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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걱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눅 12:16-21, 16: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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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눅 12:16-21, 16:19-24)


우리는 누가복음 12장과 16장을 함께 읽었습니다.  두 본문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부자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부자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고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타나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그리고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는 우리들 모두가 잘 아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 상식으로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아는 대로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부자의 집에서 구걸하던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을 아무리 자세히 살펴본다고 할지라도 부자가 지옥에 갈만한 그런 특별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갈 만큼 무슨 좋은 일을 했다고 하는 내용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말한다면 별로 뚜렷한 이유도 없이 부자는 지옥에 갔고,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서 천국에 간 나사로는 기분이 좋았을는지 모르지만 별 이유도 없이, 특별한 하자도 없이 지옥에 간 이 부자는 참으로 억울했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을 한 번 가져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을 한 번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부자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그가 지옥에 갈만한 무슨 나쁜 짓을 한 것입니까?  아무리 살펴보더라도 이 부자는 보통 우리가 세상에서 돈 많은 부자들이 세상을 사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특별하게 그가 지옥에 가야만 했을 그런 이유를 우리는 본문 가운데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오늘 본문에 부자가 한 일에 대해서 한 구절이 나오기는 나옵니다.  본문 19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한마디로 이 부자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도대체 왜 나쁜 일입니까?  더군다나 그것이 어떻게 지옥에 갈 만큼 나쁜 일입니까?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부자들이 어떻게 삽니까?  돈 있고 여유가 있으면 당연히 좋은 옷을 입습니다.  잘 먹습니다.  그런가하면 골프를 친다든가, 낚시를 한다든가, 여행을 하는 등의 이런 저런 취미 생활도 하면서 재미있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부자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부자들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부자가 돈이 있어서 좀 좋은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입고, 조금 인생을 즐기는 것, 그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더군다나 그것이 왜 지옥에까지 가야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까?

더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한다면 이 부자가 돈을 모을 때 사기를 쳤다든가, 도둑질을 했다든가,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고리대금을 하면서 누구를 억울하게 해서 돈을 모았다는 말도 없습니다.  불의한 방법으로 축제를 했다는 그런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보면 이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성경의 판단에 의하면 결국 이 부자는 지옥에 갈 만큼 나쁜 짓을 한 사람입니다.  지옥에 갈만한 충분한 이유가 그에게 있다는 것이 성경의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과연 무엇이 이 부자로 하여금 지옥에 갈만한 죄가 되게 한 것입니까?

우리가 본문을 살펴보면 그 실마리를 한 가지 찾아 볼 수 있는 근거가 나옵니다.  그것은 20절의 말씀입니다.  20절과 21절에 나오는 이 나사로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 20절과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그러니까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가 그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들이 거지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거지 나사로는 몸도 성치 않았던 그런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이 구절로 미루어볼 때 바로 이 나사로가 부자에게 있어서 문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가 지옥으로 가게 된 것이 바로 이 나사로 때문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가 이 부자의 집에서 얼씬거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쩌면 이 부자는 지옥에 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는지도 모릅니다.  하필이면 이 거지 나사로가 부자의 집에서 얼씬 거렸기 때문에 이 부자가 지옥에 가는 날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부자가 지옥에 간 것은 바로 이 나사로와의 관계였음을 우리는 본문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었기에 부자가 지옥에 가는 그런 엄청난 결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까?  도대체 부자가 거지 나사로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지 나사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어떤 거지가, 그것도 온 몸에 헌데를 앓는 그런 거지가 여러분들 집에 와서 밥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해라."
그렇게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있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오늘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밥맛 떨어진다."고 내 쫓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정 안 나가면 112를 불러서라도 내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부자는 그래도 거지에게 잘한 것입니다.  적어도 저보다는 훨씬 잘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냉정하게 따져본다고 하면 나사로가 거지가 되어서 남의 집에서 빌어먹고 병이 든 것은 부자의 책임이 아닙니다.  부자가 잘못해서 나사로가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를 도와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꼭 도와줘야 된다는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도와주면 그저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도와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부자를 욕하고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칭찬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안 한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가 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그만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돈 많은 사람에게 '당신은 돈이 많이 있으니까 나를 반드시 도와주어야 된다.' 그렇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부자의 처분만 기다릴 뿐입니다.  도와주면 고마운 일이요 안 도와주더라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상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일반적인 상식과는 전혀 다른 기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 이것은 부자가 잘못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잘못도 보통 잘못이 아니라 지옥에 갈 만큼 큰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부자는 당연히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판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은 부자가 지옥에 갔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벌었으니까 내 마음대로 쓴다.  내가 이 돈을 버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얼마나 수고를 했는데 이걸 누구에게 줘.  내가 번 돈 내 마음대로 쓰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  내가 번 돈 내가 쓸 권리가 있다."

