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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히 1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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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히 10:19-25)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을 떼놓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성령이 하나님의 아들로 일하게 하기 때문에 성령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은 단순히 신비적인 것에 치우쳐 있지 않습니다. 

우리 한국 교인들 가운데 이상한 현상과 기적을 동반해야만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비교적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늘에 속한 거룩한 삶을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펼쳐보이게 합니다. 그렇기에 성령 안에 신령한 판단력을 가져야 하늘의 시민권자로써 바른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각 권을 연속적으로 강론하면서 여러분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은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사셔서 성령의 열매를 가득 맺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순서대로 강론하자면 오늘 빌레몬서를 해야 하지만 비교적 간단한 내용이어서 히브리서를 강론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히브리서의 주제가 오늘 봉독한 설교본문 가운데 21-22절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 주제를 간단하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사장이 계시매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하는 말은 사실 구약의 배경, 특히 레위기를 알지 못하면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법정적인 의를 가르치는 현대 구원의 교리는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이해하거나 받기가 어렵습니다. 출애굽기에 시내산에서 성소를 지을 때 제사장을 위임하여 세우고 그 제사장으로 말미암아 제사를 드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소제도를 알지 못하면 히브리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합니다. 

저희가 전하는 구속사를 처음 접할 때 히브리서는 매우 유용한 책입니다. 그래서 교회 개척 초기에 히브리서를 주일오후강론시간에 공부를 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때는 희미한 빛만 누릴 뿐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구조도 보이지 않고 전체의 중심을 잡을 수도 없어서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기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전체가 한 눈에 잘 들어옵니다. 다만 모세5경의 배경이 없는 분들에게는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이해가 쉽지 않다는 점은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히브리서에 나타난 성령 안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살펴보겠습니다. 그러자면 히브리서에 나타난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제를 잘 알고 나면 히브리서 전체에 나오는 단어와 어휘를 잘 이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히브리서 10:32-39절에 있는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이 말씀을 보면 히브리서에 나타난 교회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전 날에 믿음의 큰 싸움’을 싸웠던 곳입니다. 즉 예수를 믿고 나서 큰 핍박과 박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럼 어떤 큰 고난의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인가? 33-34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비방과 환난을 당하여 세상의 구경거리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옥에 갇힌 자를 동정하고 함께 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소유까지도 빼앗겼습니다. 그럼에도 이 교회는 이런 핍박을 기쁨으로 견디어냈습니다. 왜냐하면 더 나은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교회는 큰 핍박을 견딘 곳이었습니다.

