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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 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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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 5:14-16)

   
예수를 믿는 기독교의 종파들 중에 아미쉬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미국의 펜실베니아주와 인디애나주에 모여살고 있습니다. 얼핏 텔레비전을 통해서 잠깐 보도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농사를 지으며 아직도 300년 전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들이 추구하는 단순하고 검소한 삶은 수수하고 소박한 옷차림에서부터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국가에 세금은 내지만 혜택은 받지 않는 이들은 또한 제도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자기들이 세운 학교에서, 외부의 정식교사 양성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20대 전후의 현명한 아미쉬 처녀들에 의해서 중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 이 공동체의 아이들은 만 16세가 되면 공동체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바깥세상으로 나갈 것인지를 바깥 세상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결정짓게 되는데, 약 90%정도가 공동체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아미쉬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를 믿어도 꼭 이렇게 독특하게 믿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진 믿음이 어떤 것인지 드러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6년 10월 2일 아미쉬 마을에서 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신이 자신을 버렸다’는 착각 속에서 삶을 비관하던 한 우유배달부가 수업 중이던 아미쉬 학교에 침입을 하여서는 총을 난사한 것입니다. 그 결과로 공부하던 소녀 10명 중에서 다섯 명이 죽었고, 나머지 다섯 명은 중상을 입고 맙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지만,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사람들은 참으로 의연하게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였습니다. 죽은 아이의 부모들은 자기의 소중한 딸들을 죽인 그 우유배달부를 용서하였습니다. 결국 그도 자살을 하고 말았는데, 그가 남긴 가족들을 찾아 가서 그들을 위로하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배달부의 장례식에 조문을 했던 많은 사람들 중의 대부분이 아미쉬였다고 합니다.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는 죽음을 당한 13살, 11살된 아미쉬 소녀들의 그 날의 행동이었습니다. 범인이 총을 쏘려는 낌새를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에, 13살 된 소녀인 마리안 피셔는 나서서 그에게 ‘나를 먼저 쏘세요!’라고 호소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에는 11살 밖에 안 된 동생 바비 피셔가 또 나서서 ‘그 다음엔 나를 쏘세요!’ 라고 배달부에게 애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와중에도 자기들이 죽으면 다른 동생들의 목숨은 건질 수가 있겠다고 생각을 한 것이지요. 도대체 이들이 가진 신앙은 어떤 것이기에 아이들까지도 이런 선택과 행동을 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현재 아미쉬의 공동체에 들어 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약 24만 명 정도가 된되는데, 매년 꾸준하게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에 가보면 'JOY'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기쁨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Jesus first, Others next, Yourself last!' 예수가 첫 번째, 이웃이 두 번째, 너 자신은 가장 나중에... 이렇게 읽을 수가 있겠지요. 어쩌면 그리 색다를 것도 없는 가르침이지만, 묵묵히 삶 가운데서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던 그들이... 이전에 누구도 보여주지 못했던 사랑과 용서와 자기희생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 그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 것이지요. 

오늘 우리들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주님의 당부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누구도 자신의 삶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을 피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들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사람들이 좀 몰랐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 때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에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주님 도대체 저에 대해서 좀 뭘 아시고... 좀 조사를 해보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셔야지... 도무지 저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세울 만한 점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인데... 세상에서 그래도 빛이 되려면 공부도 좀 하고 사는 것도 남들에게 부러움을 살만하고... 그럴 듯하게 사는 사람을 불러다가 그런 부탁을 하셔야지요... 저 같이 아무 것도 자랑하거나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빛이 되라고 하시는지요?’ 이런 생각이 들지는 않으시는지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주님도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들이 어느 정도인지... 이미 파악하고 계신 듯합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드러내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운 뜻입니다...’(마태11:26-27) 여기서 말하는 이것이란 곧 하나님 나라와 연관된 것이지요. 예수가 여러 마을을 다니시며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많은 이적도 행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표징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예수의 초청에 응답하고 나서는 사람들은 선뜻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 같이 무엇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의 주변에는 세리나 죄인들처럼 문제가 많고 결함투성이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치 너희가 아니라면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완벽하거나 본받을만한 구석이 있기는커녕... 문제가 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바로 이것이 믿음이 아닌가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사람만 뽑아다가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겠지요. 

