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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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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1-6)


하루는 미국에서 영적 대각성을 이끈 무디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상담을 합니다. "무디 선생님, 문제없는 교회를 저에게 좀 가르쳐 주세요. 제가 세 번이나 교회를 옮겼는데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무디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제가 문제없는 교회를 알긴 아는데 추천을 못해 주겠다."라고 했어요. "왜 못해 줍니까?" "제가 당신을 그 교회에 소개해 주는 그 날로 그 교회는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없는 교회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이 지상 교회는 문제가 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현대교회 안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연령이 다르고, 성이 다르고, 학력이 다르고, 고향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경제사정이 다르고, 믿음의 정도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존재합니다.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모인 사람만큼이나 하나가 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작가 마크 퉤인이 이런 조크를 말했을까요? "나는 개와 고양이를 한우리에 집어넣어 보았다. 그들은 바로 적응하고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우리에 넣어보았다. 그들은 얼마간의 적응기간을 거친후에 친구가 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장로교인과 침례교인 그리고 천주교인을 한우리에 집어 넣어보았다. 그들은 바로 싸움을 시작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격렬한 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이런 하나 됨, 이것은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에게서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한 가장 중요한 기대였음을 아시는지요? 요한복음17:21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이 지상에서의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 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가 될 때 그들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 발휘할 수 있는 그 놀라운 가능성을 아셨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도 보시면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본문을 기록할 당시 에베소 교회는 하나 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유대인 출신과 이방인 출신, 등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 똑같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서로 간에 벽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사도 바울은 엡 2:14절에서, 우리의 화평이 되시는 주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 모든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막힌 담을 이미 허물어버리셨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엡 2:19절에서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다 같이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비록 얼굴이 다르고 이름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생각이 달라도, 만약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고, 한 하나님이 우리 모두의 아버지임을 고백한다면,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이 하나 됨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힘써 지키라.” 그런데 무엇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서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로 만들라', '하나 되게 하라', '하나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꼭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하나 된 것을 전제로 한 말씀입니다. 

이미 하나 되었기 때문에 그 하나 된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는 이미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킬 수 있을까요? 본문 2절을 보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2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 말씀에 의하면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킬 수 있는 4가지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4가지 덕목을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가운데 성도와의 교제가 흔들릴 때 혹은 성도의 교제가 깨어질 때, 또는 상처를 받을 때 자세히 살펴보세요. 우리 중에 누군가가 혹은 내가 이 4가지 덕목 중의 하나가 결핍되어 있을 때 우리의 교제는 위협을 받는 것입니다. 즉 우리 중의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온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오래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피차에 사랑으로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교제는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 

첫째로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겸손이란 무슨 뜻일까요? 겸손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남을 낮게 여기는 사람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공동체의 유익보다는 자기주장만 내세웁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교회는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고 분열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만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 일부가 되어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하며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지난 날 믿음의 사람들이 영적 생활을 할 때 가장 처절한 싸움이자 끝나지 않는 싸움이 바로 교만과의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마음 깊은 곳, 생활과 공동체 속에 교만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말씀 속에서 계속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은 우리를 조종하고 파괴하는 일을 서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겸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합니다. 그리고 겸손은 하나 된 것을 깨어지지 않게 합니다. 겸손하면 평화가 옵니다. 

