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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권위 (막 1: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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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권위 (막 1:21-28) 
 

흔히 부부는 살면서 서로 닮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한 연구에 의하면 부부는 살면서 닮지 않는다고 합니다.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 연구진은 결혼한 부부 1,296명의 성격과 조화에 관한 자료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남편과 아내는 함께 세월을 보내면서 닮아가는 것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오히려 부부들이 닮아 보이는 것은 배우자를 선택할 때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고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결혼정보회사는 성격과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끼리 주선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말에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결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합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으신 분, 아직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신 것입니다. 웬수(?)같은 인간과 결혼하였다고 생각하는 분, 바로 그 사람이 자신입니다. 자신을 더욱 사랑하십시오.

복음은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기 위해서는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만나는 고난과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연약함을 붙들어주고, 부족함을 채워주고, 어리석음을 벗겨주시는 무한한 능력을 만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동역자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형제애를 가지고 성실하게 목적을 위하여 희생하는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시몬과 안드레 형제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그 다음에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I. 교훈

21절 말씀입니다.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들어갔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에서 가장 큰 마을의 이름입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다메섹으로 가는 교통요지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세관과 같은 관공서와 로마 군인들이 주둔하는 부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습니다. 당시의 회당은 평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학교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는 마을의 모든 유대인 남자들이 모여 기도와 찬양을 드리고, 성경을 봉독하고 말씀을 듣는 공회당입니다. 유대인 어른들이 모두 모이니 마을의 중요한 일을 공식적으로 의론하고 결정하기도 하였습니다. 안식일은 율법이 정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에게 공식적인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것으로 사역하셨습니다. 
     
1. 공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개인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신 것은 공식적인 활동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만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종교적 비결을 가르치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기 위하여 따로 모으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만이 알아야 할 비밀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 교회의 생명력이 있습니다. 훈련의 방법으로 적은 사람을 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르침의 내용은 공개할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몇몇 사람만 아는 비밀스러운 것을 몰래 가르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드러내 놓고 배워야 합니다. 비밀스러운 것이 많은 것은 신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2a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은 듣고 놀랐습니다. 여기에서 놀라다[ejkplhvssw/에크플렛소]는 말은 ‘때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리 생각도 못하였다가 크게 놀라는 것입니다. 충격, 놀람으로 정신이 멍하여 지는 것입니다. 
     
2. 충격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듣는 사람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마치 방망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과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비속어로 ‘골 때리다’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골에 충격을 주는 이야기라는 뜻일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멍 때리다. 멍 까다’고 합니다. 머리가 멍하도록 충격적인 이야기나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내용으로 가르치셨는지 그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토록 충격이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2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22b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던 이유는 당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가르치심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3. 권위있게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하여야 할 말이 권위[ejxousiva/엑수시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기본적으로 능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거운 돌을 들 수 있는 능력[=뒤나미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이 돌을 들 수는 없지만 돌을 들도록 명령할 수 있는 능력[=엑수시아]이 있습니다. 이것이 명령할 수 있는 능력 즉 권위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저에게 ‘목사님은 포스(force)가 있다’고 말해주셨습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파워(power)가 있다는 말일 터인데, 어떤 힘이 있다고는 말씀을 안 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까다롭고 어렵게 느껴진다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권사님은 제 앞에서 제 아내에게 ‘목사님이 이렇게 어려운데 집에서 사모님은 어떻게 사시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꼼짝 못하고 아내는 잘 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제 아내에게는 저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가진 능력을 ‘뒤나미스’라고 한다면 제 아내가 가진 능력을 ‘엑수시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무엇을 하실 수 있는 능력도 있으셨습니다. 또한 무엇을 하게 할 수 있는 능력 즉 권위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압도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다시 발견하여야 할 것이 바로 권위입니다. 사실 성경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이 어떤 권위와 능력을 가지셨는지를 보여 주는 책입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권위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습니까? 


II. 권위

예수님께서 어떤 권위를 가지셨는지 보여 주는 사건이 바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침,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의 권위가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소리로 외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사람들은 아직 몰랐으나 귀신은 귀신같이 알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그 귀신을 향하여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26절 말씀입니다.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예수님께서 명령하시자 더러운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습니다. 더럽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추잡하고 불결한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반항하는 더러운 짓을 일삼는 사람이 고침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께 대항하는 영을 떠나가게 하였습니다.
     
1. 귀신을 나가게 하는 권위입니다.
     
