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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로우신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시 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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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우신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시 99:4)


(시 99:4)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

흑인 대법관이었던 마샬(Thurood Marshall) 씨는 미국 젊은이들에게 좋은 본이 되었다 합니다. 그가 태어난 1908년은 89명의 흑인이 매맞아 죽은 해였다. 1930년 그는 법대에 입학하려 했는데 메릴랜드 대학에서 그의 입학을 거부했다합니다. 그가 흑인의 인권 운동을 폈던 1940년대만 해도 그는 거의 날마다 암살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합니다. 그의 고조 할아버지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왔고 그의 아버지는 볼티모어 어느 여관의 말단 직원이었다합니다. 

이런 환경에서도 그가 미국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대법원의 대법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한 인물의 완성은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본인의 의지와 결단과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합니다. 마샬 판사는 최근 미국 역사에 빛나는 큰 별로서 중요한 교훈 두 가지를 입증한 사람이라 합니다. 첫째, 미국은 모든 변화를 법에 의해 가능케 할 수 있는 나라임을 입증하였다합니다. 둘째,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입증했다합니다. 마샬 씨는 변호사 시절, 많은 인권 문제, 유색인종 차별 문제, 억압받는 소수 민족의 문제를 맡아 99% 불가능하다는 사건들을 진실과 정의로써 승리로 이끌었다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사와 그가 만드신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시 97:1-2)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공의와 정의가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하나님은 '의'자체이십니다

(느 9:8)...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의'(체다카' 혹은 '체데크')는 표준, 방정(方正), 정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그 '의'를 소유한 자의 '본질적 의'이며, 또한 그 '의'를 소유한 자의 '행동적 의'입니다.
따라서 본질적인 면에서는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의미하며, 행동적인 의는 하나님이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의롭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피조된 세계의 통치주임을 의미하는 '주재적의'와 심판주임을 의미하는 '분배적의'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주재적 의'는 그 명칭이 뜻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피조된 세계의 통치자로서 선악 간의 모든 판단을 공정하게 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판단에 있어서 차별이나 불의하게 판단하시지 않고 신적인 속성에 따라 모든 것을 공평하게 결정하십니다.

(시7:11)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라는 표현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볼 때 때로는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의혹을 지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어찌 정의를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 8:3)라고 증거합니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절 노나라에 복부제라는 분이 있었다 합니다. 복부제가 선부라는 마을의 원님으로 있을 때 이웃 제나라의 군사들이 쳐들어왔습니다. 복부제는 즉시 성문을 닫으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때마침 추수기여서 성문 밖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 있었습니다. 곡식을 아깝게 생각한 백성들은 원님을 찾아가서 "곡식을 적병들에게 넘겨줄 바에야 적이 도착하기 전에 모두 나가서 아무 밭에서나 자기 힘대로 걷어 가게 하는 것이 좋겠소."라고 했습니다. 복부제는 그들의 청을 뿌리치고 성문을 닫게 했습니다. 복부제를 존경하던 백성들은 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복부제는 적을 이롭게 했다는 죄목으로 왕의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복부제는 "일년 지은 곡식을 적병들에게 빼앗긴 것은 아깝기 짝이 없는 일이오나 급하고 손쉽다고 해서 남의 곡식을 마구 베어다 먹는 버릇이 생기면 그것은 10년이 가도 고칠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했다합니다. 복부제의 말을 들은 왕은 멀리 내다볼 줄 아는 그의 식견에 탄복했다 합니다. 

죄의 버릇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까짓 정도야 하는 소홀한 마음이 결국 큰 일을 저지르는 결과가 됩니다. 한 작은 돌을 빼내어 큰 담이 무너지듯 작은 법을 지키지 않아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판단하시고 집행하심에 있어서 언제든지 공정하게 하십니다.

한 순간을 살다 가는 인간의 좁은 지식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의가 왜곡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계신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써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다스리십니다. 이 의가 주재적 의입니다

'분배적 의'는 하나님이 현세에 있어서나 최후 심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영생 또는 영벌로 결정하실 때 매우 공정하게 심판하시어 상선 벌악의 의를 나타내심을 의미합니다.

(롬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 '분배적 의'에 대한 설명은 성경 마25:31-46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때에 하나님께 합당한 자들을 오른편에 앉히시고 하나님께 합당치 아니한 자들을 왼편에 앉히실 것으로 양과 염소의 비유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른편에 앉게 될 의인들의 특징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 때에 하나님을 대하듯이 진실과 성실로 했다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배고픈 자들에게 빵을,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병든 자에게는 위로와 간호를, 나그네에게는 환대를 베푼 것입니다. 악인들의 특성은 의인들의 특성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즉 악인들은 이 세상에서 주리고 목마르고 병들고 나그네 된 자들, 곧 억눌리고 고통을 받는 자들을 돌아보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들을 돌아보지 아니함으로 사실상 하나님을 멸시하였기에 악인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마지막 날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앉은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세상에서 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도와 주었으니 내 상을 받아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한 임금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설명을 들은 후 그들은 임금의 판단이 옳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판단은 그의 '의'에 기초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심판하시며, 그들의 행위에 따라 상과 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능력있는 왕은 정의(Justice)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just)와 공의(right)를 행하시나이다(4절)라고 합니다.
정의가 바로 힘이라는 귀한 사상을 암시합니다.
주권은 힘을 그 제일되는 요소로 찾지 않고 공의를 그  기초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 비록 불가사의한 것까지도 지나고 보면 공의롭고 공평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잘 증명해 줍니다.
"공과 의"란  말은,  공정한 판단과 공의를 가리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의는 그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사 속죄 제물이 되게 하시므로 이루어졌습니다.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 방법은 공평과 정의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통치자 되신 하나님은 공의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나 소유, 능력을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우리의 본질과 인격, 마음에 숨겨진 태도를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요 절대 권력자이시지만, 그의 권력은 정의를 기뻐하며 그의 힘은 올바른 목적에만 사용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해 계속 비판을 가하고, 그의 행동이 올바른지 그른지 따지는 데 열을 올립니다.
그러나 옛날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이 항상 올바르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일일이 따지는 대신,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복종하였습니다.

