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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등불 (삼하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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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등불 (삼하 21장) 
 
 
히브리 성경의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는 두 개의 두루마리로 구성된 한 묶음의 책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하 21-24장은 읽지 않아도 내용 전개에 지장이 없는 ‘부록’처럼 취급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은 6개의 세부 단락들이 A(21:1-14)B(21:15-22)C(22장)C'(23:1-7) B'(21:8-39)A'(24장)의 구조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는데, 신정왕국에서 인간 왕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요약적으로 보여주면서 열왕기를 준비하는 ‘경첩 역할’을 하고 있지요. 오늘은 이 중에 두 단락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세 해 동안 지속된 기근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약속의 땅에서 발생하는 기근을 단순한 자연 재해로 보지 않았습니다(왕상 8:35). 게다가 연이은 “삼년 기근”(1)이라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로 인식할 만했지요. 이에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기근의 원인이 사울의 죄 때문임을 가르쳐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죄를 덮어두지 않으셨습니다. 죄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드러나서 처리되어야 했지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윗의 삶에 있었던 범죄와 징계를 통해 죄라는 것이 결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죄는 무서운 것이어서 한 순간에 하나님의 종을 죄의 종으로 만들만큼 놀라운 힘이 있었지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이라 할지라도 다시는 죄를 가볍게 여길 수 없도록 엄히 징계하셨습니다. 죗값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모두 탕감되었으나 죄가 남긴 영향들은 다윗이 감당할 몫이었지요. 즉, 싸웠던 죄는 용서받아도 싸울 때 주고받았던 상처는 남아서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이처럼 죄를 범한 삶과 그렇지 않는 자의 삶의 차이가 있어야 공의롭지요.

그런데 본문은 사울이 범한 죄의 결과를 다윗이 담당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부정하곤 합니다.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강할수록 타인의 죄로 인해 내가 고통 받는 현실을 부당하게 여기지요. 하지만 가장이 실직하면 온 가족이 함께 고통을 겪는 것처럼, 인류는 개개인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운명공동체로 지음 받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조차도 각각 딴 몸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한 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가 그 한 몸에서 나온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팔이 고통을 받으면 온 몸이 함께 아픔을 겪는 것이 당연하지요(출 34:7).

범죄는 아담이 했지만 온 인류가 죄의 영향력 아래 살게 된 것은 아담이 온 인류의 가장이며 대표였기 때문입니다. 명칭만 없었을 뿐이지 사실상 아담은 하나님의 왕국에 세워진 첫 왕과 같은 존재였지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담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그 분 안에 있는 모든 자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를 얻게 하셨습니다. 첫 왕 사울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두 번째 왕 다윗으로 인해 율법적 저주로부터 자유를 얻는 모양세가 비슷하지요. 구약적 교회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속사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모형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인류가 원래 한 몸임을 말했는데, 신약 성경은 다시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고 했습니다. 성도는 이중으로 한 몸인 셈이지요.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개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남이야 어떻게 살든 나만 신앙생활 바르게 하면 된다는 개인주의는 성경의 가르침에 맞지 않습니다. 다른 교회야 어떻든 우리 교회는 잘 하고 있다는 개교회주의 역시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태도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자면 이전 시대의 다른 교회가 잘못한 일을 후대의 또 다른 교회가 담당해서 개혁해야 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종교인에게는 개인적인 범죄로 취급되는 일도 기독교인이 범하면 교회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신약의 교회는 싫든 좋든 한 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독특한 기관인 것이지요. 교회가 직분자를 뽑을 때 백성들의 수준이 어려서 사울 같은 사람을 뽑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도 어린 몸의 지체로서 함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 때 누구의 잘못인지를 밝혀서 책임을 추궁하려 할 것이 아닙니다. 책임은 직분자나 그를 뽑은 사람들에게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영적 수준이 낮은 것이 문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고통의 원인을 깨달은 다음 협력해서 함께 장성해 가려는 자세가 필요하지요.

