입니다. 이 일에 힘껏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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