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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감한 전도자 (행 4: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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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전도자 (행 4:7-20)


I. 촛점이 분명한 교회

어떤 목사님이 가정의 달에 「아담과 하와」에 대해 설교를 했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자마자 100%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하기를 “어디 갔다 이제 왔느냐. 너는 내 살 중에 살이요 뼈중에 뼈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이요 믿음입니까?」 설교를 한참 하는데 그날 처음 온 새 신자가 큰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고를게 있었어야지!”

오늘 이 세상은 참 고를게 많습니다. 복잡하고 할 일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럴 때 일 수록 초점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윌로우크릭교회의 빌 하이벨스 목사의 말입니다. 

「건강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나는 지금까지 균형 잡힌 교회라고 생각을 했다. 건강한 신앙생활이 어떤 신앙일까? 나는 지금까지 균형잡힌 신앙생활이 건강한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건강한 교회, 건강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촛점이 분명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교회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데 자신의 목적과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삶이 건강한 신앙생활이요 건강한 성도다.」

오늘 본문은 부흥하던 초대 사도행전 교회가 만난 도전과 고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고난을 당할 때 초대교회는 좌절하거나 낙심하기는 커녕 때묻지 않은 깨끗한 복음을 제시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위협 앞에 더욱 당당히 맞섰던 용감한 전도자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용감한 전도자」입니다. 우리교회는 「100일의 행복축제」를 선포하고 앞으로 100일동안 전도에 촛점을 맞추고 올가을을 보내고자 합니다. 


II. 착한 일에 시비와 핍박이? 

예루살렘 성전 동편 “아름다운 문” -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지체 부자유인이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이 사람은 누군가 메어다 거기 앉혀 놓으면 구걸로 연명하던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기도시간 성전에 들어가다가 이 사람을 만납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함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리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40년동안 걸어보지 못한 그가 벌떡 일어나 걷고 뜁니다. 모두가 놀랄 수 밖에요. 베드로에게 신통한 능력이 있는 줄 알고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뒤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주목합니다. 이쯤되면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마치 우리의 권능이나 우리의 경건으로 일을 한 것처럼 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느냐? 이 일은 오직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기회로 삼아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하나님께 가야될 영광을 가로채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자기 이름 높아지는데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얘야 할아버지가 6.25 인천 상륙작전때 괴뢰군 때려 잡은 얘기했냐?” 그러자 “할아버지 천번도 더 했는데요?” “할아버지 궁금한 점이 있어요.” “뭐가 궁금하니? 6.25때 있었던 전쟁 이야기는 뭐든지 물어봐라?”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그렇게 잘 싸우시고 괴뢰군을 많이 잡아 죽였는데 왜 그렇게 많은 국군과 미군이 필요했는지 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어요.” 하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직 예수님이 하셨다.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이 일은 너희가 죽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다. 그는 다시 살아나셨다. 그는 지금도 살아 계신다.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모든 이적과 기사들을 예수 이름에 연결하고 복음전도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죽은 다비다가 살아난 사건, 옥문이 열려진 사건, 또 다른 곳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 276명이 파선 위기에서 구원받은 사건 그들의 공통점 하나가 있습니다. 한결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복음으로 연결된 사건이었다 하는 것입니다. 

3장의 이 사건을 놓고 4장에서는 시비가 벌어집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이튿날까지 잡아 가둡니다. 그리고 너희가 무슨 권세로,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고 심문합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사건입니까? 

이 도시가 더러움으로 가득차고 오물과 쓰레기가 많이 있으니까 어떤 사람이 보다 못해 그것을 청소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몰려나와서 네가 뉘 이름으로 청소하느냐? 구청장한테 허락 받았어! 이게 말이 되는 말입니까? 

40년 동안이나 걷지 못하던 지체 부자유인을 고쳤다면 칭찬을 하고 답례를 할 일이지 왜 시비를 벌일까요? 착한 일을 했으면 당연히 격려를 받을 것 같은데 왜 이토록 말이 많은 겁니까? 

초대교회의 상징적인 이 기적사건을 이토록 싫어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본문 1절입니다.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이 앞다투어 나아와 하나님의 일을 반대하고 핍박합니다. 초대교회에 일어난 첫 번째 핍박은 로마 당국이나 외부 불신자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교회내부에서 왔다고 기록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고침을 받아 기뻐 뛰고 노래하고 있다면 내 자식, 내 가족이 아니라 할지라도 마땅히 함께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시비하고 핍박했을까요? 

본문 2절에 보면 지체 부자유인이 고침받았다는 사실보다 그를 고친 분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신 사건이라는 것이 싫었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고 선포하는 이 일이 그렇게도 싫었다는 겁니다. 자신들의 종교와 종파에 커다란 위협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거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모함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은 바로 종교지도자들이 한 짓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무덤에 누워 죽은채로 있어야 하는데 그분이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했습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병든자를 고칩니다. 지금 앉은뱅이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그 사실에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데 계속 외치고 다닙니다.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엄청난 기적을 행합니다.

