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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보답 (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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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보답 (빌 2:1-4)


플라톤은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함께 고대 그리스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유명한 책 <<국가>>는 <트라시마코스>라는 사람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트라시마코스는 무슨 주장을 했을까요? 그는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정의란 강자의 도구인데, 강자가 자기 힘으로 이익을 얻고, 그것을 정의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정의는 약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아무리 강자가 이득을 얻었다 해도 이성의 지배가 무너져 그 영혼이 욕구에 휩싸인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비록 억압 속에 힘들게 사는 약자라 할지라도 냉철한 이성으로 욕구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보면 플라톤은 약자들을 위로하고, 약자들도 존귀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들의 편에서 말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플라톤이 약자들의 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국가>>란 책은 독재 정권들의 모델이었습니다. 플라톤은 그 책에서 스파르타를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예로 들고 있는데, 스파르타는 결코 약자들의 낙원이 아니었습니다. 소위 <스파르타식>이란 말이 암시하는 것처럼 잔인하고 혹독했습니다. 스파르타에서 약자는 죽어야 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그려지는 국가의 모습은 히틀러나 김일성이 꿈꾸던 나라입니다. <포퍼, K.Popper:1902~1994>라는 학자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의 <<국가>>를 독재사회의 원조라고 비난하였습니다. 

플라톤의 책에서 그려지는 나라만 약자에게 혹독한 것은 아닙니다. 고대 국가들은 모두 폭력적이고 잔인했습니다. 왕들은 통치자였을 뿐, 백성의 보호자는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은 살아남기가 힘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 제국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사람들에게 생소했습니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세상에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남을 밟고 올라서야 성공하는 세상에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너무 생소했기 때문에 거부감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생소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처음 들어보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복음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던 무렵, 우리나라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오랫동안 중국 청나라를 상국으로 받들며 살아왔지만, 청나라는 우리를 억압했을 뿐이지.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일본이나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호시탐탐 우리를 먹으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사람들은 난생 처음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이야기였습니다. 눈이 파랗고 코가 큰 선교사들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여러분의 주인이시며, 예수님은 여러분의 구원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고 위대한 존재인데, 그 높고 위대한 분이 자신들처럼 하찮은 자를 사랑하시고, 게다가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 죽기까지 했다는 말은 정말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그 때까지 조선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임금이었습니다. 그 다음이 임금의 아들인 세자였습니다. 그들 중 백성을 위해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백성들의 마음에 사랑을 전해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임금은 백성의 세금을 걷어가고, 양반 사대부들과 한 통속이 되어 양반이 못되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임금이 행차하면 백성들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땅에 엎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임금 보다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해준 것입니다. 더구나 그 아드님은 자신들을 위해 죽기까지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정말 입이 딱 벌어지는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후 그 어디에도 마음 붙일 수 없었던 불쌍한 백성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구한말, 특히 우리가 일본에게 강제 합병될 무렵 교회는 엄청나게 부흥했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품에서 사랑과 위로를 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소망을 찾았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와 사랑과 소망을 얻은 사람들은 비단 조선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이미 성경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물이 움직이길 기다리고 있던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에게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는 물이 움직이면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서 병을 고치길 원했지만, 아무도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북적이는 연못가에서 그는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셨고,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연못에 넣어준 것이 아니라, 직접 고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치유의 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랑과 능력의 말씀은 이 병자가 그 누구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었습니다. 

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도 예수님에게서 처음 사랑을 느꼈습니다. 여인은 많은 돈을 탕진했고, 병만 깊어졌고, 가족과 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예수님은 그녀를 쫓으신 것이 아니라, 치유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런 말씀은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듣는 사랑의 말씀이었습니다. 