또 하나 이 교회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36절에 교회를 향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왜 인내가 필요하냐고 하냐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 약속하신 것을 받을 때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 그래서 37절에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교회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지체되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심지어 믿음을 굳게 가지지 못하고 뒤로 물러가는 자들, 곧 배역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주님의 재림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박해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심한 박해는 순교를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12:4절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이전에 믿음의 큰 싸움을 당하였고 견뎌냈어도 피흘리기까지는 싸우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힐지언정 순교까지는 안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때가 오니까 배역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에는 게으름을 말하고, 초보지식에만 머물러 단단한 식물을 먹지 아니하며, 담력과 담대함을 자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일’, ‘끝까지 붙잡으라’, ‘인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피곤하여 낙심하는 문제, 연약한 무릎을 말합니다. 그래서 한 그릇 팥죽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버렸던 에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 나타난 교회는 계속되는 핍박과 고난에 피곤하여 낙심케 되고, 주의 재림은 지체되니 처음 열심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결국 장자의 명분을 팔 정도로 하나님의 기업을 얻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여러 번의 경고말씀이 히브리서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큰 제사장이 계시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자!’고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적인 권면은 언뜻 보면 히브리서의 교회상황과 무관한 듯 보입니다. 교회가 겪고 있는 박해와 피곤하여 낙심하는 문제들과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권면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면이 히브리서의 교회에게 아주 적당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여하튼 히브리서가 이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라면 우선 ‘우리에게 있는 큰 제사장은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야 합니다. 그 후에 ‘온전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하여도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은 같은 말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의 큰 두 줄기는 제사장에 관한 것, 그리고 믿음에 관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후에 마지막에 ‘나아가자’에 대하여 결론으로 말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제사장과 믿음 이 두 큰 소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들어가면 이해하기 편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전체를 나누자면 먼저 1:1-4:13절까지 나눌 수가 있겠습니다. 이 단락의 주제는 ‘아들로 말씀하신 것을 끝까지 붙잡고 순종치 않는 본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4:14-10:18절까지 나눌 수 있는데, 이 단락의 주제는 ‘우리에게 있는 승천하신 대제사장은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은 10:19-12:29절까지로 볼 수 있는데, 그 주제는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부분은 아들의 말씀을 강조하고, 둘째 부분은 제사장을 강조하며, 셋째 부분은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런 후에 최종적으로 13:1-25절까지는 ‘어떻게 제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지’에 대하여 말하며 마지막 축복과 인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를 전체적으로 요약하자면 ‘아들로 말씀하신 언약을 순종하여 우리에게 있는 큰 제사장을 따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함으로 나아가서 영구한 도성을 상속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대한 배경을 잘 아시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책의 제목처럼 히브리 사람들이라면, 유대인으로 기독교인이 된 자들이 이 편지를 받는다면 너무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다른 바울서신처럼 인사말이 처음에 없습니다. 끝에는 축복과 인사가 있는데 처음에는 없습니다. 그만큼 아들로 하신 말씀을 강조하는 셈입니다. 그 인사말 대신에 1:1-3절이 나오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1:1-3절을 보시겠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여기서 ‘옛적에 하신 말씀’과 ‘이 모든 날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대조가 되고, 여러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과 아들로 하신 말씀이 대조가 됩니다. 또한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서로 대조시켜서 ‘우리 조상들에게’와 ‘우리에게’가 나옵니다. 이는 전부 구약과 신약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나오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것이 더 큰 구원의 언약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만물의 상속자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았다고 선포함으로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 권세가 있는 말씀이 얼마나 더 탁월한가를 이제 1:4절부터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랬을 때 옛 언약의 말씀은 천사들로 하신 말씀에 불과하지만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교회에게 하신 말씀은 아들로 말씀하신 것이니 얼마나 더 큰 것이 아니냐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천사로 하신 말씀은 모세가 수종드는 종으로 봉사를 했지만 아들로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집을 맡은 상속자로써 아들이 봉사를 했으니 얼마나 더 크냐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말도 순종하지 않아 광야에서 넘어진 자들이 있었는데, 하물며 아들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그 마지막이 어찌 되겠느냐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심판하실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12-13절에 종말에 받을 심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천사로 하신 말씀과 아들로 하신 말씀을 비교한 뒤에 히브리서 저자는 천사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아들로 하신 말씀을 듣는 우리도 순종하여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마지막 심판 때에 순종과 불순종을 결산할 것이기 때문에 잘 지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예리한 칼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떤 칼인가? 마치 정육점에 쓰이는 칼과 같아서 뼈로부터 살과 기름을 남김없이 발라내는 역할을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판단하며 하나님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도록 결산을 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천사로 하신 말씀을 불순종하여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로 하신 말씀을 등한히 여기면 그 받을 보응이 어떠하겠는가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순종해야 하겠습니까? 4:1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승천하신 대제사장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으라고 합니다. 

왜 우리가 굳게 붙잡아야 하는가? 4:15-16절에 답을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돕는 분이시기에 굳게 붙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가 우리를 때를 따라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으면 모든 시험과 고난 속에서 순종하심으로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굳게 붙잡고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게 교회의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가 히브리서를 대하면서 이해하기 편하게 하나의 일을 떠올렸으면 합니다. 뭐냐 하면 1997년에 일어난 IMF입니다. 참으로 나라의 큰 시련이 닥친 해였습니다. 그때 많은 한국 사람은 야구경기를 보는 것이 위안이요 즐거움이었습니다. IMF로 인하여 집의 가장들이 자살을 하고 기업은 구조조정을 단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이러한 때에 국민에게 힘과 용기를 준 사람은 바로 박찬호였습니다. 세계적인 선수들이 모여 경기를 하는 메이저리그에서 전날에 없었던 한국인이 투수로써 승승장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많은 국민들은 힘껏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박찬호에게만 돌리는 박수는 아니었습니다. 한국인이 세계적인 야구리그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고 비록 고난 중에 있었지만 한국 사람들은 박찬호로부터 용기와 힘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매’라는 말을 ‘한국에게 박찬호가 있으매’라는 말로 바꾸어 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시험과 고난을 하나님을 순종하심으로 이겨내신 큰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때를 따라, 즉 고난을 받을 때에 그가 능히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어떤 제사장이시기에 우리를 도울 수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에 대하여 5:1-10:18절까지 말합니다. 왜 큰 대제사장이라 하는가? 5:1-7:28절까지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구약의 아론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라고 비교하여 설명함으로 큰 대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족보와 출신부터 다르다고 말합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 얼마나 더 뛰어난 자인가를 말합니다. 그 결과를 이렇게 말합니다. 

