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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에는, 이제는 (롬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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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이제는 (롬 6:19)

(롬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주처(周處)라는 이름난 깡패가 있었다. 그는 몹시 포악하고 싸움을 잘하여 마을 사람들의 걱정거리였다합니다. 또 그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에는 교룡(蛟龍)이 살았고, 뒷산에는 호랑이가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주처와 교룡과 호랑이는 모두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악당 세 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처의 횡포가 가장 심했습니다. 

어느 날, 지혜로운 마을 사람 하나가 주처에게 호랑이를 죽이라고 설득했습니다. 이 말에 주처는 흔쾌히 호랑이를 죽이러 뒷산으로 들어갔습니다. “둘 중에 하나는 죽겠지?” “주처가 죽었으면 좋으련만...” 마을 사람들은 주처가 죽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주처는 호랑이를 찔러 죽이고 의기도 양양하게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정말 용감한 일을 했네. 자네 덕택에 우리는 호랑이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네.” “자네의 힘이면 교룡도 문제없이 해치울 수 있겠지?” 

마을 사람들은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고 온갖 말로 주처를 꾀어 부추겼습니다. 그 바람에 주처는 강에 들어가 교룡과 격투를 했습니다. 막상막하, 불꽃 튀는 싸움이었습니다. 한참을 싸우던 교룡은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수십 리를 떠내려갔는데, 주처도 그놈을 꽉 붙잡고 같이 떠내려갔습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습니다. 주처도 교룡도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두 놈이 모두 죽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자, 마을 사람들은 “와!” 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함께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주처가 죽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룡을 죽이고 강에서 살아나온 주처는 걸음을 재촉하여 마을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엉? 사람들이 왜 저렇게 즐거워하지?” 주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람들 곁으로 갔습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람들의 안색이 크게 변했습니다. 그렇게 즐겁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불안한 기색만이 가득했습니다. 주처는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걱정거리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하게 부끄러움을 느낀 주처는 그 길로 마을을 떠났습니다. 

어느 곳에 이르러 모두가 존경하는 현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처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그 현인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날까지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며 살았습니다. 이제 뉘우치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만, 제 나이로 보아 이미 때가 늦은 것 같습니다. 저는 끝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겠지요?”그러자 현인이 말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만족한다.’고 했는데, 당신은 아직도 젊으오. 또 사람들은 뜻을 세우지 못함을 걱정하오.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은 이름이 빛나지 않을 것을 슬퍼하오?” 드디어 주처는 개과천선하여 좋은 사람이 되었다합니다. 

오네시모는 노예였고, 악한 죄인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법으로는 도망친 노예가 붙잡히면 더욱 비참해집니다. 라틴어로 도망자 (Fugitivius) 의 첫 글자(F)를 몸에 새겨놓고 혹사하였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본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를 가리켜 이제는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라고 말합니다.

(몬 1: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빌레몬이나 바울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권세란 신분을 가리킵니다. 노예 신분이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요 백성의 신분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말 3: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하나님의 특별 소유가 되어 하나님이 아들처럼 아껴주신다고 합니다.
  
오네시모는 전에는 쓸모없는 인간이었습니다. 아니 남에게 해나 끼치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 받고 유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하나님께, 그리고 빌레몬에게도 그렇다는 겁니다.

(몬 1: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전에는 무익한 자가 이제는 유익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네시모라는 이름이 본래 유익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전에는 이름값을 못했지만 이제는 이름값을 하게 된 셈입니다.

(몬 1: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바울은 이제 오네시모를 복음의 일꾼으로 함께 데리고 있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 주인이 빌레몬이기에 허락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보다 그 속에 무엇을 담고 사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됩니다.
겉은 번지르르해도 속에는 악이 가득하다면 무가치한 사람일 것입니다.
마치 그릇과 같습니다. 그릇의 가치는 재질도 중요하지만 그 안의 내용물이 더 중요합니다.
금그릇, 은그릇이라도 그 안에 오물이 들어 있다면 오물통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나무그릇, 질그릇이라도 그 안에 보배가 들어 있으면 보배합이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치있는 존재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종이 한 장이 얼마나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똑같은 종이라도 신사임당을 그려 넣고 한국은행 총재 도장 찍으면 5만원의 가치가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성령으로 인침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지면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오네시모가 그랬습니다. 
오네시모는 전에는 사악한 인간이었습니다. 주인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도망가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몬 1: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바울이 그를 가리켜 자기 ‘심복’이라고 지칭합니다.
심복이란 말은 헬라어로 ‘스프랑크논’인데, 본래 ‘내장’ 혹은 ‘심장’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장이나 심장처럼 소중하고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얼마나 크게 신임하고 또 귀하게 보고 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그만큼 오네시모는 거룩한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부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찬송가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을 작시한 존 뉴우튼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전에는 잔인무도한 노예상인이었습니다. 비싼 값에 노예들을 팔아 돈을 버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동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는 사치품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주위에서 그를 가리켜 ‘냉혈인간’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마음속에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가 전격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죄악된 삶을 정리하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됐습니다. 그는 평생동안 당연한 목사 가운조차 입지 않고 대신 노예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야말로 죄의 노예였는데, 구원해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잊지 않으려고 그렇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전엔느 마귀와 같이 사악한 인간이 이제는 천사와 같은 성자로 변화된 본보기입니다. 