마태는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그를 모든 유대인들이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은 사무실로 그를 직접 찾아오셨고, 그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로 삼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때까지 세리를 친구처럼 대하고, 세리를 제자로 삼는 스승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를 제자로 삼으리라, 세리도 내 친구이다>, 이런 말은 과거엔 들어보지 못한 사랑의 음성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는 평생을 손가락질 당했고, 소외되어 살았습니다. 그는 세상에 복수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돌아온 결과는 살인, 강도 등의 죄목으로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동정하지 않았고,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죽여 사회로부터, 국가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격리되는 그를 기꺼이 당신의 나라에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를 받아주시고, <함께 있자>고 친근하게 말씀한 분은 과거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어보는 사랑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위로와 사랑을 받은 숱한 사람들의 반열에 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가 연약할 때 주님은 치유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가 외로울 때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형제가 없이 홀로 성장했지만, 외롭지 않았고, 극단적인 성격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저를 감쌌기 때문입니다. 목사로서 말못할 마음의 짐을 지고 허덕일 때마다 예수님은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앞에 엎드리면 눈물이 흐르는 날이 많습니다. 그냥 너무나 좋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수 없이 좋은 분입니다. 세상의 소중한 분들이 많지만, 그 분들은 언젠가는 떠날 분들입니다. 부모님도, 사랑하는 이웃과 친지들도 떠납니다. 교우님들도 떠납니다. 그래서 때론 불안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제 곁에 계실 분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때로는 그 사랑이 무서운 꾸지람이 되어 다가와도, 그 꾸지람도 달기가 한량없습니다. 때로는 격려하시는데,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권면, 사랑, 위로, 긍휼, 자비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 은혜를 풍성히 맛본 분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고 말씀합니다. 공동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조금 더 쉽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 교우님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이 놀라운 은혜를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마음이 울적하고 혼돈스러울 때 부드럽게 속삭이시는 권면의 말씀을 듣게 되길 기원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들으시고, 설교를 통해 들으시길 바랍니다. 
아프고 외로울 때 예수님의 사랑의 위로, 교제가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상처를 싸매시는 위로, 함께 하시는 교제, 외롭지 않도록 안아주시는 그 손길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왜소하고, 볼품이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 그래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좌절할 때, 그 누구도 우리에게 눈길을 주지 않을 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자비로운 주님의 은혜가 임하길 기원합니다. <사람들이 너를 정죄해도, 난 너를 용서한다. 사람들이 널 비판하고 쫓아내도 난 너를 이해한다. 내게로 오너라.> 이런 은혜를 맛보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누리는 은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 모든 놀라운 은혜를 풍성하게 맛보시길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런 은혜에 보답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 방법은 형제와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형제와 이웃을 섬기라, 그것이 주님께 받은 은혜에 대한 <아름다운 보답>이 될 것입니다. 

그 내용을 우리는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랑으로 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2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하나로 합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갈라서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는 겸손하게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3절을 읽으실까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습니다. 다툼, 허영은 버려야 합니다. 그 대신 겸손한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가만히 사랑의 눈으로 보면 우리보다 훌륭한 부분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 부분들을 발견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일을 잘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도 잘 도와 주어야 합니다. 4절을 읽읍시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우리는 모두 자기 일에 분주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어려울 때 모른 척하면 안 됩니다. 다른 이들의 일도 함께 거들어야 합니다. 우리 잇속만 차리면 안 됩니다.  

결국 바울 사도는 다른 사람과 사랑으로 한 마음을 품는 것, 겸손함으로 상대방을 높여주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일을 돌보아주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향한 영적 부담을 안겨줍니다. 타인을 향한 부담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사명입니다. 우리 신앙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수직축과 함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라는 수평축으로 구성됩니다. 풍성하고 성숙한 신앙인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교회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교회가 훌륭하지만, 이것까지 잘 해서 자신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지난 주일에 생각했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장 29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고 나서 오늘 본문으로 넘어오는데, 그 첫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러므로>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도 받아야 하는데, 그 고난이란 다른 사람을 향한 선한 사랑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 한 마음을 품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고난입니까? 힘들기 때문입니다. 힘든데도 해야 하기 때문에 고난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힘들어도 이웃에 대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이런 태도는 단지 고난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고난은 영광을 가져온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이런 태도는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유명한 <존 비비어> 목사님이 쓰신 <<존중>>이란 책은 정말 좋은 책입니다, 그 분은 그 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태도를 <존중>이란 한 단어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다른 사람을 존중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남을 존중하는 사람이 존중을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책을 12월에 임직 받을 분들에게 필독서로 나누어 드렸습니다. 그 분들이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들을 존중하게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나누어드렸습니다. 

