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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픔속에 태어난 지도자 (느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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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속에 태어난 지도자 (느 1:1-5)


우리 인생에는 명암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남아공에서 2010년 월드컵 축구대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그리스와의 경기에서 2:0으로 이겼습니다. 국민들 모두가 이 월드컵을 큰 축제로 여기며 기쁨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멋지게 그라운드를 누볐고, 국민들도 우리 선수들이 남은 경기에 최선을 다해 16강에 오르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기라고 하는 것은 이길 때도 있지만 질 때도 있습니다. 질 때마다 당사자는 가장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합니다. 때로는 가슴 아파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선수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선수들은 경기에 진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있다고 토로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전엔 칭찬하고 환호했던 언론과 국민들이 경기에 졌다고 비난하고 조롱할 때 더 쓰리고 아픈 경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경기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에도 명암이 있습니다. 밝은 자리가 있는가 하면 어두운 자리도 있고, 기뻐하는 자리가 있는가 하면 슬퍼할 수밖에 없는 자리도 있습니다. 잘 나갈 때는 스스로도 기뻐하고 자신에게 열광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닥쳐오면 금방 풀이 죽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탓을 하며 남을 비난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헤미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나라와 민족이 절망스러운 환경에 처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이 책임을 전가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아니하고, 이 민족이 고통당하고 있는 때가 바로 내가 일하고 사명을 받을 때라고 여겼던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587년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멸망을 당합니다. 예루살렘성은 파괴되었고 이스라엘의 수많은 엘리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우리가 아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도 바벨론에서 태어난 2세, 3세들입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존속할 것 같던 거대한 바벨론 제국도 그 후에 등장한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을 당합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바벨론에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환대했습니다.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합니다. 마침내 70년의 세월이 흘러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5만 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귀환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습니다. 

다시 8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후, 에스라에 의해서 2차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말씀을 통해서 영적으로 개혁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개혁과 예배갱신을 시도합니다.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주위환경이 너무나 부실했기에 이스라엘에는 다시금 총체적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3차 귀환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때 느헤미야가 등장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고, 타민족의 침략과 약탈 또한 계속되었습니다. 이 위기 속에서 하나님은 느혜미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선택하십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 (느헤미야 1:1)

느헤미야의 아버지의 이름은 하가랴입니다. ‘하가랴’란 “하나님께서 막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방해하시고 하나님이 어둡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라는 말은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시대는 고통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의 시대가 느헤미야를 통해서 끝난다는 뜻입니다. 

느헤미야가 나타나기 전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암울한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멸망했고, 민족의 많은 사람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대적들은 그들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있었던 사람들의 정신적 상태는 아주 피폐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패배의식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픔과 고통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하나님은 그 아픔을 뚫고 느헤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를 나타내십니다. 

느헤미야에게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등장한 것은 페르시아 아닥사스다가 왕이 된지 2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기슬르월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태양력으로 11월 중순에서 12월 중순을 말합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수산궁에 있었습니다. 수산궁은 페르시아왕의 겨울 별장이기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부러울 것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종의 몸으로 바벨론에 갔지만 이제는 왕의 별장까지 사용할 수 있는 고위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왕의 최측근 보좌관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음식에 독이 타있는가 없는가를 분별하는 술관원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장 왕의 신임을 받는 사람으로 교포였지만 이국땅에서 최고의 지도자가 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고 권력 또한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공허함과 영적인 빈곤이 있었습니다. 영혼에 대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습니다. 그는 조국 이스라엘이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수산궁에서 예루살렘 성까지의 거리는 1000km가 넘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예루살렘을 향한 그리움이 있었고 영적인 향수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사용하십니다. 그에게 고향에 대한 관심, 민족에 대한 관심이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느헤미야 1:2)

느헤미야의 동생인 하나니가 고향인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때 느헤미야가 그를 초청해서 고향의 소식을 묻습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호기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나도 거기에 참여하기 원한다는 뜻입니다. 질문 속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질문 속에서 깨달음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위기를 모르는 이유는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고 개혁되지 않는 이유는 묻지 않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형편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내 민족이 어떻게 살고 있고, 지금 어떤 형편에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들의 삶의 현장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관심을 갖고 듣기 원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파하고 기도하는 자를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느헤미야 1:3)

