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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오늘 (렘 29: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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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오늘 (렘 29:4-14)

  
요즘 제가 관심을 가지고 읽는 책 중의 하나는 여행기입니다. 낯선 곳을 여행하고 난 후의 소감을 기록한 여행기를 읽고 있으면 저 자신도 그곳을 여행하고 있으며, 그가 낯선 곳에서 만난 사람을 나도 함께 만나고 있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를 훌쩍 떠나고 싶을 때에는 아쉬운 대로 여행기를 읽으면서 대리만족을 얻기도 합니다. 

최근에 읽은 여행이야기는 한 독일 사람의 것입니다. 평생을 정원사로 일하다가 정년퇴직을 한 쿠르트 파이페라는 사람이 독일의 끝에서부터 점점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마침내 이탈리아의 수도인 로마까지 약 3350km를 걸어서 여행한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그가 이런 여행을 생각하게 된 동기는 자신이 대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나서였습니다. 수술을 받은 지 석 주 만에, 배에는 배설물을 담는 주머니를 찬 채로, 큰 배낭은 뒤에 짊어지고 작은 배낭은 가슴에 매단 채로 여행을 시작한 그는 166일 동안을 꼬박 걸어서 로마에 도착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행경비가 넉넉지 못한 까닭에 대부분의 밤을 텐트를 치거나, 버려진 헛간이나, 차고에서... 아니면 침낭 속에 들어가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러는 여정에서 그는 자기가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친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루 종일 걷다가 저녁이 되어서 텐트를 치려하는데, 그 장소가 마땅치 않으면 하는 수 없이 정원이 있는 한 집을 찾아가서 조심스레 ‘당신의 집 정원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거절을 하기는커녕 자기들의 저녁 식사에 초대를 하기도 하고, 빈방을 내어 주기도 하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할 것을 권하기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토스트며 여러 가지 과일과 음료수를 텐트 앞에 놓아두고 일찍 출근을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물이 필요해서 수돗물을 받으려 하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수돗물은 받지 못하게 하고는 자기들이 사두었던 뜯지도 않은 생수를 병째로 그에게 건네주면서 이것을 마시라고 합니다. 가끔씩 자기 아내가 찾아 와서 함께 여행을 하는데, 비가 몹시 내려서 비를 피하게 위해서 한 호텔의 식당에 들어가서는 문뜩 그 곳에서 하루를 쉬고 싶어져서, 지배인에게 가격을 물어보니 너무 비쌌습니다. 그가 돈이 없어서 주저하는 것을 알아차린 지배인은 터무니없이 값을 깎아 주어서 그를 꼭 자기 호텔에 붙잡아 두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숱한 친절을 겪으면서 그는 ‘믿음이 생겼다...’고 ‘정말 어떤 신비로운 손길이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그렇게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여행 이야기 속에는 좀 부끄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오래 된 도시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는데, 가다 보니 고색창연한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예배당과, 목사관과, 교육관이 거의 한데 붙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는 교회 관리인이 마침 잔디를 깎고 있기에 ‘교회마당에 텐트를 좀 쳐도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관리인은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교회에는 텐트를 칠만한 잔디가 없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행자는 좀 섭섭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관리인을 붙잡고는 ‘나 같은 여행자가 텐트를 치거나 묵어 갈 수 있는 곳이 이 근처에는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있을 겁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고서는 한참을 지나서 ‘교회에는 낡은 목사관이 있으니 그곳에 묵으시면 될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목사님은 어디를 가셨는데, 한 시간만 있으면 돌아올 겁니다.’ 여행자는 그 시간 동안 먹을 것을 사러 다녔습니다.   
    
다시 돌아와 보니 아직 목사는 돌아오지를 않았고, 교인인 중년 부인 세 사람이 탁자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쓰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들에게 허락을 받으면 안 되냐?’고 관리인에게 물었더니 그녀들은 마치 경멸하는 것처럼 여행자를 바라보더니 ‘그것은 목사님이 결정할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목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두 시간 이상을 교회 주변을 서성거리는 동안 그는 그 여자 교인들이나 관리인이 마치 자기를 거지나 부랑아처럼 바라보는 기분 나쁜 시선을 느꼈습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해서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침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그런 성경 구절이 생각나서 끝까지 목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한 시간만 있으면 돌아온다던 목사는 저녁 일곱 시가 되어도 만날 수가 없었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짐을 꾸려서 산속으로 들어가서 텐트를 쳐야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고 났더니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더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 대목은 그가 여행을 다니며 겪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의 하나이지만, 대부분의 아름답고 친절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아주 드물게 나오는 거절당한 이야기인데... 그 무대가 하필이면 교회여야 하는지... 좀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아주 작은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자기들만 잘 지내는 일에 익숙해져서 사회적인 변화나 시대적인 사건이나 이슈에 잘 반응하지를 못하고,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기대나 희망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는 오늘의 교회가 가진 한계를 잘 드러내는 일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편지의 배경에 대하여 잘 설명을 하여 줍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의 앞에 나오는 1절-3절이 그 부분입니다. 때는 남 왕국 유다가 거의 기울은 시기였습니다. 대부분의 영토를 내주고 예루살렘만 간신히 지키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힘에 겨웠습니다. 