진정한 신앙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마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이 정말 중요한 자리에서 그 믿음이 드러나게 되고... 예수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되는 것’(마태20:16) 이것이 바로 신앙이 가진 묘미입니다. 그래서 칸트같은 철학자는 ‘신앙이란 굽은 나무에서 곧은 재목을 뽑아내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예수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좀 극단적으로 읽는다면 ‘너희가 아니면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 이 세상에서 너희들이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포기하고 만다면... 그날로 세상은 아주 캄캄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아니라면 세상을 밝힐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예수는 마치 모든 희망을 우리들에게 걸고 계신 것처럼...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세상 사람들 앞에서 빛이 될 수가 있는 것일까요? 그들과 우리들을 비교할 때 도덕적으로나 여러 면에서 특별히 나은 점도 없는 우리들인데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여 예수는 ‘이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는 존재들은 오로지 너희들뿐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먼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는 것으로부터 빛의 역할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된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산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말과 사람들이 등불을 켜는 행동을 들어서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마치 산 위에 세운 마을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지요. 산 위에 세운 마을은 도저히 사람들의 눈에 숨길 수가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v.14)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마치 도저히 숨길 수없는 산 위에 세운 마을과도 같다고 하십니다.  
   
또한 예수는 우리를 부르신 까닭을 마치 사람들이 집에다가 등불을 켜는 일에 견주십니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만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v.15) 예수가 우리를 부르신 목적... 그것은 마치 사람이 집에서 등불을 켜는 경우외도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집 안에서 등불을 켤 때에는 높은 곳에 매달아 두어서 집 안을 고루고루 환하게 하려는 것이지, 단지 숨겨 놓으려고... 그릇 같은 것으로 혹시라도 빛이 새어나갈까 해서 숨겨두려고 등불을 켜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을 부르신 까닭도 이런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남들이 모르게 숨어서...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감추면서 살게 하려고...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신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산 위에 있는 마을처럼... 집안 높은 곳에 매달려서 전체를 밝히고 있는 등불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라고 예수는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사람들 앞에서 숨길 거냐? 도대체 언제까지 네가 필요할 때만 나를 찾고 내가 너를 필요로 할 때에는 모르는 척하고 있을 거냐?’ 이런 주님의 음성을 우리는 들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재촉하셔도 우리들 중의 대부분은 여전히 머뭇거릴 수밖에는 없습니다. 도대체 나에게 무엇이 있다고... 우리는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교회를 다니기는 참 오랫동안 다녔지만... 어떤 때에는 성경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는 사람들보다도 못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참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다르게 빛이 될 만큼 세상을 잘 살고 있지도 못하니... 참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이제 좀 그만 감추면서 살지를 말고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표시 나게 예수를 좀 믿어 보아라...’ 하시는 예수의 부탁 앞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 것일까요? 
  
정말 우리들에게는 사람들에게 드러낼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요?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제 그만큼 교회를 다녔으면... 뭐가 좀 있기는 하지 않은가요? 우리는 이제 좀 나는 아무 것도 몰라...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어 이런 생각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제가 청년시절부터 좋아하던 믿음에 대한 시가 있습니다. 오규원 시인이 쓴 ‘믿음은 별이라서’라는 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작아서 각자 달라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어두워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작아서... 너무 인간적이라서... 
우리의 믿음은 해탈과는 너무 멀어서... 몸은 작고 여기에서 멀리 있다.
그러나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무엇이 이 어둠을 반짝이겠는가?
믿음은 별이라서 작아도 모두 반짝인다. 믿음은 별이라서... 믿음은 별이라서...‘

그는 우리가 가진 믿음 자체가 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별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반짝이기 마련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아주 작은 별이라도 빛나는 것에는 아무런 것도 방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설혹 내가 너무 부족한 것이 많고... 너무나 인간적이고... 세상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너무 작고 미미하거나... 그런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단지 나에게 믿음만 있다면... 그것은 어디에서든지 세상을 밝힐 수 있도록 빛이 나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단지 믿음만 있다면 우리는 저절로 별처럼 빛나는 존재가 되어서 세상을 밝히게 된다는 생각은 우리를 ‘산 위에 세운 마을’로 비유하시는 예수의 말씀 속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아마 요즘은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주택지로서는 그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통도 불편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겠지요. 

작년에 서울 창신동에서 목회를 하는 친구의 교회를 찾아가 보고서는 깜작 놀랐습니다. 동대문 변두리의 높은 산이 온통 오두막집으로 꽉 차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소위 말하는 달동네인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달랐습니다. 산 위는 정말 사람들이 가서 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물론 불편한 것이 많겠지요. 자동차도 없었을 텐데... 얼마나 살기가 불편하였을까요? 그래도 사람들이 산 위에 있는 마을을 좋아한 까닭은 그곳만큼 안전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예루살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800여 미터 정도가 되는 높은 산지에 발달한 도시입니다. 먹을 물도 넉넉지 못한 그곳이 이스라엘의 수도가 된 까닭은 그곳이 단지 높은 산이어서 그랬던 것이지요. 적들이 쉽게 쳐들어 올 수가 없는 곳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그곳을 정복하려고 하였을 때... ‘눈 먼 사람들이나 다리를 저는 사람들만으로도 그 성을 지킬 수 있다.’(사무엘상4:6)는 말이 나돌 정도로 예루살렘은 견고한 도성이었습니다. 
   