7:28절입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하게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그 후에 8:1-10:18절까지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의 직무가 구약의 대제사장과 비교하여 얼마나 더 탁월한가를 설명합니다. 

8:6절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대제사장이 섬기는 성소와 직분에 대하여 말씀하고 그로 말미암아 죄사함에 대하여 역시 구약의 대제사장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9:11-14절이 그 결론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구약의 제사장으로 드린 제사는 짐승의 피로 드린 것이요 해마다 반복하여 드려야 함으로 죄를 영원히 없게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사장으로 드린 제사는 자기의 피로 드린 것이요 한 번 드림으로 다시 드리지 아니하였으니 영원히 온전하게 하는 제사로 죄를 없게 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좋은 언약입니다. 늘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약혼의 언약이 가져다주는 삶의 질과 결혼의 언약이 가져다주는 삶의 질을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아들로 말씀하신 언약에 참여한 백성이며 아들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셔서 하늘 성소에 담대히 나아가는 구원의 삶을 누린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어떻게 높은 대제사장인가를 말하고, 또한 그의 직분은 얼마나 탁월한가를 말했습니다. 그럼 이제 이러한 대제사장을 따라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가를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본문의 말씀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구약의 짐승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죽을까봐 무서움과 떨림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들어가는 길은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입니다. 구약 때는 휘장 안으로 들어갔지만 휘장이 찢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구원의 길이 예수의 죽으심으로 그의 육체로 휘장을 찢으셨기에 열렸습니다. 

그 새로운 길을 새 대제사장과 함께 나아갑니다. 그는 하나님의 집의 사환이 아니라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십니다.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남으로 나아갑니다. 구약 때는 짐승의 피를 지성소 안 속죄소에 뿌림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뿌림은 악한 양심을 영원히 온전케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젠 그리스도의 피를 뿌려 나아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새사람을 입었습니다. 

펄시 콜레가 말했던 ‘내가 본 천국’에서와 같이 지구상의 어떤 영혼이 은하수를 따라 저 우주공간에 있는 천국에 가는 길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구약에 나아갔던 길을 바탕으로 새로운 길을 대제사장과 함께 하늘 성소에 가는 길을 히브리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 때는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고 제사장이 나아갔습니다. 그런 것처럼 이제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아 나아갑니다. 참 마음으로 나아갑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변하지 않는 동일한 계속되는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흔들리지 않으며 고난 속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더 좋은 언약 안에서 나아갑니다.

그 온전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약속하신 이의 미쁘심을 아는 믿음입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나아갑니까?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쓰면서 나아갑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에 대하여 한 문장으로 정리를 합니다. 

