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를 받아야 기쁘시게 합니다 (왕상 3:6, 히 12:28-29)

  • 잡초 잡초
  • 404
  • 0

첨부 1


은혜를 받아야 기쁘시게 합니다 (왕상 3:6, 히 12:28-29)


1866년 초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립니다. 아예 천주교를 말살할 정책을 세운 것입니다. 한국에 들어와 선교하던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 수천 명이 이 때 학살을 당합니다. 이 일을 역사적으로 병인박해 또는 병인사옥이라고 합니다. 대원군에 의하여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잡혀 처형을 당했고 3명은 화를 면했습니다. 3명의 중의 한 사람인 리델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하여 주중 프랑스 함대 사령관인 로즈에게 박해소식을 전하면서 보복원정을 촉구하였습니다. 이에 로즈 사령관은 함대를 이끌고 침입하였습니다. 이것이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였습니다. 프랑스 함대가 원정을 와서 강화도에서 전투하였고 특히 이 때 문수산성의 전투는 유명한 전투였습니다. 
  
프랑스 함대 사령관이 왜 조선에 대하여 선전포고하였습니까? 왜 강화도에 까지 와서 전쟁하였습니까? 조선에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니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좋은 선물을 받지 않고 돌려보내는 것은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영화에도 그런 줄거리가 있었습니다. 두 가문이 오랫동안 반목하고 갈등하며 원수같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한 가문이 다른 가문에 선물을 보냈는데 그 선물을 받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 일을 선전포고로 간주하고 두 가문이 문장을 앞세우고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이 왜 갈등합니까?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을 주셨는데 세상이 이 선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선전포고로 간주하셨다는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서도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혼인잔치의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계획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혼인날이 되자 임금은 풍성한 잔치를 준비하고 초청한 동네 사람을 데리러 사람을 보냈지만 초대 받은 사람들이 모두 거절하였습니다. 임금은 화가 나서 군대를 파송하고, 살인자를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르라고 하였습니다. 선물을 선물로 받지 못할 때에 하나님은 가장 노여워하십니다. 은혜를 은혜로 수용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가장 슬퍼하십니다. 
  
요한복음 3:18에는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끝내는 죽게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고,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진짜 은혜입니다. 선물 준 사람이 가장 기뻐할 때는 받는 사람이 감사하게 받아줄 때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제가 잘 아는 어느 전도사님은 저희 가정과 오랫동안 아무 친밀하게 지내던 분이신데 평양에서 피란 오셔서 아주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작은 교회의 전도사님을 일하셨는데 저의 어머니가 때를 따라 선물을 보내시면 선물을 도무지 받으실 줄을  몰았습니다. 심지어는 돌려보내기도 하시고, 선물을 가지고 집까지 가도 거절하실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저의 선친께서 선물을 받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너무 거절하고 받지 않는 것도 도에 지나친 일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자발적인 선택 사랑(election-love)과 언약사랑(covenant-love)이 함께 한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란 우리의 필요를 값없이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 은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은혜 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없다. 은혜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는 전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전적으로 무능합니다. 전적으로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은혜를 받아야 하고, 누구나 다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선물인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데 어떤 은혜를 받아야 기뻐하시는지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은혜로 받아야 기쁘시게 합니다. 
  
히브리서 12:28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였습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광야에서 미혹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시편 95:11에는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미 애급에서 나와서 조금만 견디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아깝게 영원한 나라,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중도에 탈락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최후에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실체입니다. 최후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아무리 세상나라에서 잠시 동안의 평안을 누린다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영원한 나라를 다 잡았다가 놓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낚시를 할 때 보면 다 잡았다가 대어를 놓치는 경우가 있습디다. 눈앞에서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길 수 있는 경기를 마지막 몇 분, 몇 초에 역전이 되어 승리를 놓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경주, 신앙의 경주에서 이런 일은 없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자’라는 말은 ‘에코멘 카린’입니다. 이 말은 ‘은혜를 붙잡자’는 뜻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심판을 자초하는 배교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행위를 범하지 말고 은혜를 굳게 붙들 것을 권면합니다. 함께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자는 강력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왜 은혜를 받아야 합니까? 죄를 지은 인류는 은혜가 아니면 율법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잠시라도 살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율법적으로 완전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율법적으로 완전한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것도, 잃지 않고 간직하는 것도 다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흔들리는 나라 때문에 웃고 울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 ‘대한민국이여, 영원하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잘 돼야지요. 그러나 우리나라가 영원하겠습니까? 이 지구상에 영원한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동북아시아의 작은 반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인구밀도가 높고, 자원이 없는 나라입니다. 고대사의 비운을 한꺼번에 안고 있는 나라입니다. 아시아 대륙에 나라가 설 때마다 침범을 당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자를 책봉할 때마다 중국에 가서 황제의 윤허를 받아 왔습니다. 