사울은 본래 지금의 터키인 소아시아 다소 지방에 고향을 둔 유대인으로 일찍이 예루살렘의 명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을 하고 출세를 한 사람입니다.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이는 바울이 어떤 배경 속에서 자랐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명문가문, 명문학교 출신이라는 배경을 가진 사람이며, 종교적으로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을  가졌을지라도 그렇게 남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오만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상 눈에 핏발이 서고,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모습으로 성경은 살기가 등등하였다고 합니다.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살기가 등등하다’는 말은 사람을 죽이려는 마음에 거칠게 호흡하는 모습을 비유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배려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로부터 기독교에 대한 왜곡된 교육을 받으면서 기독교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폭발하여 마침내 무자비하고 악랄한 기독교 사냥꾼이 되고 만 것입니다. 

(행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잔멸’한다는 말은 헤치고, 파괴하고, 위태롭게 만드는 것을 뜻하는 말로 그의 사명은 지상에서 교회를 싹 쓸어버리는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불·신하고 그의 몸 된 교회를 핍박하고 그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이 사울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을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와 같은 사울을 용서하여 주셨을 뿐 아니라 그에게 넘치도록 큰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은혜’ 라는 말은 사람에게 좋은 것을 가져 오는 가져오는 감사, 친절, 즐거움, 돌봄, 사랑, 기쁨, 호의, 기쁨과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전에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람을 예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부르시고 이제는 그에게 사도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겨 주셨습니다.
사도라는 직분만이 아니라 그 것을 잘 감당할 수 있는 능력까지 덧입혀 주심으로 유능한 사도가 되게 하신 것은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능하게 하신’이라는 말은 가능하게 하시고 힘을 제공해 주셨다는 말로 한 마디로 자기 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은혜를 체험한 바울은 그 은혜를 힙입어 일하게 되었습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얼마나 큰 은혜인지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넘치도록 은혜를 쏟아 부어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풍성하였도다’ 라는 말은 넘치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증가하여 늘어나는 과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하고 많은 업적을 이루었을지라도 교만할 수 없었고, 자랑할 수 없었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거듭거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엡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참 사랑과 용서를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다고 바울은 자기 입술로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였습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전에 그 때도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으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으며,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모범적인 종교인이었으나, 예수님을 몰랐고 믿지 않았으며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였던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는 예수가 이단처럼 생각되었고 기독교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처럼 생각되었고 한 없이 밉게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비결은 바울이 체험한 것처럼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오 길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마음 문을 열고 귀를 기우리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전과 이후로 역사를 구분합니다.

세계는 예수님이 오신 이전을 주전 (B.C Before Christ, 기원전)이라 하고 탄생의 해를 주후(A.D Anno Domino, 우리 주님의 해라는 의미의 라틴어. 기원후)로 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후 (A.D) 2010년으로 주님 탄생 후 2010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탄생은 A.D의 해보다 4년 정도 빠른 것으로 알려지지만 서기 연도의 기원은 ‘아노 도미노’, 곧 ‘우리 주님의 해’로 나누어집니다.
개개인은 전에는 율법과 보응으로 멸망이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랑과 구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모든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죄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범죄를 반복하는 죄의 노예로 전락하였습니다. 이에 더하여 율법의 정죄는 인간을 더욱 절망케 하고 죄의 지배력을 강화시켰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할 뿐, 죄를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함으로 죄의식만을 가중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자기를 인식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한 대속의 번제물로 삼아 인간을 죄악 속박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이로써 인간은 완전한 자유인으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육신이 연약하므로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르렀음을 지적하고 이제는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학습 유아세례 입교 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이 사실 바로 깨닫고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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