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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안에서 인간관계 거듭나기 (엡 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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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6:5-9


한국 교회 초기에 감동적인 전도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경동제일교회에 엄영수라는 분이 계셨는데, 영수라는 직책은 오늘날 장로에 해당되는 직책으로 예배당도 짓고 관리도 하며 교회를 위해 일생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직업은 왕손을 모시는 마부였습니다. 하루는 왕손을 모시고 지방으로 여행을 가는데 가는 길에 "나으리, 예수 믿으시죠." 하고 전도를 하였습니다. 왕손인 그 분이 물었습니다. "아니, 네가 예수를 믿느냐?" "예 그렇사옵니다. 한 3년 되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마음이 너무 기쁩니다." 그 말은 들은 왕손이 마부에게 빈정거리며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너 같은 상놈이 양반이라도 된다더냐?" 그 때 엄영수가 대답했습니다. "나으리, 예수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양반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마부 노릇을 잘하기 위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이 왕손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열려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예수님을 믿고는 자기에게 전도한 마부, 염영수에게 “형님”이라 불렀다고 하고 훗날 승동교회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만 거듭날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가 거듭납니다. 가까이는 부부 관계부터 부모 자녀 관계가 거듭나고 학교 직장 등 모든 인간관계가 거듭납니다. 
이 거듭나는 인간관계의 핵심은 순종과 사랑입니다. 윗 사람에게는 순종하고 아fot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순종과 사랑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주신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복하고 잘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심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 아내를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에게 순종하고 학생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회사에 가면 상사에게 순종하고 부하직원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잘 사는 길입니다.
 
본문은 순종과 사랑의 원칙을 상전과 종의 관계에서도 적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들은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 상전들도 종들에게 “위협을 그치라”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 로마에는 엄청난 수의 노예들이 있었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 중에 노예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주인, 노예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 생겼는데, 이로 인한 혼란도 많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까지도 주인과 종이 있었습니다. 아마 인간관계 중에 가장 어려운 관계가 주인과 종의 관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주인과 종의 관계도 순종과 사랑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 교훈을 다 압니다. 윗 사람에게 순종하고 아랫 사람을 사랑하라, 어려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살지 못하니 문제인 것입니다. 
위의 권위에 대하여는 거역하고 무시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나약한 자로 조롱을 받습니다. 아랫 사람을 사랑하기 보다 이용하고 억누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점에서 우리가 정신차려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배워서 아는 것을 왜 실천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단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이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한 것처럼, 우리의 인간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사단이 순종해야 할 사람에게 불순종하게 만들고, 사랑해야 할 사람을 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바꾸어 놓으면 그 다음에는 내버려두어도 사람들의 삶은 지옥과 같게 되기 때문입니다.

김하중 장로의 간증 중에 자신이 우리나라의 지도층 인사들을 많이 만나 보았지만 대부분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좋은 차를 계속 탈지, 비서 있는 사무실을 계속 쓸지, 공금으로 좋은 음식을 계속 먹을지, 돈을 가질 수 있을지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할 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고, 마음이 강팍하고 교만해서 함부로 아랫 사람들을 대하고 욕하고 비판하며, 인적 네트워크만 생각하고 누구에게 잘 보여야 지위를 가질 수 있을까. 돈을 벌 수 있을까 사람 눈치를 보고 하라는 대로 하고 만날 학교 타령만 한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지만 진정 나라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남에 대해서는 눈곱 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고 우리 마음입니다. 이러니 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순종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순종과 사랑에 대하여 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본성으로는 가르치고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거듭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거듭난 자입니까? 십자가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자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종들에게 그저 주인에게 순종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5-8절 종들아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한 마디로 예수님을 믿었다면 상전을 대할 때,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계시니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상전들에게도 그저 종들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9절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니 아무리 종이라도 함부로 말하거나 때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예수님의 종임을 명심하고 자신이 하는대로 예수님도 자신에게 행하는 것을 명심하고 종들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만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초대교회 안에 일어났습니다. 빌레몬서를 읽어보면 주인에게서 도망쳤던 종 오네시모와 주인이었던 빌레몬이 예수님 안에서 형제가 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남을 보게 됩니다. 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교회였고, 그 때문에 초대 교회는 강한 교회였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들어와서 예수님께서 지금도 함께 하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가 거듭나는 것은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을 정말 믿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사함을 받았다가고 기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의 속죄함을 감사하면서도 여전히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무너집니다. 가정에서 무너지고 교회에서 무너집니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싸우는 곳으로 아는 것입니다. 실제로 싸우고 예배하고 예배 마치면 또 싸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까? 속죄의 복음을 몰라서 그렇습니까? 잘 압니다.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게 귀한 믿음을 가진 자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속죄함의 은혜를 받지 못하여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마음에 오신 예수님을 실제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사람은 반드시 죄를 떠나게 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요일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 안에서 오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고후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우리가 정말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면 죄지을 수 없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계 2차대전 때,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미국 시민으로 귀화하지 않은 채 미국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한 일본인이 미국에 이민을 와서 샌프란시스코 교외에서 장미 농장을 하여 상당히 성공했었는데, 그만 수용소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의 가슴은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이때 이웃 크리스챤들이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이 가 있는 동안 내가 농장을 잘 돌봐 주겠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은 겉으로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하면서도 속으로는 ‘정말 도와줄까?’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기독교인 이웃들이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를 믿을 수 없다면 나의 하나님을 믿으세요.” 그러나 그동안 몇 번이고 전도했었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던 이 일본 사람은 ‘우리를 믿지 못하겠거든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게 되었고, 이 일본 사람이 2년 만에 그리운 집과 농장으로 돌아오던 날 샌프란시스코 역에 이웃 사람들이 “Welcome back home!”이라고 쓴 큰 플랭카드를 들고 역으로 환영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 보니 농장은 자신이 가꿀 때보다 더 아름답고 깨끗하게 잘 관리되었고 아름다운 장미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엌에 들어갔더니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과자통 카드가 있었습니다. 농장에서 나온 수익금을 저금해 놓은 통장이었고 카드에는 딱 두 줄이 쓰여 있었습니다. “God loves you!(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You could start again(당신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다 행하셨음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성도들 안에 계시며 역사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우리가 성령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사는 지 알 수 있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  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한 여자 교수 어머니가 6.25 사변으로 혼자된 후 떡 장사를 해서 자식을 공부시켰습니다. 이 분이 어머니 뒷바라지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서 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어머니 생신 때 어머니에게 묻습니다.󰡒어머니, 어머니는 소원이 뭐에요?󰡓그때 어머니가 “네가 교회에 다니면 소원이 없겠다.󰡓󰡒알았어요. 제가 어머니 다니는 교회에 나갈께요.󰡓딸이 교회에 나오니 온 교인이 박수치면서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다 보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 교회였습니다. 