그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목사님께서 베드로전서 3장 9절 말씀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 말씀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억울하게 대했어도 그를 존중하여 오히려 복을 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난 후 한 교인이 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보험회사 간부입니다. 그 동안 정말 열심히 일한 결과 부사장 승진 후보 1순위가 되었습니다. 제가 승진 자격이 있다는 것은 다른 직원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주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뿐인데, 그 사람은 백인이고, 저는 흑인이거든요. 저는 이번 주간에 항의하기 위해 법적 절차를 밟으려고 했는데, 목사님 설교 때문에 다 망쳤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그 교인은 법에 호소하여 억울함을 풀려던 생각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튿날 출근한 그는 부사장이 된 동료의 사무실에 가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승진을 축하합니다. 최고의 부하 직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사장을 존중히 여기면서 회사를 위해 혼신을 다해 일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경쟁회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그를 스카웃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거절했습니다. 또 연락이 왔고, 또 거절했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연봉을 드리겠습니다. 이 종이에 당신이 원하는 대로 써서 다음에 주십시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내와 고민하다가 아예 상대방이 포기하게 하려면 엄청난 연봉을 요구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현재의 연봉의 세 배를 요구하기로 마음먹고 종이에 적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만났을 때 그가 말했습니다. <써 오신 것을 볼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이미 당신에게 지금 받는 연봉의 네 배를 드리려고 결정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원래 있던 회사보다 훨씬 더 큰 회사에서 최고의 간부가 되어 일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을 제치고 승진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상사로 존중히 여기면서, 열심히 그의 일을 도와 회사를 위해 일했을 때, 즉 오늘 본문처럼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남의 일도 돕는 마음으로 상사의 일을 도왔을 때, 상대방 회사의 스카웃 제의도 뿌리치고 진심으로 그 회사의 일을 돌본 결과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복을 우리 모두가 받게 되길 원합니다. 

옛날, 이 땅 위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나무도 풀도 마르고, 사람도 짐승도 갈증에 겨워 물을 찾아 헤맸지만 한 방울의 물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 소녀가 병에 걸려 누워 있는 어머니를 위해 물통을 들고서 메마른 황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황량한 들판에는 물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물을 찾다가 지친 소녀는 마른 풀 위에서 깊은 잠에 떨어졌습니다. 배고픔에 눈을 뜬 소녀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물통에 물이 채워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친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물통에 입을 갖다 댔습니다. 그러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렇게 자책한 소녀는 집으로 정신 없이 뛰어갔습니다. 그러다 소녀는 그만 지나가던 강아지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물통은 땅에 뒹굴었고, 소녀는 물이 다 쏟아진 줄 알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놀랍게도 물은 그대로였습니다. 그 때 강아지가 달려와 응석을 부리며 매달렸습니다. 소녀는 강아지에게 물을 조금 나눠줬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나무로 만든 물통이 은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집에 돌아온 소녀는 <어머니, 물이에요!> 하며 어머니에게 물통을 건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는 괜찮다. 그보다 너나 마셔라.>하고 딸에게 다정히 말했습니다. 서로에게 물통을 건넬 때 다시 은 물통이 금으로 변하였습니다. 소녀는 기뻐서 물통의 물을 마시려고 했습니다. 그 때 허름한 길손이 나타나서 <미안하지만 물 한잔 주시지 않겠습니까?> 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녀는 물을 마시려다 말고 잠자코 물통을 길손에게 건넸습니다. 그러자 물통에서 흐르던 물방울들이 모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반짝이는 북두칠성이 되었습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유명한 <톨스토이>의 <<북두칠성>>이란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에 의해 살고 있다. 그러나 자기에 대한 사랑은 죽음의 시초가 되고, 이웃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삶의 시초가 된다.>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두 가지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땅의 나라>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두 나라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 중 하나는 사랑입니다. <땅의 나라>를 지배하는 사랑은 <자기 사랑, amor sui>입니다. 자기만 사랑합니다. 남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오히려 남을 희생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사랑, amor Dei>가 지배합니다. 거기서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결국은 이웃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 성도입니다. 그런 우리가 할 일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은혜를 누리길 기원합니다. 그 감격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우리교회 성도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칭찬 받는 소리를 듣고, 신령한 복을 받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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