10:39절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에 대하여 이제 11장부터 설명합니다. 온전한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온전한 믿음도 구약의 믿음의 증인들과 비교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설명합니다. 그냥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역사적인 믿음을 말하므로 그 온전함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11장에 수많은 구약의 믿음의 증인들을 열거합니다. 그 후에 이렇게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11:39-40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믿음의 경주가 없으면 구약의 믿음의 온전함이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로 믿음의 경주를 완성하는 일이 주어졌습니다. 마치 릴레이 경주에서 다른 모든 경주자가 잘 달렸더라도 마지막 경주자가 실패하면 그 온전함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믿음’이라 하면 구원역사의 믿음을 완성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로마의 원형경기장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우리가 달려가는 믿음의 경주를 응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의 마지막 경주자로써 이 믿음을 완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구약의 모든 믿음의 증인들도,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도 함께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주를 하려면 무거운 것을 다 벗어버리고 달려야 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골인점까지 끋까지 인내하며 달려야 합니다. 그 골인점은 어디입니까? 12: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왕도이시며 믿음을 온전하게 하신 예수를 바라보고 달려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는 믿음의 왕이 되셨습니까? 12:2-3절입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IMF때에 한국인은 박찬호를 바라보고 나아갔습니다. 좌절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그 모든 고난과 시련을 견디어내며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죽음의 고난을 이긴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를 거역하신 자를 참으셨습니다. 왜 참으셨습니까? 눈 앞에 있는 즐거움 때문에 참으셨습니다. 그건 무엇이었습니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이었습니다. 바로 이 분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분이 우리의 모든 고난 속에서 우리를 좌절케 하거나 낙심하게 하지 않으시고 격려하여 일어서게 하십니다. 그가 모든 일을 참으신 것처럼 우리도 참을 수가 있게 합니다. 바로 이 분이 우리의 믿음의 경주의 목표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아직 이 교회는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믿음의 싸움을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12:4절입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그러나 징계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징계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유익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징계를 받을 때는 슬퍼 보여도 그 후에는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단련하는 것이니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발로 곧은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저는 다리가 있다면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물러서거나 뒤돌아서지 말고, 절며 뒤뚱거리며 이쪽저쪽 허둥대지 말고 곧은 길을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이 길은 혼자 달려가는 길이 아닙니다. 12:14절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주를 향하여 달려가는데 헛수고를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라 주를 보기까지 달려가야 합니까? 형제들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는지, 괴롭게 하는 자가 없는지, 음행하는 자가 없는지, 에서처럼 장자의 명분을 한 그릇 팥죽에 파는 자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새 언약에 합당한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말씀을 끝까지 지켜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경고합니다. 12:25절입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어떤 고난 앞에서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하늘로부터 말씀하신 언약을 지켜 순종하여 진동치 못할 나라를 상속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어떠한 제사로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구약처럼 짐승을 제물로, 곡식을 제물로 드려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13:1절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형제 사랑을 제물로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고난이 와도 형제 사랑을 끊어지게 하지 말고,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끝까지 계속해야 합니다.

결혼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혼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나타내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세대는 너무나 음란합니다. 그저 아무렇게 연합을 하는 경우가 많고 이를 정당화하기까지 합니다. 

음행하지 말고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것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그 대응방법까지 자세하게 안내를 합니다.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돈을 잃고 직장을 잃는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하면서, 이렇게 대응하라고 가르쳐줍니다.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주님은 결코 나를 버리시지 아니하며 나를 떠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돈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러주고 인도하던 자들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며 나아갑니다. 여러분이 들으시면 불편하실지 몰라도 이제까지 여러분과 계속해서 살펴본 신약성경의 각 권마다 얼마나 말씀의 사역자에 대하여 중요시하며 말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말씀의 사역자와 관계가 잘못되면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이 사역을 즐거움으로 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의무요 자기 유익입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이러한 구절만을 뽑아서 다 나열하면서 설교를 했으면 합니다. 너무나 모르니까요. 혼자서만 거룩하고 말씀만 잘 알면 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해야 온전한 예배가 됩니다. 이런 제사를 드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고난이 와도 동일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다른 교훈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난을 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도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로 말미암아 찬송의 제사를 드려 나아가야 합니다. 선을 행함과 나누어주는 것으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가 성전과 집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 핍절한 자를 위하여 나누어주었던 그런 제사를 드려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던 자들에게 순종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경건을 연습하라고 했던 것과 역시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들로 하신 말씀으로 이루실 이 큰 구원에 대하여 생각하십시다. 아들이 얼마나 높으신 신분인가를 아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경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구약 백성이 말씀을 불순종해 받았던 형벌보다 더 큰 형벌을 받기 때문에 말씀을 잘 지키고 순종해야 하늘의 안식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우리에게 있는 큰 대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도리이시니까 이 분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가 우리의 모든 고난과 시험을 이기신 분이시니 때를 따라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구약의 믿음을 완성하는 믿음의 경주자로써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고 달려가십시다. 고난이 와도 뒤로 물러서지 말고, 재림이 지체된다고 게으르지 말고 동일하게, 끝까지, 계속하여 이 경주를 완성하십시다.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말씀에 복종하여 고난을 지고 영구한 도성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큰 구원에 동참케 하신 주님을 찬송하며 형제사랑을 나누며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고난 속에서 온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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