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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존을 넘어선 성숙 (엡 4: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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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넘어선 성숙 (엡 4:7-16)


우리는 날마다 먹고 땀 흘려 일하고 잠을 잡니다. 왜 그럴까요? 생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존만 하는 인생이고, 또 하나는 기여하는 인생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만 하다가 인생의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이 세상이 보다 나은 세상이 되도록 기여하는 삶의 발자취를 남기고 가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는 이런 이들을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에 의해서 인류는 문화와 정신, 예술의 꽃을 피우고 과학과 환경을 발전시켜 보다 나은 삶의 공간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과 의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요? 그것을 성경적인 단어로는 ‘성숙’이라고 일컫습니다. 오직 성숙하는 사람만이 역사에 기여하고 사회에 기여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됨의 의미는 단순한 생존이 아닌 성숙입니다. 생존을 넘어선 성숙입니다. 성숙에 의해서 우리는 단순히 ‘존재하는 인간’이 아닌 ‘생성하는 인간/창조하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being’이 아닌 ‘becoming’이 되는 것입니다. 그냥 하루 하루 존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도 먹어야 살고 마셔야 살고 입어야 삽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고민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계속되는 마태6:32-33을 기억하시지요.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여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영적 성숙을 이루어 기여하는 인생을 살수 있을까요?

1. 자신의 은사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은사를 희랍어에서는 카리스마(karisma)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어근은 카라(kara)로서 ‘기쁨’이란 뜻을 갖습니다. 은사를 세상에서는 재능이라고 말합니다. 은사 혹은 재능에 맞는 일을 하면 누구나 신바람이 나고 즐겁습니다. 은사는 아주 쉽게 표현하면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두 가지가 다 만족되어야 은사라고 할만 합니다. 저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문제는 내가 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악은 제 은사가 아닙니다. 저는 사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음악 때문에 제 평균 성적이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로 헌신하고자 할 때 저를 머뭇거리게 만든 것도 음악의 은사가 없는 고민이었습니다. 풍금도 없는 개척교회에서 봉사하던 시절 저의 고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첫 음을 제가 잡아야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은사에 맞는 일,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면서 저는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은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기여해야 한다는 멈출 수 없는 열정이 저를 목양의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본문 첫 구절 7절을 읽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이 은혜의 선물이 바로 은사입니다.

8-10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승리자로 이 땅 만물 가운데 주의 뜻을 충만하게 이루어 가시기 위해 당신의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11절은 구체적인 몇 가지 지도자들에게 주신 은사들을 열거합니다. 

11절을 읽어 볼까요?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어떤 사람은 사도의 은사를 받아 교회가 개척되지 못한 지역으로 보내심을 받아 교회를 세우는 특별한 부르심을 받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선교사와 같은 은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지자의 은사를 받아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으로 주의 백성들을 경책하는 은사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하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이미 믿은 주의 백성들을 잘 가르치고 양육하여 세우는 목사나 교사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무수한 은사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은사를 알고 자기가 잘 할 수 일로 기여할 때 자신도 삶의 의미를 경험하고 또한 세상도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2. 자신을 넘어 서로를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은사를 사용한다고 말할 때 가장 유의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은사 사용이 자기만족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사역의 궁극적인 대상은 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리는 일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내 은사를 발휘하여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상처 낸다면 그는 기독교 사역의 목표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전문성이상으로 영적 성숙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은 바로 이런 기독교 사역의 본질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희랍어에 ‘katartismos’인데 이 단어는 본래 의학적인 술어로 “뼈를 맞추어 제자리에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을 잘 회복시켜 그로 하여금 참된 봉사자의 자리에 서게 하는 일이 사역의 본질입니다. 

기독교 사역은 숫자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곁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나의 은사, 내가 할수 있는 일로 섬겨 그의 영적인 회복을 돕는 것이 사역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사역의 이름으로 이웃을 상처내고 있다면 영적 성숙이 이루어지기 까지 차라리 사역을 유보하는 것이 낫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는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 회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가 그들을 섬기는 천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고 장영희 교수의 유작중에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1장의 제목이 ‘당신은 나의 천사’입니다. 이 장에서 장 교수는 미국의 대표적인 여류작가 앤 타일러의 소설 를 소개합니다. 