주전 597년경 당시 세상의 패권을 장악해가던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다의 왕이었던 여호야긴을 비롯해서 많은 귀족과 기술자들을 포함해서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단지 힘이 없고 가난한 이들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하루아침에 오랫동안 터를 닦고 살아오던 예루살렘을 등지게 되었을 때, 그것은 단지 정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실향민과 같은 차원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그들에게는 커다란 신앙적인 혼돈과 흔들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자기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떠난 자기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마치 벌판에 내 던져진 그러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곳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가 없는 곳...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보호하심을 받을 수가 없는 곳... 이것이 바로 바빌론에 포로로 사로잡혀온 그들이 가질 수밖에는 없는 생각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생각이 잘 나타난 것이 바로 시편 137편입니다. 그들은 바빌론의 강가에 모여 앉아서 눈물과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노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주님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랴...’(시편137:1,4)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짐작해볼 때, 바빌론에서도 그들은 오로지 예루살렘만을 생각하였으며, 자기들을 이렇게 만든 바빌론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에 불타올랐습니다. 하루빨리 바빌론은 멸망하고, 자기들은 시온으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자 그런데 오늘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들에게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레미야는 이렇게 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그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그 열매도 따먹어라. 너희는 장가를 들어서 아들딸을 낳고, 너희 아들들도 장가를 보내고 너희 딸들도 시집을 보내어, 그들도 아들딸을 낳도록 하여라. 너희가 그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5-6절) 시편 137편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우리는 여기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그들은 바빌론은 없고 오로지 예루살렘만을 생각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그들이 마치 여전히 예루살렘에 있는 것처럼... 바빌론에 끌려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여기가 마치 예루살렘인 것처럼... 예루살렘에서 살던 방식으로 그렇게 살아라... 이렇게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집안을 번성하게 해야 하겠다... 그런 목적으로 밭도 일구고, 나무도 심고, 열매도 따고... 결혼해서 아들 딸 많이 낳고... 또한 그 아들과 딸들이 나이가 차서 결혼을 해서 또 자손들을 낳고... 이렇게 해서 가문이 쇠하지 않고 번성하려 하였다면... 비록 이 곳이 바빌론이라도... 이곳이 그들이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 억지로 끌려 온 곳이라도... 이곳에서 사는 일이라는 것이 감사와 기쁨은 없고 오로지 원망과 한탄뿐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예레미야는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예레미야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지금 그들은 엄연히 바빌론에 끌려온 사람들인데... 그들에게는 자기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바빌론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가 분명히 있는데, 바빌론과 예루살렘은 분명히 다른 곳인데... 마치 아직도 그들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그토록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은 것처럼... 마치 여기가 예루살렘이나 되는 것처럼... 부지런히 밭을 일구고 과수나무를 심고 열매를 따고...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서 번성하도록 하라니...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은 아예 없는 것인가요? 
   
아마 예레미야처럼 예루살렘의 몰락을 가슴 아파하고 그것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이 예레미야를 가리켜서 사람들은 ‘눈물의 예언자’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러면서도 그가 바빌론에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그곳이 마치 예루살렘인 것처럼... 그들이 그런 수치스런 일을 전혀 당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살라고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는 물론 하나님의 커다란 맥락에서 오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이 그곳에 끌려간 지 얼마 안 되는 시간만 지났을 뿐이고 앞으로도 수많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야 하지만, 그의 생각으로는 때가 되면... 칠십 년이라고 하는 어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v.10) 