그런데 그는 아주 충격적인 내용을 들었습니다. 내 백성들이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고통과 능욕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은 허물어졌고 예루살렘은 찌꺼기처럼 불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반가운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힘든 소식들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일어났던 사건들 중에 마음 아팠던 일들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들으면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에게는 아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남이 고통당할 때 함께 아파하기 시작하면 지도자가 되기 시작합니다. 가정에서 아들과 딸이 고통당할 때 아파하면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힘들어할 때 자녀들이 아파하면 그 자녀들이 가정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그렇습니다. 아파하는 사람들, 신음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는 바뀌어졌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헤미야 1:4)

여기 보면 특별히 몇 가지 동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듣고’, ‘울고’, ‘슬퍼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이 짧은 한 문장에 동사가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그 소식을 듣고 어찌할 줄 몰라서 애통해하는 모습을 잘 나타내줍니다. 그는 주저앉았고 통곡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슬픔으로 가득 찼습니다. 사랑하는 조국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이지만 느헤미야는 마치 자기 몸이 부서진 것처럼 아파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문이 불타는 것을 마치 내 몸이 불타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느헤미야 2장 1절을 보면 그가 기슬르월에 시작해서 니산월까지 슬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한 일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국을 생각하며 함께 아파하고 슬퍼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가 흘린 눈물은 결코 감성적인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나오기 전에 먼저 가슴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되새겼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지방 선거를 했고 나라의 지도자들을 뽑았습니다. 우리는 그 지도자들이 느헤미야의 마음을 닮기 원합니다. ‘공동체에 어려움은 없는가? 외로운 사람은 없는가? 힘든 사람은 없는가? 학생들은 바르게 자라고 있는가? 부정과 불의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가슴으로부터 아파하는 사람은 참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교육에 대해서 아파할 때 교육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경제의 자리에서 아파할 때 경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문화의 자리에서 아파할 때 문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정치의 자리에서 아파할 때 정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정을 위해서 기도할 때 가정의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아파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민족의 지도자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잠깐 눈물 흘리고 말아도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서러워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가 바벨론에 붙잡혀온 것이 아니라 그의 부모세대가 붙잡혀 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열심히 살았고 페르시아왕의 신임을 받아 고위관직에 올랐습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신분을 가졌습니다. 얼마든지 호의호식할 수 있는 특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느헤미야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민족을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지도자가 세워주셨습니다. 

참된 생명의 역사는 사랑의 눈물에서 시작됩니다

지도자는 눈에 눈물이 맺히기 전에 먼저 가슴에 눈물이 맺혀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의 가슴은 먼저 멍이 들어야합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눈물이 없는 메마른 지도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일까요? 외면적으로 보면 제도나 규정, 법과 시스템이 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법, 제도와 규정, 시스템은 어느 하나 버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세상에 가득하면 사람들은 고통을 받습니다. 그 멋진 말들, 좋은 말들, 옳은 말들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멍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율법을 뛰어넘는 사랑과 용서의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을 만나면 그들을 야단치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억눌려 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위로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함께 아파하시고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치유와 생명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참된 생명의 역사는 사랑의 눈물이 녹아 있는 가슴에서부터 나옵니다. 물이 촉촉이 젖은 땅에서 생명의 싹이 나와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도자가 되어서 많은 일을 하며 업적을 많이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슴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지도자가 가슴 아파할 때 그의 업적이 살아있는 업적이 되고, 그의 사명이 사람을 살리는 사명이 됩니다. 느헤미야는 고통 속에서 주저앉아 있을 수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이 일들을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면 아파합니다. 
아파하면 통곡합니다. 

통곡하면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새로운 사명이 주어지게 됩니다. 아파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아무리 찔러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내 모든 육체가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과 영혼이 아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건전한 영혼이 아니라 마비된 영혼이요 죽어버린 영혼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공동체는 죽은 사람, 죽은 사회입니다. 그러한 사회와 문명은 언젠가는 서서히 해체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주위에 여러 가지 아픔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내 아픔으로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변화가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의 문제, 교회의 문제, 사회와 민족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것을 깨닫는 만큼, 이것 때문에 아파하는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의 역사가 이 땅위에 충만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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