주인공 바너비는 명문가 출신이면서도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 심부름센터 직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의 삶이 곤고해지고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한 어느 날 그는 자기 가문의 전통 하나를 떠 올리게 됩니다. 그의 가문은 자기 인생에 자기가 만난 천사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습관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며 막연히 자기도 천사를 만나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그는 이 소원을 품게 되면서 기적처럼 기차역에서 소피아라는 여섯 살 연상의 은행 여직원을 만나게 됩니다. 마침내 그녀가 그의 인생의 천사가 되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장영희 교수가 뜻밖에 이 소설의 작가를 만나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재미삼아 당신은 천사를 만나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냥 소설속의 이야기라고 웃어넘길 것을 기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가 타일러는 뜻밖에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물론이지요. 이제껏 살아오면서 저는 수많은 천사를 만났습니다. 오늘 만난 당신도 나의 천사가 될 수 있고, 나 역시 당신의 천사가 될 수 있지요.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천사가 될 수 있어요” 

장 교수는 그 말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 사역의 본질은 나 자신을 넘어 서로가 서로에게 천사가 되어주는 일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성숙한 자로 이 세상에 기여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3. 자신을 넘어 공동체를 세울 줄 알아야 합니다.

12절의 우리가 우리 이웃들을 온전하게 하는 섬김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입니다. ‘세운다’는 말은 영어로는 빌딩(building)입니다. 세우는 것 곧 빌딩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허는 것’ 곧 파괴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세워질 때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공동체내에서 섬김을 수행할 때 끊임없이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섬김으로 우리 공동체가 좀 더 든든하게 좀 더 아름답게 세워져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일을 빙자한 섬기는 방식의 무례로 인하여 공동체가 흔들리는 몸살을 앓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제발 공동체를 헐거나 흔드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본래 흔드는 일은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눅22:31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요구하였으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단의 하수인이 되어 공동체를 허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공동체에 기여함을 어떻게 기대 할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공동체의 세움을 위해 나 혼자만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킹의 지혜 곧 팀 워크의 기술을 또한 익혀야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의 교훈이 그것입니다. 

16절입니다.“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바울 사도는 다시 이런 네트워킹의 아름다운 연합을 위해 다시 한번 성숙의 중요성을 선행 구절에서 강조합니다. 

15절입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바울은 여기 이런 성숙을 위해 사랑과 ‘참된 행함’(진리의 행함)의 균형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공동체의 지체들을 사랑으로 세워야 하지만 때로는 진리에 입각한 책망을 통해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르게 세워갈 때 진정한 성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14절이 경고한 어린 아이의 오류와 유치함을 벗어나는 성숙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들려드린 경북 경산 이영주 님의 에세이 이야기를 다시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 주부였던 이 자매는 길에서 여고 동창생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고교 담임이었고 수학 선생님이었던 분의 부음을 듣습니다. 그녀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분(지주 꾸중을 듣고, 벌을 받은 기억 때문)이어서 그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별 감정 없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구가 "영주야 그 선생님이 담임 시절 교탁에 반 학생들 사진을 유리아래 항상 두고 있었는데 그 중 몇 학생의 얼굴에 동그라미 표가 있었는데 너와 내 얼굴에 동그라미가 있었던 것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뻔하지 너와 내가 찍혔던 것이겠지”하고 말을 맺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주부가 그후 몇 날이 지나간 어느 날 집안 정리를 하다가 여고 시절 고교 잡지 한권을 발견합니다. 거기에는 바로 그 담임 수학 선생님이 기고한 글이 있었는데 그 글의 제목이 이었다고 합니다.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수학의 모든 기호 중에 동그라미를 가장 좋아합니다. 이 원만하고 모가 없는 둥금은 나의 학생들에게 내가 기대하는 인격의 목표입니다. 나는 나의 학생들이 공부만 잘 하고 수학 문제만 잘 푸는 학생으로 교정을 떠나기를 원치 않습니다. 나는 그들이 동그라미처럼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 사회에 나아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거기까지 글을 읽어 내려가던 그녀는 자리에 무너져 대성통곡으로 이런 결단을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랬군요 그래서 저를 꾸중하시고 저를 책망하신 선생님, 그 마음을 이제 알겠습니다. 저 이제부터라도 동그라미 인생, 동그라미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 기여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드려야 할 우리의 고백이 있습니다-“예수님 닮은 성숙한 제자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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