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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Ⅲ (삼하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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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Ⅲ (삼하 6:1-9)


우리는 계속,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이라는 인물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신앙과 삶의 지표를 가늠하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美國의 제16대 대통령이었던, Abraham Lincoln(1809-1865)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억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세계 최강대국인 美國의 역대 대통령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캔터기의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자라면서, 아홉 살 때 어머니까지 여의고도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苦學으로 변호사가 되고, 정계에 진출해서,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기 때문이겠습니까? 그런 것들이, 링컨의 위대함이 아닙니다. 

링컨의 위대함은, 그 時代가 요청하는 眞理를 간파하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신앙과 삶, 생애를 다 던졌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노예제도를 타파한 대통령입니다. 노예해방선언을 한 대통령입니다. 

당시 미국의 남부에서는 노예를 사고파는 것이 합법이던 시대입니다. 노예들을 그 주인에게서 탈출하도록 돕는 것이, 도리어 違法이던 시대입니다. 그가 1860년 11월 6일에 제16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링컨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戰死者가 무려 60만 명이 넘는 엄청나 남북전쟁이라는 代價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863년 1월 1일, 역사적인 노예해방 선언문에 서명합니다. 선언문에 서명할 때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평생 이 선언서에 서명하는 것보다 더 옳은 일을 한 적은 없다”했습니다. 그 해 11월 19일, 전몰자 묘지 봉헌식에 참석해서 “지금으로부터 80 하고도 7년 전에”라는 표현으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 2분 도 채 되지 않는 연설을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조상들은 자유와 萬人平等이라는 대명제를 실현하기 위해 이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세워진 이 나라가 오래도록 존속할 수 있을지 판가름하는 큰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 그 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굳게 다짐합시다. 하나님의 은총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를 낳을 것입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구상에서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링컨 대통령은, 그 시대가 요청하는 자유와 만민평등이라는 진리를 위해서, 노예해방을 위해서, 자기 인생과 삶,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그것이 그를 역사의 인물로 만든 위대함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人物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평가하신 이유,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중에, 확고부동하게 세운 왕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사실, 그의 왕위, 그의 신분이, 그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인물이 되게 한 기준이,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난 現狀, 중요합니다. 그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왜 왕위에 세우셨는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감추어진 마음을 읽어내는 것, 그것이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광고 분야에서 30년 가까이 일하고 있는 유재하 씨란 분이, “20세기 문맹자는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21세기 문맹자는 마음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다”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물론, 다윗이 얻은 왕권자체도 쉽게 얻은 것이 아닙니다. 30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그 과정은 험난했습니다. 왕위에 오르기 전 15년 동안, 사울의 政敵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사울 왕이 죽은 후에도, 다윗 家와 사울 家 사이에 2년 넘는 세월 동안, 지리한 內戰狀況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죽고 없었지만 ‘사울 家’(아브넬 장군, 이스보셋 왕)가의 세력은 여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을 다 겪은 후, 헤브론에서 유다 왕이 된 지 7년 6개월 만에, 드디어 온 이스라엘을 모두 통할(統轄)하는 名實相符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습니다. 그 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지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 5, 10).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두로 왕 히람은(지중해 연안 무역대국, 商船 多), 다윗에게 사절을 보내고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내서, 그들이 다윗을 위하여 집을 건축해 줄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사사시대부터 숙적이나 다름없던 가장 위협적 블레셋, 군사력이 강대한 가장 인접한 국가, 우리로 치면 허리를 맞대고 있는 北韓 같은, 블레셋까지 약화시킵니다. 블레셋과의 두 번에 걸친, 끝내기 전쟁에서, 다윗은 두 번 다 완승을 합니다. 블레셋 세력을 제압하면서부터 다윗은, 근심걱정이 사라진 왕권을 가지게 됩니다. 사울 왕 때, 빼앗겼던 게바(사울 정권의 근거지, ‘사울의 기브아’ vs 시온 예루살렘을 ‘다윗 城’)부터 게셀(블레셋 영토)까지 장악합니다(영상지도 참조). 

다윗의 왕권이, 확고해졌습니다. 이 시점을 유의하십시오. 다윗이, 자신의 王權이 확고해졌을 때 가졌던, 第一次的인 관심, 국정지표의 最優先 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 성공했을 때, 정상에 섰을 때, 立志傳的인 인물이 되었을 때, 그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무엇에 관심을 가지느냐?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신앙이고 그 사람의 영적수준입니다. 

사무엘 선지자 이후, 사울 왕이 통치하는 기간은 물론, 그 이후도 상당히 오랜 세월(50년이 넘게), 하나님의 櫃는 방치하다시피 했습니다. 사무엘선지자 이후, 왕정시대에 돌입하면서 사울이 왕으로 있을 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를 소홀하게 취급했습니다(하나님께 묻지 않던 시대).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이곳은 본래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였다, 예루살렘 서쪽 약 15km지점) 아비나답의 집(대제사장을 계승한 가정)에 보관시켜 놓았습니다(삼상 7, 1-2. 말이 보관이지, 거의 방치수준).