역사상에 있었던 수많은 개혁과 혁명과 개조 앞에는 반드시 불의에 대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노예들의 불행을 보고 윌리엄 개리슨 (William L. Garrison)이 "노예의 슬픈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을 그늘지게 한다!"라고 외치며 화를 폭발시킨 것은 노예 해방 운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참한 영국의 감옥을 보고 존 하워드(John Howard)가 화를 낸 것은 감옥 제도 개혁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플로랜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하면 백의의 천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둘도 없는 고집통에다 몹시 성미가 급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환자에 대한 잘못된 처리에 분개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개혁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링컨은, 한 흑인 여자가 남편과 아이와 헤어져 팔려가면서 울부짖는 소리를 "이것은 잘못되었다!"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의 분개는 노예 해방이라는 참으로 위대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저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들 가운데 의를 증진시키시고 정의를 이루실 것으로 확신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는 악한 사람들이나 부정을 일삼는 사람들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반드시 돌아보실 것이기에 하나님의 공의는 영원히 세워질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가운데 일부분만을 보지말고 우리의 삶 전체를 바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공평의 법정뿐 아니라 공평 그 자체를 세우십니다.
또한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가끔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좌처럼 영원토록 든든히 세우십니다.
주님은 자비를 위하여 도덕적 통치의 공평성을 해치거나 무너뜨리지 않으십니다. 섭리와 은혜로 주님은 정의의 순수성을 세심하게 보존하십니다.

어떤 랍비의 아내가 하녀와 심한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귀한 그릇이 하나 깨졌는데 랍비의 아내는 하녀에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워 손해를 변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녀는 자기가 깨지 않았기 때문에 변상을 할 수 없노라고 맞서자 랍비의 아내는 소송을 걸었습니다. 재판 날이 되어 랍비의 아내가 법정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던 랍비도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왜 옷을 갈아입느냐고 아내가 묻자, 랍비는 자기도 함께 가려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내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런 일에 적합하지 않아요. 재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구요" 그러자 랍비가 아내에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당신은 잘 알 것이오. 하지만 내가 변호를 해 주려고 하는 불쌍한 과부인 하녀는 재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오. 나밖에 그녀를 위해 변호를 해 줄 사람이 또 어디 있겠소?"

하나님 나라에서는 정의가 단순히 세워질 뿐 아니라 온전히 실행됩니다. 법은 성실히 집행되며, 집행자는 입법자와 마찬가지로 의롭습니다.
  
모 회사의 젊은 생산과장 한 분이  근래에 와서 자기 회사제품이 규격 미달인데도 불구하고 계속 선전하며 판매되고 있는 것이 양심에 걸렸다 합니다. 신앙적인 견지에서 도저히 그대로 묵인하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업도 신앙적으로 일치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고민하던 끝에 그가 존경하는 분을 찾아 상담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규격 미달품을 완전한 물건이라고 계속 선전하며 판매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 운영자에게 그 사실을 진언하면 분명히 자기는 파면되고 말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순종하겠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며칠 후, 그는 용기를 내어서 회사 지배인에게 더 이상 그 상품을 제조 판매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신앙 양심에 위배되기 때문에 시정되지 않는 한 자기는 더 이상 생산과장 직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파멸될 줄 알고 며칠동안 출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놀랍게도 그 상품의 생산을 중단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양심적인 결단력이 회사 중역들에게 인정되어 파면대신 도리어 칭찬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은 반드시 항상 좋은 결과만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결과는 반드시 신앙인에게 현실적으로 유리하게만 된다는 보증은 없습니다. 알지 못할 미래이기에 신앙인은 앞날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발휘하게 됩니다. 

현대는 기독교 신앙을 실생활에 실천해 나가는 사람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는 시대이다. 앞날을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힘있게 의를 실천해 나가야 할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이태리계 이민인 프랭크 세르피코(Frank Serpico)는 많은 고생을 하며 자랐다합니다. 그러면서도 카톨릭 교회에서 굳은 믿음을 배우며 자라나 경찰관이 되었습니다.1960년대 말, 그는 뉴욕 경찰계에 대단한 화제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뉴욕 경찰의 부패는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식당이나 술집에서 먹고 마시고는 돈을 내지 않는 것을 당연한 혜택으로 여겼고 도박단, 마약 밀매업자들과도 결탁되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세르피코는 혼자 싸웠습니다. 동료 경찰의 불의를 충고하고 상사와 서장에게까지 탄원하였습니다. 그는 위협을 받았고 경관의 자리까지 위태로워졌습니다. 

1971년 2월 3일, 결국 그는 괴한의 총에 맞고 상반신이 마비되어 평생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뉴욕 타임즈>에 경찰의 부패를 공개 탄원하여 신문사가 전폭적으로 이 문제를 세상에 알림으로써 많은 부정 부패 공무원들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르피코는 뉴욕 최고의 영예 훈장을 받습니다(이 실화는 "Serpic"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습니다). 이 용기의 주인공은 거듭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니 두려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도 의로우신 하나님이 세상을 살피시며 의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지시지 않고 세상의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단지 심판이 잠시 지체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와 사랑으로 다스리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찬송하며 겸손하게 주님을 경배하며 말씀을 순종하며 성찬에 참여 하며 떡과 잔을 받고 사명 감다하며 영광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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