지금 북한의 김정운도 중국에 가서 김정일의 후계자로 허락을 받아 온 듯합니다. 우리나라는 근대사에 세계 이목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휴전이 아닌 정전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나라 돈도 아닌 달러화에 울고 웃고, 유로화를 확보하려고 애쓰고 있고, 위안화나 엔화의 오르고 내림에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평안합니다. 아슬아슬하지만 성장합니다. 여러 가지 불안 요소도 있지만 안전합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모델로 삼는 나라가 되어 연설할 때에 한국을 예로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영원하며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물론 아닙니다. 
  
다니엘서에 나타난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본 신상의 이야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영원한 나라가 없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바벨론은 강국이었지만 메데바사에게 멸망당합니다. 메데바사도 엄청난 땅을 가진 강국이었지만 헬라에 망하고 맙니다. 헬라도 알렉산더 대왕의 힘에 의해 강국을 이루었지만 망했습니다. 로마도 한 때는 엄청난 국력을 가진 나라였지만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구에는 영원한 나라란 없습니다. 이집트에 가시면 아부심벨을 한 번 가보세요. 이렇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힘도 없습니다. 

지금의 로마에 가보면 옛 선조들의 유적을 빼놓고는 볼 게 없습니다. 그리스에 가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옛 헬라의 명성은 어디가고 지금은 선조들의 영광만 캐고 있습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왓에 가보면 옛날 그 곳에는 거대한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페루의 맞추피추에 가면 옛 잉카문명의 유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을 외계인들이 와서 건설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초로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어디에도 영원한 나라는 없습니다. 
  
징기스칸의 원나라는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반도의 고려를 비롯한 인도를 제외한 아시아 전역과 지금 ‘스탄’이란 이름을 가진 나라들, 동유럽 일대가 전부 원나라가 지배했던 땅입니다. 그런데 원나라는 지금은 망하고 몽골은 작은 나라로 전락했습니다. 원나라가 망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쿠빌라이 형제의 왕권 다툼과 황실이 라마교에 심취하여 화폐를 남발하였던 것이 원인이라고 합니다. 몽골은 지금 옛 영광을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나라의 도움을 받는 작은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만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이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은혜로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나라를 강력하게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경제, 국방, 기술, 정보 등을 통하여 나라를 튼튼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데 이런 것들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지, 전능, 전재, 영원, 창조하시는 분인 우리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강력하며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의 팔복에서 모든 행복은 미래 시제입니다. 그런데 두 행복만은 현재 시제입니다. 첫 번째 행복과 마지막 행복입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은 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입니다. 하늘나라는 미래의 얘기가 아니라 이미 여기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이어 받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은혜로 받았으니 잘 지켜야 합니다. 바울이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하신 권면의 말씀처럼 든든하게 서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든든합니까? 마르틴 루터는 그가 만든 찬송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가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든든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은혜로 받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은혜에 대한 경건함과 두려움이 있어야 기쁘시게 합니다. 

28절 하반절은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고 합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고 종말적인 하나님의 심판을 늘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대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29절에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종말적 모습을 말합니다. 이런 하나님은 종말적인 자세로 섬기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은 참 그리스도인의 자세요, 믿음이요,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닮은 속성을 의미합니다. 경건한(godly)이라는 말은 영어의 뜻으로 보면 ‘하나님처럼’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로 어떤 사람이 상당히 영적이어서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상기시키는 경우를 칭할 때 사용됩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보인다면 하나님이 분명히 기뻐하실 것입니다. 
  
거짓 경건은 이중 죄악입니다. 야고보서 1:27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합니다. 위선적인 경건,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경건이 아니라 참된 경건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1537년 출간된 제네바 교리문답에서 칼뱅은 경건(영성)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스스로 도망치는 두려움을 지니지 않는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없이 합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 심판 날이 되면 좋아합니다. 
  
신약성경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을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스데반 장사한 사람들을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가이샤라의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경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아들 같은 복음의 일꾼 디모데도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경건한 사람을 하나님을 기뻐하십니다. 
  
경건함과 두려움은 항상 함께 갑니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압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두려워말라’는 말이 구약에는 107회, 신약에는 42회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세상을 두려워하며 삽니다. 
  
대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은 20번 가량 나옵니다. 생명을 주시는 경외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건전한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7:1에는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2:17에는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18장에는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울 때에 조건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의 사람의 자격이며 자세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소교리문답’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두려움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시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두려움이 공포심으로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은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진실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두려워 보디가드를 두고, 인해장막을 치고, 시해할까봐 아무데서나 밥 먹기 두려운 것은 잘못된 두려움입니다. 경건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은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결론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우리 속에 경건함과 두려움이 있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욥, 베드로, 바울, 주기철, 손양원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속에서 예수님을 빼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 누가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이 있으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세상이 두렵지 않으면 순교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고,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면 절대로 순교는 불가능합니다. 
  
‘열정’이란 말을 영어로 ‘enthusias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 안에서’란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은혜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실 때에 우리가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열정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때문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민수기 6:23-26에는 ‘아론의 축도’라고 알려진 말씀이 있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하나님의 얼굴이 함께 하시는 은혜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얼굴을 맞대어 보고 있기만 해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