보통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아마 오늘 본문의 부자도 그렇게 생각을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와 같은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돈이 있는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하나님이 주신 책임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무한한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해도 그만이요,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반드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가진 물질, 그것은 자기 혼자만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가난한 자와 함께 가질 수밖에 없는 가난한 자와의 공동 소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십일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구태여 십일조가 아니라고 해도 교회 헌금이 다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은 교회 헌금이라는 것이 교회만을 위해서 쓰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구약 신명기 14장 29절에 보면 십일조를 걷어서 레위인과 교회를 위해서 써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중에 있는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들, 가난한 사람들을 먹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헌금이라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헌금은 꼭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아직은 재정적으로 미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흥되고 안정이 되면 이것을 꼭 실천해 보고 싶습니다.

교회 헌금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교회의 헌금을 쓸 권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마음으로 헌금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 언양 영신교회 교회 헌금을 쓸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언양 영신교회가 이 땅에서 존재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해야 하는 것도 이 지역에 소외되고 어렵게 살아가는 그들의 버팀목이 되기 위해서 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성경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돈이 있는 부자다.  당연히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써야 될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돈을 가지는 순간 그 책임도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무슨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고 내세울만한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마땅히 돈을 가질 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돈을 쓰도록 그 책임이 부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은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돈을 사용하는 것,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너무도 당연한 일을 하는 사람이요,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부자로써 해야 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단지 돈을 가진 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식을 가지는 순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이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기술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시간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그것을 갖는 순간 그것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될 책임이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무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돈을 가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의사는 병자에 대해서 책임이 있습니다.  의사가 되는 순간 아픈 사람에 대해서 무한한 책임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권력과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이 없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못난 사람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육체가 성한 사람은 육체가 연약한 사람에게 지고 있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게을리 하거나 지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죄도 무거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옥에 갈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무엇을 가진다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것입니다.  무엇을 갖는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갖는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일 나치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대학교수가 나치 정부의 비밀경찰에 붙잡혀 갔습니다.  이 교수가 항변을 합니다.
"나는 나치정부에 대해서 한 번도 비판을 하거나 나치정부를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조용하게 살았고 정부를 반대한 적도 없습니다.  나는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이처럼 죄가 없는 사람을 붙잡아다가 벌을 주다니 나는 참으로 억울합니다."
그때 그 교수의 옆자리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언도를 받은 목사님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교수님, 당신은 이 시대에 지성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될 선생님입니다.  당신의 말대로 이 잔학하고 불의한 나치정권을 당신이 한번도 비판하지 않고 그 정부를 한번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지성인으로써, 대학교수로써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큰 잘못이요, 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한번 가만히 살펴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애쓰고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자동차를 가졌다는 것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여유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도, 내가 건강한 육체를 가졌다는 것도, 내가 특별한 재능과 기술을 가졌다는 것도, 내가 지식을 가졌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어떤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그런 것들을 가졌다는 것도,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그것들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에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셨습니까?  만약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적극적인 책임을 우리가 다하지 못한다고 하면 나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부자가 괜히 지옥에 갔습니까?  할 일을 안 했기 때문에 지옥에 갔습니다.  부자가 사람을 죽였습니까?  아닙니다.  부자가 사기를 쳤습니까?  고스톱을 쳤습니까?  빠찡고를 했습니까?  부자는 나쁜 짓을 안 했습니다.  다만 그가 부자로써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흔히 우리가 생각하기를 나는 세상을 살아갈 때 남들에게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고, 죄를 짓는 것도 없고, 나쁜 일을 한 것도 없고, 그냥 선한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주어진 생활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나를 손가락질 할 것인가?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가정에 충실하고 그렇게 사는 것으로써 여러분들이 인생을 바르게 사는 것이고 그것으로써 만족한 인생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것,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평범하게 사는 사람, 주어진 일에 열심하며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누구에게 나쁜 짓도, 해로운 짓도 안하고 그저 내가 벌어서 내가 먹고산다고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나쁜 사람이라는 겁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가 바로 죄를 짓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들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16절 이하의 말씀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왜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내일 죽을 줄도 모르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가 없다는 겁니다.