기브온 사람은 본래 가나안 땅에 살던 원주민으로 여호와의 명령에 따르면 진멸해야 했습니다(신 20:17). 그런데 여호수아가 그들의 사절단에게 속아서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맹세하고 말았지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했기 때문에 나중에 속임수가 밝혀진 후에도 그들을 멸절시키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로 삼았습니다(수 9:15, 18, 23). 그런데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를 멸족시키고자 했습니다. 민족주의적인 열심 때문에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을 깨뜨리고 무죄한 피를 흘린 것이 이스라엘에 내려진 재앙의 원인이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돈으로 보상받기를 원치 않고 사울의 자손 일곱을 “여호와 앞에서” 매달기를 요청합니다(6). 9절에서 “여호와 앞에서”라는 말이 반복되었는데 이 일이 단순한 보복 차원이 아니라 여호와의 율법에 따른 공의로운 처벌의 성격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우발적인 살인이 아닌 고의적 살인의 경우에는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을 명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 것이지요(민 35:31). 다윗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대행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기브온 사람들의 요청을 수납했지만,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므비보셋은 넘겨주지 않았습니다(7).

맹세와 관련하여 사울과 다윗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예와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민족의 유익 아래에 두었습니다. 당장 백성에게 유익하다면 하나님께 행한 맹세쯤은 무시했지요. 그런 사울이 자기 민족에게 가져온 것은 유익이 아니라 3년 기근이었습니다. 반면 다윗은 자기 민족을 두둔하지 않고 공의를 시행했지요.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께 맹세한 일을 기억하고 지킵니다. 이 일들은 다윗 개인이나 그 민족에게 해가 되는 일 같지만 3년 기근을 끝내게 했습니다. 두 모습 중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취할 길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대한 맹세를 깨뜨리는 일은 교회 안에서 허다한 일이 되었습니다. 장로교에서 집사나 장로나 목사로 세움 받으려면 “본 장로교 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신종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서약을 해야만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맹세한 신조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경조차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딱딱한 교리 공부보다는 당장 교인들에게 유익한 프로그램들을 찾지요. 맹세를 지키기 위한 열정보다는 교인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열정에 분주한 모습이 과연 옳을까요?

역사적인 신조들에 대해 무관심해지면서 교회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 1:3)는 말씀을 지키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이 무엇인지 모호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교인의 모습으로 침투하는 각종 이단자들과 그들의 사상들을 방어할 힘을 상실해가고 있지요. 후손들에게 물려줄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호해졌습니다. 참으로 교회에 닥친 큰 재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다시금 하나님께 맹세한 일을 기억하고 신조를 공부하는 일에 열정을 쏟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사람이 죽을죄를 지어 매달더라도 당일에 장사하게 되어 있습니다(신 21:22-23). 하지만 이번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한 속죄제물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비가 내려 기근이 풀리기까지 여러 날 동안 매달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사울의 첩 리스바는 시체를 지키기 위해 밤낮 수고했지요(10). 다윗은 이 일을 듣고 긍휼을 베풀어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사울의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도록 명했습니다(11-14a). 다윗은 왕으로서 공의를 시행하고 긍휼을 베풀면서 그 백성들과 하나님의 단절되었던 관계성을 맺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지요.

이 사건에 대한 결론은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입니다(14b). 21-24장의 6개 단락 중 첫 번째 단락이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났지요. 이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가 인간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지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임을 증시하기 위해서는 기도로 시작되고 기도로 마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블레셋 거인들을 죽인 다윗의 용장들이 등장합니다(15-22). 그들은 피곤하여 죽을 위기에 처한 다윗을 구하면서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17)라고 합니다. 사무엘서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삼상 3:3)라고 했는데, 여기서 등불과 꺼짐의 표현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등불”(22:29)로 삼고,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임을 고백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시 119:105). 하나님의 말씀을 등불로 삼고 그분의 공의와 긍휼을 시행하는 왕은 참으로 백성들에게 등불과 같은 존재이지요. 하나님께서는 등불 같은 존재를 귀히 여기며 보호하는 용사들을 두셔서 그 등불을 꺼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번 단락들에서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왕의 역할이 무엇인지, 하나님과 왕의 관계 그리고 왕과 백성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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