그런 하나님의 궤, 언약궤를 다윗이 ‘다윗 성’이라 부르는 예루살렘으로(정치1번지로, 수도로, 행정중심부, 국가 중심부에) 모셔오기로 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다윗의 中心(바른 마음, 하나님께 집중 된 마음)을 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삼만 명의 사람을 뽑아 모읍니다. 뽑은 삼만 명을 데리고 50년이 넘게 방치되었던 기럇여아림(바알레유다, 제사장 아비나답의 집)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 위해섭니다. 하나님의 궤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십계명 두 돌 판과 만나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지요. 그 언약궤는, 사람이 호기심으로 보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 영광, 임재, 능력(주의 권능의 궤; 시 132,8)의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聖物 中의 聖物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려는 다윗의 열정, 얼마나 귀합니까? 거룩한 열망입니다. 그의 渴望은 善했고, 動機 역시 거짓 없이 純粹했습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실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목적은 선하고, 동기 역시 순수했지만, 그 일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 읽는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다윗 자신도, 전혀 예기치 않았던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운 갈망이라 해도, 동기가 순수하다고 해도, 그 방법이 적절치 못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말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사고방식 속에는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 너무 서두르는 성향이 있다는 얘기지요. 결과를 얻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東西洋이 다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일을 진행하는 과정을 보면, 동서양이 서로 다른 점이 많습니다. 서양은, 좀 과정주의라 할 수 있을까요? 한국사람들은, 좀 결과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에 묶어서는 바느질 못한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궤를 옮기기 위해서 다윗이 선택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옮기기 위해서, 새 수레를 준비했습니다. 그 수레에다 하나님의 궤를 싣고 옮기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삼하 6, 3a). 이것은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인간이 고안해 낸 인간의 방법이었습니다(그러나 사실은, 다윗이 군대지휘관 천부장 백부장과 의논했습니다, 그냥 무작정 한 것이 아닙니다. 대상 13, 1-3). 

도대체 어디서 이런 잘못된 방법이 동원됐을까요? 이방인들의 방식을 따르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과거 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전쟁에서 빼앗았던 하나님의 궤를, 그들의 땅 에그론에서 벧세메스로 돌려보낼 때, 그들이 젖먹이 암소가 끄는 “새 수레”(삼상 6, 7)에 실어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방식을 다윗과 함께 한 군대지휘관들이 조언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들의 조언을 듣고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그들의 조언대로 과거 블레셋 사람들이 썼던 그 방식을 그대로 따릅니다.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보셨잖습니까? 다윗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께 여쭙고 행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다윗 城(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에는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옮겨와야 한다는 선한 목적, 순수한 동기가 너무 앞서다보니,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하나님의 방법’을 묻지 않았던 겁니다. 군대장관들의 조언만 듣고, 블레셋 사람들의 方式을 답습한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블레셋의 방법 얼마나 기막힌 아이디어입니까? ‘새 수레’ 명분도 있습니다. 수레에 실어서 ‘하나님의 궤’를 옮기면, 힘도 들지 않습니다. 또 얼마나 신속한 방법입니까?(하루라도 빨리, 다윗 城에 옮겨 놓고 싶은 마음뿐인데) 이보다 더 효율적이고 훌륭한 선택도 없습니다. 최상의 선택 같아 보입니다(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고, ‘一石二鳥’라지요).

우리도 왕왕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하나님 말씀]을 중시하기보다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方式에도 [하나님이 은혜 베푸시는 일 얼마든지 많다]며, 하나님 말씀과는 아무상관도 없는 방식을 손쉽게 차용해서 씁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느냐 물어본 적 있으십니까? 

민수기말씀 보십시오(민 4, 7장). 언약궤를 옮길 때는, 하나님이 命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1) 반드시, 레위 자손 중에서도 고핫 자손만이 옮길 수 있다. (2) 휘장으로 완전히 싸라. (3) 그리고 반드시 채를 궤의 고리에 꿰어 어깨로 메고 옮기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하나님의 방식입니다(노아, 노아가 …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모세 성막건축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되니라”). 

그런데, 지금 다윗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블레셋 사람들의 방식’대로 새 수레에 싣고, 옮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정성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옮길 때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고,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까지 연주합니다. 절대로 정성이 부족한 것 아닙니다. 마음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법궤를 실은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자, 소들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 하면서,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려 했습니다. ‘웃사’가 손을 들어 궤가 떨어지지 않게 붙잡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때,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진노하사(충돌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하나님의 궤를 옮기려는 다윗의 일이 실패하고 맙니다. 다윗의 리더십이,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은, 수많은 기름과 번제물로 드리는 제사보다, 順從을 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말씀 청종하는 것을,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 하십니다. 하나님 말씀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다 하셨습니다(삼상 15, 21-24). 

목적이 선하고, 동기가 아무리 순수해도, 뜻이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이루는 方式(法)이, 하나님의 법이 아니고 인간적인 방법이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과 무관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블레셋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기려던 다윗이 실패하자, 깊은 두려움과 시름에 빠져들고 맙니다(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다윗의 실패와 두려움의 根源이 무엇일까요?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無知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결핍되면 망한다 했습니다(호 4,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 시편 119편 105, 106절 말씀 마음 판에 새기십시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정하였나이다.”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다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성령님 믿고 산다고 하는 하나님 자녑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방식대로 사는 데 실패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말씀에 무지할 때도 많습니다. 세상 방식에 마음을 빼앗길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 말씀 삼가 듣는 자 되게 하시고, 그 말씀을 청종하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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