이 일이 제사장 무리 그리고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개인들에겐 종파 생존에 위협이 되었던 겁니다. 제사장들은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믿는 유대교는 거지에게 동전 한푼 던져주는 종교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병든자를 고치고 구원하는 종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사도들이 증거하는 교회로 하나님의 권세가 옮겨지게 되는 것이지요. 기독교만이 살아있는 종교요 부활의 종교요 기적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진실은 사도들에게 있습니다. 모든 권위는 교회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만이, 교회만이, 사도들만이 인정을 받게 생겼습니다. 기독교가 역사 무대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종교사에 위대한 터닝포인트를 가져온 사건이 오늘 본문 유명한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교권주의자들을 불편하게 한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 

이 사건은 단순히 종교지도자들이 싫어하고 핍박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부흥을 싫어하는 마귀의 짓임을 보여줍니다. 마귀는 천사와는 달리 하나님 일의 협조자가 아니라 훼방자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그 이름이 훼방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잘 하는 사람을 마귀는 싫어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합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다. 지금도 살아 계시다고 전합니다. 그들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남자만 5천명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는 교회가 부흥되고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흥왕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리하여 본문 3절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절 

4절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 남자만 5천명이 교회로 몰려와 예수를 믿었습니다. 이 얼마나 극명한 대조입니까? 마귀는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마귀가 싫어하는게 당연하지요. 

옳습니다. 마귀는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복음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 백성 빼앗기는 일이기 때문에 싫어할 수밖에 없습니다. 능력있게 기도하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교회가 함께 힘써 기도할 때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할 때 싫어합니다. 우리가 용감하게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을 기뻐하고 마귀는 싫어합니다. 

언제나 교회의 흥왕은 마귀세력의 쇠퇴를 의미합니다. 크리스챤은 마귀에게 이쁘게 보일 생각은 처음부터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III. 다른 이름은 없다

이 사건이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던지 제사장 가문이 떼거지로 모여 사도들을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는 겁니다. 이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을 합니다.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는지 알고 싶으냐? 그러면 두 가지를 “알라”고 말합니다. 

첫째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너희들은 알라. 이 병자가 고침받은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아 너희 앞에 똑똑히 서 있느니라. 이것을 “알라”고 합니다. 

그냥 예수님의 이름 그러면 될 터인데 왜 그 앞에 나사렛이란 이름을 붙였을까요? 이 말은 신구약 성경에 꼭 두 번밖에 안나오는 단어인데 대단히 유명한 단어입니다. 

나사렛이란 갈릴리지방 한 촌락으로 무명의 마을을 의미합니다. 거기는 고적이나 명승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산물이나 유명인이 있는 곳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폄훼하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하찮게 여겼던 그 예수는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폄훼했던 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너희들이 모함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그 예수는 무덤 속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죽은 체로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은 살아나셨다. 지금도 살아 계신다. 역사를 운행하신다. 그분의 이름은 능력이다. 병자를 고친 능력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가 사는 이땅에 오신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것이 나사렛 예수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 이름이 왜 따라 나올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명하면 왜 귀신이 두려워 떨며 도망갈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든자에게 손을 앉으면 왜 병이 고쳐질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복음의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 그 이름에 모든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 이름은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구약이 약속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즉시 시행하리라”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바로 그 이름은 응답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살아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 이름은 공동체를 지키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교회의 머리가 되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교회의 권세를 보장하는 이름입니다. 

“너희는 알라” 두 번째 무엇을 알라고 말합니까? 

그 유명한 구절 사도행전 4:12을 알라는 겁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첫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병자가 나았다. 둘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구원받는다. 이 이름 외에는 구원의 이름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의 이름, 구원의 이름을 여럿 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 하나를 주셨습니다. 이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교회가 위기를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는 오직 예수의 이름을 크게 외쳐야 합니다. 그 이름을 붙들고 그 이름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 일을 두고 기독교를 너무 독선적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기독교 진리는 절대적이고 독선적입니다. 예수 이름 외에 다른 길로는 구원받는 길이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엔 양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이름에 구원 이것을 포기하라고 하면 우리는 깨끗이 순교하고 마는 겁니다. 이 이름에 능력이 있고 이 이름에 천국문을 여는 열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보자 구원자의 반열에 그 어떤 성인 심지어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으로도 아니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신구약 성경에 많은 말씀이 있지만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성경귀절 중 하나입니다. 

어릴 때 외웠던 이 말씀이 내 신앙이 흔들거릴 때마다, 내 믿음이 위태위태해 질 때마다 이 말씀은 내 믿음을 확실히 붙들어 주었던 약속의 말씀이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읽으면 내 마음에 불이 붙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이 교회가 너무나 자랑스러워집니다. 짤막한 이 한 말씀이 우리에게 능력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이름의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IV. 용감한 전도자들

예수 이름의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알게 된 제사장무리들은 “도무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행4:18) 합니다. 