사실 이런 점에서라고 한다면 우리들도 이 부자의 어리석음에 못지 않은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일 일은 모릅니다.  그런데 내일 일을 모르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설치고 욕심을 부리고 삽니다.  우리가 정말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생각을 하지만 그러나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50년 후에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아니, 100년 후에 우리 중에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들 모두가 다 저 잘났다고 설치고 다니지만,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것이 백년도 안 되어서 끝나고 말 보잘것없는 존재들입니다.  100년 안에 다 끝이 날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천년만년 살 것처럼 설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등장하는 이 부자는 사실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기 이전에 한심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심한 부자의 이야기다 라고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자가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  많은 재물을 얻고 난 후에 이 부자가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많은 재물을 얻고서 이 부자라는 사람이 고작 생각했다는 것이 어떻게 하면 자기가 좋은 음식을 먹고 마시고 즐길까?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까?  그것이었습니다.  아니 자기에게 재물이 많이 생겼다고 하면 적어도 이 돈을 가지고 어떻게 좀 의미 있는 일을 해볼 수 없을까?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없을까?  적어도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하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돈이 생겼다고 고작 걱정한다는 것이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까?  무슨 좋은 옷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내 인생을 어떻게 즐길까?  이런 유치한 것들의 생각에 머물러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한심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게 인생을 유치하게 살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때때로 많으나 적으나 얼마만큼의 물질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이 물질을 놓고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이거 적은 돈이지만 어떻게 보람있는데 써볼까, 나도 쓰기에 조금 빠듯한 돈이지만 그래도 어떤 사람하고 이 돈을 함께 나누어 써볼 수 있을까, 이 돈이 꼭 필요한 곳이 어디일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 걱정을 한 번이라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고작 한다는 생각이 돈이 생겼으니까 이것 가지고 평소에 입고 싶었던 옷을 좀 사야 되겠다, 좋은 음식도 좀 먹어야지, 식구들끼리 언제 한번 외식이나 나가야 되겠다, 혹시 비싼 이자를 주는 은행은 어디인가, 잘 모아두었다가 아이들에게 물려줘야 되겠다, 가을에나 갔다와야겠다.  혹여 여러분, 이것이 여러분들의 걱정이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유치한 사람들입니까?

피땀 흘려서 돈 벌어 생각하는 것이 고작 그것입니까?  돈을 가지고서 고작 생각한다는 것이 내가 어떻게 먹고 어떻게 잘 쓸까, 어느 은행이 비싼 이자를 줄 것인가, 이걸 어떻게 보관할 것인가?  돈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이, 걱정이 바로 요정도라는 것입니까?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유치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한심한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평생 인생을 살아가면서 걱정을 안 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걱정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걱정하고 살아가느냐, 이 걱정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런 걱정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유치한 사람입니다.  한심한 사람입니다.  좀 더 차원 높은 걱정을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추석 명절입니다.  이번 추석에는 누구에게로부터 무슨 선물을 받고, 누구에게 무슨 선물을 어떻게 하고, 어디를 가고, 무엇을 먹고….  여러분,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맞이할 추석이 아닙니다.  추석의 진정한 의미는 이웃을 생각하는 날이어야 합니다.  사회에 소외되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웃을 생각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날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 가운데 가장 그늘진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그들에게 선한 이웃으로 찾아가는 날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벌써 금년의 3분의 2를 보내고 있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 앞에서 여러분들이 많은 걱정을 하실 줄 압니다.  계획을 세울 줄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걱정과 계획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100년 안에 끝날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 그렇다고 한다면 한번 그럴 듯한 인생을 살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원 높은 걱정을 하면서 좀 살아봐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무엇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이웃 앞에서, 그리고 역사 앞에서 두려운 일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는 순간 그것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엄중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이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어떻게 쓰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이 그것을 가지는 순간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알고 싶어하십니다.  여러분들의 걱정이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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