우리는 정신분열증이나 인격 장애를 고치기 위해서 의학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더러운 영이 있다는 것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어느 좀도둑이 그의 은신처에서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훌륭한 경찰을 주셔서 소매치기와 악독한 무리들, 못된 짓을 공모하는 자들을 감옥에 잡아넣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배려가 없다면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저와 같이 불쌍한 도둑은 도저히 제대로 먹고 살 길이 없사옵나이다! 감사합니다. 아멘!”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감사할 내용도 아닙니다. 도둑질을 버리는 것이 사회적인 온전한 치료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치료자이십니다. 우리는 영적인 치료와 회복을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이 갖는 능력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주문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그 이름으로 명령할 때 더러운 영들이 떠나갑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거짓과 불신과 더러운 영을 향하여 외쳐야 합니다. 우리에게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는 또 어떤 권위가 있으셨습니까?
얼마 뒤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때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습니다. 열병은 높은 열을 동반하는 심각한 병으로 습기가 많은 갈릴리 바다 인근 지역에 흔한 풍토병입니다. 사람들이 그 사정을 예수님께 알렸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31절 말씀입니다.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예수님께서 그 부인 곁으로 가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일으키시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권위가 있으신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질병을 떠나게 하는 권위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치료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치료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느라고 의학적으로 치료받아야 할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병은 제때에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병원에 다니느라고 기도할 시간이 없어 건강이 회복된 후에 건강하게 된 이유를 모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병을 치료해 주신 여자는 예수님이 일으키시자 누웠다가 일어나 다른 사람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건강해 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건강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치료는 단지 건강의 회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병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지금도 능력입니다. 치료하는 라파의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사역에 도 어떤 것이 있었는지를 볼 수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 가까이에 있습니다.
     
42절 말씀입니다.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나병 환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로 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선생님께서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고, 그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나병을 떠나가게 하는 권위가 있으셨습니다.
     
3. 나병을 떠나게 하는 권위입니다.
     
여기에서 나병은 나병을 포함한 각종 악성 피부병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나병은 의학적인 의미 외에 또 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병이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막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할 수가 없이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어 종교적으로 배척을 받았습니다. 요즘 말로 사람을 왕따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 손을 대시고 만져주셨습니다.
     
워싱턴 AFP에 따르면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기록된 모세의 기적이 과학적 근거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합니다. 미국 국립대기연구센터(NCAR)의 칼 드루스는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 사이를 지나갔다는 이야기는 자연 법칙에 따라 발생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실험 결과 시속 101㎞의 강풍이 12시간 동안 불 경우 약 2m 깊이의 물이 갈라지고 길이 3.2㎞, 폭 4.8㎞의 마른 땅이 약 4시간 동안 형성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드루스는 이 실험이 출애굽기의 설명에 상당히 부합된다며 ‘3천 년 전의 이야기가 드디어 과학적 근거를 갖게 됐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똑 같은 일이 있어난다면 그것은 기술이지 기적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치료하셨던 더러운 귀신들린 병은 정신과에서, 열병은 내과에서, 나병은 피부과에서 치료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만 하실 수 있던 일들을 오늘날에서 일정한 기술만 가지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병원에는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 많은 능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여 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는 없습니다. 권위가 있다면 ‘억지 권위’가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서 권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니 권위를 생각조차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능력보다도 권위가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세상의 갈증을 해결할 권위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능력 이상의 권위를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능력이 아닌 권위에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까?


III. 감동 

27절 말씀입니다.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깨끗하게 하시자 사람들은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모두들 놀랐습니다. 여기에서 놀라다[qambevw/담베오]는 말은 온 몸이 마비가 될 정도로 놀랐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던 것과 전혀 다른 놀람입니다. 이것은 온 몸이 마비가 되는 감동입니다.
     
1. 감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는 머리를 때리는 충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위에는 가슴을 저리게 하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감동, 이것이 예수님의 권위의 핵심이 아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능력은 있는데 권위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고 크다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기를 죽이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숫자의 크기가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거기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는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민망히 여시기는(1:41),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는 찢을 듯한 마음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다름 아닌 사랑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세상도 경영의 한 방편으로 ‘감동 경영’을 외치는데 예수님의 몸 인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인 감동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동이 있는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28절 말씀입니다.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그리하여 예수님의 소문은 삽시간에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습니다.
     
2. 소문이 퍼졌습니다.
     
소문이 퍼졌다는 말은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감동에 굶주려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에 굶주려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퍼져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반드시 알고 있기를 부탁하였습니다(딤후 3:1)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딤후 3:5)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종교 생활을 하는 듯이 보이겠지만 종교의 힘을 부인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때가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지금이 그 때가 아닙니까? 만약 우리들이 신앙의 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신앙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렇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교회를 통하여 어떤 능력이 아니라, 권위 즉 감동을 받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도 가지고 있는 능력을 드러내려한다면 우리는 권위도 잃고 감동도 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도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세상과 경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 권위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 그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감동에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사랑을 따라 사는데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가슴 아파하고, 그 사랑으로 감동을 펼치는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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