그때 이스라엘이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그 곳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  남아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제 그들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이곳 바빌론에서 살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든지... 지리멸렬한다면... 정작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기회가 오더라도 갈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레미야는 이런 하나님의 계획에 입각한 미래를 염두에 두고서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멸망하지 말고 번성해야 한다고...’(6절) 그렇게 말하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오늘이 가지는 중요성과 거룩함입니다. 비록 여기가 예루살렘이 아니더라도... 지금 자기들이 서 있는 곳이 자기들이 원하고 선택해서 서 있는 자리가 아니더라도...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항상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뿐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보내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항상 원망과 증오심과 한탄으로 가득한 시간이 되고 만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오늘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억지로 감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음은 내키지도 않는데...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기뻐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오늘을 단지 화를 내거나 불평만 하거나... 울분을 터뜨리는 일에만 다 소모해 버리고 만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거나 기뻐하시는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이라는 시간은 참으로 소중하고 거룩한 시간입니다. 항상 기뻐할 수는 없겠지만... 범사에 감사하기는 힘들지만... 설사 내가 전혀 원하지 않는 곳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도 마음을 다잡아서 땅을 일구어서 과수원을 만들고 나무를 심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오늘을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예레미야는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v.7) 우리의 귀를 의심하기에 충분한 대목입니다. 어떻게 그들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바빌론이 번영하도록 기도할 수가 있을까요? 바빌론이 망하고, 그들이 잘못되고 바빌론 사람들이 불행해 지는 게 이스라엘의 행복과 기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레미야는 그와는 반대로 너희들이 나서야 한다고... 그들이 평안하고 번영하도록 너희들이 기도해야 한다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유가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마지막 부분에서 밝히고 있지만... 어쨌든 이것은 바빌론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힘든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서도 이런 분위기를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요나서의 배경은 예레미야의 시대보다 훨씬 더 앞선 시대였고, 남 왕국 유다가 아니라 북 왕국 사마리아를 정복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성이 그 배경입니다. 요나는  앗수르가 사마리아를 정복한다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못들은 척하고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탑니다. 그것은 멸망을 당해야 마땅한 니느웨 사람들이 자기의 경고로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가 염려하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려던 계획을 접으셨습니다. 요나는 그런 모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하나님의 생각! 그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혹시 그들이 아직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들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아서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평안하게 번성하면서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 그래서 마침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것!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품으신 생각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렇듯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창12:2) 이것이 바로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물론 아브라함 개인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지만, 그를 통해서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나님은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맞이하는 오늘이 거룩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이런 거룩한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다. 너도 아브라함처럼 네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들에게 번성하고 평안하게 살도록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너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의 평안과 번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결국에는 너도 평안하게 되는 비결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보내는 오늘이 나를 위해서도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러면서도 진정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의 번성과 평안을 위해 기도하면서 보내는 거룩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쩌면 이러한 예레미야의 말은 우리들에게는 감당하기가 쉽지는 않은 것입니다. 많은 아픔과 상처가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밭을 일구고 번성을 위해서 노력을 한다는 것... 그리고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의 번성과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준다는 것... 이것은 생각해보면 쉽게는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v.11) 예레미야가 예언자인 것은 이렇듯 그는 다른 평범한 사람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없는 음성을 듣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제 다 무너져 내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 하는 사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폐허를 딛고 다시금 새롭게 세워질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희망에 가득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희망이 있기에 바빌론에서도 예루살렘에서처럼 밭을 일굴 수가 있는 것이고, 자기들에게 수치를 안겨다 준 바빌론 사람들이 번성하고 평안하도록 기도하며 복을 빌어 줄 수가 있는 것이지요. 비록 오늘이 견디기 힘들고 어려운 날이어도 거룩한 시간인 것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미래와 이어진 시간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그는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 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v.12-14) 생각해보면 이것처럼 우리에게 용기가 되고 위로가 되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을 때...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버리셨나보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절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바빌론에 가 있더라도... 거기서도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만나주시고...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보내는 오늘이 참으로 거룩하고 의미심장한 날인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 하나님은 내가 그분을 간절히 찾고 갈망할 때면 내 곁에서 나와 함께 길을 걸어가시고, 내가 간절히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이시기에... 우리가 직면하는 매일의 현실 가운데서 이런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고 경험한다면... 바로 그 날이 거룩한 순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문재라는 시인의 글 중에 ‘오래된 기도’라는 시가 있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이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이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만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생각해보면 우리가 맞이하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의미심장하고 거룩한 날들인지... 우리가 직면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현실 가운데서도 다시금 일어나 부지런히 밭을 일구며 열매를 희망하며 오늘을 보낸다면...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의 번영과 평안을 비는 기도를 드리는 오늘이 된다면...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보내는 오늘이라면... 우리의 오늘은 참으로 거룩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거룩하게 오늘을 보내는 우리들을 위하여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멋진 일들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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