이렇듯 감히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평안함을 지니는 산위에 있는 마을을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 비유한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편 125편은 일종의 예루살렘을 향하는 순례자들의 노래인데...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시온 산과 같아서, 흔들리는 일이 없이 영원히 서 있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감싸고 있듯이, 주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토록 감싸 주신다.’(시편125:1-2)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각자 주어진 곳에서 생활하다가 일 년에 세 차례 있는 명절이 되면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합니다. 아마도 이 말씀은 예루살렘을 향하는 순례자가 저 멀리 산 위에 세워진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느낀 것을 표현한 대목일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듯 예루살렘을 바라볼 때에 느껴지는 것은 평안함 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 구나...’하는 평안함을 그들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느낄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가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습을 예수는 ‘산위에 세운 마을’로 비유하셨다는 것... 이제 우리는 그 의도를 조금은 알 수가 있습니다. 산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 그것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물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산 위에 세워져 있기에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에 그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그러한 평안함을 사람들은 그 도성을 바라보면서 느낄 수가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불안하고 초조하게 느끼며 살다가도...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을 바라보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그래... 저 사람들을 보면 정말 하나님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애... 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남다르게 안정되어 있고, 우리와는 다른 편안함을 느낄 수가 있어...’ 이렇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 평화와는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선물하며,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실 때에 주님이 기대하시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을 마음속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감리교회를 세우신 영국의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일기를 보면 그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가 미국의 조지아에 선교를 하러 가기 위해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가는데, 그는 참 놀라운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그가 탄 배는 가끔씩 심한 풍랑을 만나서 흔들립니다. 그 때마다 그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는데... 그는 거기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 이후 그는 그들과 신앙적인 교분을 나누면서 큰 영적인 힘을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빛이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산 위에 세워진 마을처럼... 세상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람들에게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평화를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빛으로 존재한다는 것... 그것을 또한 예수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 우리가 세상에서 빛이 된다는 것은 곧 착한 행실과 연관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서 빛이 된다는 것은 곧 세상을 착한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씀이지요.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 빛이 된다는 것이 좀 구체적으로 우리들의 손에 잡히는 듯합니다. 그것은 곧 착하게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착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어떻게 세상을 사는 것을 의미할까요? 우리들은 자신이 세상을 착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 이건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로군... 비록 내가 성경은 잘 모르고 신앙생활에 익숙하지는 않더라도 착하게 살고는 있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들이 계신가요? 아니면, 이렇듯 착하게 사는 사람... 착한 성품을 가진 사람... 이렇게 말하면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여러분들에게는 있으신지요? 혹시 우리 교회 안에서 착한 사람을 찾아보라면 누구를 말할 수가 있을까요?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아... 저렇게 살수만 있다면... 저 사람이라면... 나도 교회에 다니고 싶어져...’ 이렇게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공동체에는 누가 있을까요? 
    
우리가 ‘저 사람은 참 착한 사람이야...’ 이렇게 말할 때 받는 이미지나 느낌은 어떤 것인가요? 아마 그것은 차갑고 냉정한 것 보다는 따뜻한 성품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자기의 실속만을 챙기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 보다는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생각해주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관용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빌4:5) 아마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착한 성품과도 통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너그러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다른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너그러움으로 대하여 주는 것...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착한 행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착한 행실이라는 것을 다른 모습으로도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다른 이들을 항상 따뜻한 사랑과 너그러운 성품으로 대하여 주는 것...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빛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닌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온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대단하고 놀라운 일을 함을 통해서... 또는 남들이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 이를테면 요즘 열리는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과 같은 세상이 깜짝 놀랄 만큼의 놀라운 일을 하는 것만이 세상에서 빛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저 다른 사람을 따스한 마음으로 대하고, 너그럽게 대하여 주고, 나보다 먼저 남을 배려해주고... 이렇게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이라고 베풀어 주려할 때에... 우리는 그러한 작은 행위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빛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하시는 주님의 심정을 더 생생하게 표현하여 보자면... 이런 것이지요. 세상을 환하게 밝힐 사람은 오로지 너희들뿐이다. 우리의 하나님이 참으로 선하고 좋으신 분이라는 것...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여전히 좋은 곳이고 살만한 곳이라는 것... 이것을 드러내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너희들뿐이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할 만 하니까... 할 수 있으니까...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우리가 항상 주님의 평화 속에 머물러 있고... 그 평화를 사람들에게 선물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자체로 빛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사랑으로 이웃을 대할 수 있다면... 좀 더 너그러워 지고... 좀 더 따스해지고... 좀 더 넓은 이해와 관용의 마음으로 너를 대할 수 있다면... 그 때부터 우리들은 빛의 본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빛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우리를 흥분시키는 아름다운 일이고 우리가 세상을 살아야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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