두 번째로 온유의 덕목이 강조됩니다. 온유가 뭘까요? 우선 온유라는 것은 그 단어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어떤 이미지처럼 온유한 사람 그러면 아주 약한 사람을 연상하기가 쉬워요. 빌빌 대는 사람. 그게 온유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유란 단어의 본래의 뜻은 잘 통제되고 절제되고 있는 힘이란 뜻입니다. Power under control, 그 control되고 있는 power. 이것이 본래 온유란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뜻입니다. 일종의 거의 자기 통제의 의미, 그것이 온유입니다. 자기를 잘 조절하고 다스리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반대는 자기 통제를 잃어버리는 사람, 그러니까 쉽게 자기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사람. 쉽게 분노하고 신경질내고 폭발시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참 교제하기 힘들죠. 공동체의 평화가 위협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적 리더쉽에 있어서 이 온유는 다른 어떤 덕목보다 앞서 옵니다. 온유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공동체를 분열하게 합니다. 온유한 사람 주위에 사람이 몰려들지만, 성질부리는 사람 주위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입 바른 소리한다고 하며 분을 내는 사람은 외롭습니다. 온유한 사람 앞에서는 진실이 나와도 화를 잘 내는 사람 앞에서는 결코 진실이 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온유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예수님의 온유한 모습입니다. 얼마든지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고 다른 계획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고백한 이 모습이 온유한 주님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겸손함과 온유함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 세 번째 덕목 뭘 강조했어요, 그 다음에는? 오래 참음. 셋째로 오래 참음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설명할 때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이 제일 먼저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영어성경에는 ‘오래 참는다’는 말을 ‘never give up’으로 번역해 놓았는데, 오래 참는 것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기다림에 약합니다. 은행이나 관공서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지 못해 답답하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앞에서 연세 드신 분들이 운전하고 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위험하게 추월하다가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지를 못해서 불이 꺼지기도 전에 문을 열고 손을 넣었다가 뜨거운 물에 손을 데이기도 합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해놓고 음식 늦게 나온다고 성화를 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 음식을 만드는 분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러면 화나는 마음으로 음식을 만든다면 그 음식이 맛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기다리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무슨 말을 들으면 참지 못하고 분을 터트려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수하면 그냥 눈 감아 주지 못하고 꼭 지적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교회 처음 나온 청년의 찢어진 청바지를 보고 야단을 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믿어주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기다려주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기다려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공사중인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성숙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실수해도 참아주고, 실패해도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교회에 처음 온 청년이 폭탄 맞은 것처럼 눈에 거슬리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교회에 처음 온 새가족이 경우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함으로 실망 시킨다할지라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느 분에게는 10년 동안, 어느 분에게는 20년 동안, 아니 어느 분에게는 70년 동안 기다려 주셨습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해야 합니다. 쉬운 일이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어렵게 하는 사람에게 나도 똑같이 대한다면 그 공동체는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판단은 주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오래 참으시기 바랍니다.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보여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서로 용납하는 것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오래 참으라’는 말이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소극적인 의미였다면, ‘용납하라’는 남의 잘못을 덮어 주고 남의 단점을 포용하라는 더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사람들의 실수와 잘못과 허물을 들추어내고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용납하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참소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허물을 들추어 고발하는데 명수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4장 8절에서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0장 12절에도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저의 지나간 20여 년 동안의 사역기간을 돌아보면 교회가 어려울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몇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약점을 드러내고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가 떠돌 때, 예외 없이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으로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교회의 부족한 것을 용납해 줄 때, 예외 없이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입니까? 여러분들은 살리는 말,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입만 열면 죽이는 말,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여러분들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납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형사가 되어 남의 허물을 파헤치는 사람들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4-6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여기 보면 삼위 하나님도 하나가 되어 우리 가운데 섬기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혼자 일하지 않으십니다. 함께 일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함께 일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과 함께 하나가 되어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위대한 일은 결코 혼자서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선택하실 때도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전도하러 보내실 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함께 일할 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지만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홀로 생각하고, 홀로 걸었습니다.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지 못했고 마음을 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보조를 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교회는 일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하나가 되는 현장입니다. 일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내가 겸손해지고 온유와 오래참음으로 섬겨나가며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으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으신 그 사랑을 붙잡고 형제를 용납하며 나갈 때 그 교회는 점점 더 하나에로 나가는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혹시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는데 그것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그것이 교회를 힘들게 하는 일이라면 그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과연 내가 지금 말씀대로 바로 서 있는가? 믿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 보아야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한 공연장에서 지휘를 마치고 팬들과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되자 그를 좋아하는 팬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레너드 번스타인 선생님, 수많은 악기 중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악기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재치 있는 말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제2바이올린입니다. 제1바이올린을 훌륭하게 연주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은 참으로 구하기 어렵습니다. 프렌치 호른이나, 플루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1연주자는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 줄 제2연주자는 너무나 적습니다. 만약 아무도 제2연주자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음악이란 영원히 불가능하지 않겠어요?” 참 의미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왜 우리가 이처럼 하나가 되기 힘들어 합니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누구나 인생의 무대 위에 서서 주연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청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인생 무대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 무대를 밝히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주연을 하고 싶은 사람은 많아도 조연이 되고 싶은 사람은 적습니다. 그러나 조연 없이 감동적인 영화를 만들 수 없으며, 훌륭한 연극, 탁월한 드라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무대가 빛나는 것은 주연을 위해 헌신하는 조연과 엑스트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안도현이라는 시인은 다른 사람이 빛나도록 배경이 되어 주는 ‘안개꽃과 같은 인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안개꽃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장미나 다른 화려한 꽃을 돋보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답다 할지라도 안개꽃이 뒤에서 받쳐줘야 그 꽃이 훨씬 더 돋보이는 법입니다. 

이제 교회가 결실의 계절을 맞아 영혼 구원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주보에 간지가 나갔지요. 10/11일부터 한달간 특새를 합니다. 그리고 11/7일에 터치 153 새생명 축제가 열립니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번에 새벽에 깨어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민족을 깨우며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동화작가 정채봉 선생의 새벽을 예찬하는 새벽 편지의 한 부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는) 자욱한 안개가 포근히 안아주는 봄날의 새벽을 사랑합니다. 풀섭에 내린 이슬로 바지 가랑이가 흥건히 젖는 여름 새벽도 사랑하고, 베고 남은 벼 포기마다에 서리가 새하얗게 내려있는 가을 새벽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겨울 새벽 창을 열었을 때 밤사이에 소리 없이 내려와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는 눈은 그 어떤 것보다도 횡재한 것 같지 않던가요? 

그래서 나는 새벽 눈물은 사기꾼이 흘리는 것이라도 진실처럼 믿고 싶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인생의 새벽을 날마다 기도로 회개의 눈물로 깨우며 한해를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지금은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다시 흔들어 깨울 때입니다. 깨어나십시오. 그리고 새벽을 깨우십시오. 그래서 이 광진구에 새벽의 하나 된 우리 자녀들이 주의 영광을 노래하며 세상을 깨우는 또 하나의 희망을 노래하는 기쁨을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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