한번은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교회 두 번 다시 안온다.’ 결심하고 어머니를 강제로 끌다시피 해서 집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딸에게 물었습니다."얘야, 오늘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딸은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면서 두 번 다시 교회에 안가기로 작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눈을 지그시 감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이날 평생 교회에 다녔어도 하나님 한분 좋아서 다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하나도 듣지 못했는데, 너는 어쩌다가 그렇게 교회에 와서 불평하는 소리만 들었니?"

이 말에 이 교수님이 충격을 받았습니다."감사하면서 살기도 인생이 부족한데 너는 어찌해서 불평할 것만 봤니." 자기는 대학원도 나오고 박사가 되었기에 속 깊고 생각있는 인생으로 자부해왔는데 어머니의 말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속좁은 사람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이 그렇게 넓고 깊은 줄은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위대한지. 박사라고, 대학 교수라고 목에 힘 주었는데 자신이 너무 그렇게 왜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 우리 어머님이 수십년 교회 다닌 것이 헛것이 아니었구나! 그 넓은 마음, 그 깊은 생각, 우리 아버지 전사하고 그 많은 세월동안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수십 년 청상과부로 나를 길러 주셨거늘 내가 어찌 몰랐던고󰡑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교회 어느 중요한 회의가 열렸는데, 초청받은 사람은 여섯 사람인데 일곱 사람이 왔습니다. 누군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참석한 것입니다. 목사님도 누가 초청받지 않은 사람인지 헷갈려서 "초청받지 않은 사람은 돌아가 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일어나 자신이 잘못 알았다며 회의 장소를 나갔습니다. 그래서 회의는 시작되었지만 이해가 가지 않은 점은 그 사람은 누가 보아도 이 모임에 반드시 참석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회의가 끝난 후 사람들이 목사님에게 왜 그 분을 초청하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사실은 그 장로님은 분명히 초청받아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누군가 초청받지 못하고 참석한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할까 봐 장로님이 스스로 자리를 뜬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삶을 살면 삶이 기가 막힙니다. 

구원받은 자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짐이 고통이 됩니다. 내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짐이 더 큰 고통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때문입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몇 년 전 어느 연합 집회 때, 제가 설교한 다음 강단에 올라가신 목사님이 저에 대하여 너무 심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감리교 목사는 다 그렇습니까?“ 순간 몹시 화가 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저 개인의 문제만 아니었습니다. 다른 감리교 목사도 신학생들도 많았습니다. 분명히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조심하라. 만약 제가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항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집회를 영적으로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올무임을 알았습니다. 그때서야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실언이다.' ‘나도 설교 중에 실언할 때가 있지 않았는가?’ 설교 후에 그 분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 분이 저를 보면서 “목사님, 제 말, 농담이었습니다. 이해해 주시죠?” 하며 사과를 하셨습니다. 큰 시험이 될 일이 이렇게 지나갔습니다.

여러분, 마음 안에 오신 예수님을 항상 바라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순종과 사랑으로 사람 관계가 변화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실제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성찬을 통하여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복된 은혜가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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