이에 대해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이어지는 20절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지난 2000년동안 교회의 케리그마 즉 복음의 진수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이 용감한 전도자들은 때로 집에서 사회에서 쫓겨나도 오직 예수의 복음 이것만은 붙들고 쫓겨났습니다.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을 잃어도 오직 예수, 이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매를 맞고 죽임을 당해도, 사자들이 그들을 찢고, 타오르는 불이 그들의 몸을 태워도 이 복음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하찮게 여겼던 예수는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은 죽은자로 무덤 가운데 계신 분이 아니라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 지금도 살아 계신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역사를 운행하다가 천군천사들과 함께 이 세상을 심판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분의 이름은 능력의 이름이요 치유의 이름이요 구원의 이름이다. 온 우주가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이름 오직 한 이름 예수 이름밖에 없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들은 고통받는 것을, 고난받는 것을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고통 없으면 면류관도 없고 얻는 것도 없습니다. 

청소년교회 전도사님이 설교 제목을 “No pains, No gains.” 그랬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꼬봉들이 주먹대장한테 가서 “형님, 이건 무슨 말입니까? 패인도 되지 말고 게이도 되지 말라네.” 그러더랍니다. 

No cross, No crown. - 십자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습니다. 

설교를 잘하기로 소문난 크리소스톰이란 교부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로마 황제로가 불러 “네가 예수를 믿어도 좋지만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란 얘기는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때 크리소스톰은 “그 얘기를 하지 않으면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고 말합니다. “네가 기어이 내 명령을 거절한다면 너는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자 “나는 감옥에 백번을 들어가더라도 이 복음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크리소스톰은 독방에 갇히게 됩니다. 황제 신하들이 황제를 찾아갑니다. “큰일났습니다. 크리소스톰이 얼마나 기다렸던 일입니까? 혼자서 독방에 넣어놨으니 마음껏 기도하게 될 것이고 마음껏 성경을 읽고 연구하게 될 것인데 그가 얼마나 좋아하는 일을 우리가 했습니까?” “그러면 흉악범들 속에 들여보내라.” “그러면 더 큰일이 납니다. 흉악범들이 모조리 예수를 믿고 감옥이 교회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예 목을 짤라 죽여버려라.” 

“그러면 더 큰일이 나지요.” “크리소스톰 지도자 한 사람이 순교를 당하면 온시민들이 모두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순교는 저들의 영광입니다. 왜 저들에게 영광을 주는 것입니까?” “그러면 어쩌자는 것이냐?” “길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돈 보따리를 안겨주면 교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락하게 됩니다. 아주 자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방종하게 될 것입니다. 돈 보따리를 줘서 내 보내면 됩니다.” 큰 돈 보따리를 안겨 크리소스톰을 감옥에서 내보냅니다. 나오자마자 교회에 들러 몽땅 헌금하고 맨손으로 전도자로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초대교회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루살렘 제사장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저 사도들의 외침을 잃어버렸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용기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약화시킨 죄인들입니다. 교회의 권세를 유약하게 만든 죄인들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세상 권세 있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의롭게 살 용기가 없습니다. 돈이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멋있게 사는 멋을 잃었습니다. 지식있는 그리스도인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소심해졌습니다. 목숨을 지키는 지혜는 있지만 버리는 결단은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결같이 예수 날 위해 죽으셨는데 나 예수 위해 죽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더냐? 예수를 위해 복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순교를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너희들이 예수를 죽였지만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다! 너희들이 나를 죽일 수 있지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시 살아난다. 그리하여 저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능히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초대교회 이방인들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부활신앙! 그것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이 초대교회 부활신앙앞에 어둠이 동터오는 아침 햇살을 막을 수 없듯이 초대교회가 솟아오르는 전세계로 번져 가는 이 영광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겨울이 봄이 오는 소식을 막을 수 없었듯이 역사의 무대에 예수 이름의 능력이 전해지는 이 영광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 예수의 나라 이 땅에 밝아오는 교회시대를 사탄이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이 고난을 당하는 시대,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는 순수한 복음, 복음의 순수를 붙들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이름 능력 붙들고 그 권세 믿고 그 권세의 터전 위에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위 그리스도인들이 당신을 실망시키면 시킬수록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십시다. 삶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몸과 마음, 삶이 아프면 아플수록 오직 예수 이름의 능력을 믿으십시다. 주께서 당신을 고치십니다.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유일한 치료의 이름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당신이 가진 믿음이 약해져가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 이름의 권세를 붙드십시오. 삶의 환경이 흔들리십니까? 삶의 터전이 흔들거리면 흔들거릴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이 고난을 당하는 시대일수록 복음의 순수를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만이 천하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습니다. 이 말씀 붙들고 힘을 얻으시고 이 말씀 붙들고 세상을 헤쳐나가시고 담대히 세상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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