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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식 분위기를 바꿔야 (막 14: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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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 분위기를 바꿔야 (막 14:22-26)


어느 쪽을 기억하느냐에 따라

어떤 면을 기억하느냐에 따라서 인격과 삶이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까이에서 사역을 돕던 사람들 중에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부어 드릴 만큼 헌신적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자 두 자매는 큰 슬픔으로 통곡하면서 목이 쉬도록 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어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나사로가 묶인 채로 나왔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나사로나 마르다나 마리아가 시간이 지난 뒤에 나사로가 죽어서 슬펐던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죽었다 살아난 감격적인 사건을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죽었다 살아난 것을 기억하는 것이 영육간의 건강과 주님께도 바른 자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대부분 죽어서 슬퍼했던 경험만을 더 기억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성만찬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이고 기뻐해야 할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슬픈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바꿔서 신앙이 주는 기쁨과 의미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만찬이 초상집 같은 이유 

 저는 어려서부터 신앙 생활했지만 지금까지 성만찬을 거행할 때 분위기는 항상 장중하고, 무겁고, 초상집 같았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25)『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직접 마지막 식사라는 의미를 담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식사의 장면을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아래의 작품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불러서 최후라는 말을 너무 강하게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찬식의 분위기를 어둡고, 무겁고, 초상집 같은 것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고 끝낸다면 우리는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성찬식의 분위기는 이런 아픔을 토대로 기쁨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후에도 표현하기 어려운 의미가 담긴 식사들을 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21:13-14『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둘째, 구약의 유월절 상황에서도 무거움이 아니라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을 시키기 위해서 행하신 9가지 재앙을 내리신 후 어린양의 피를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바로 그 밤에 애굽의 모든 장자는 죽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도, 갇히지 않은 사람도, 보통사람, 군인도, 관리도, 왕인 바로까지 온 나라의 장자가 죽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짐승의 첫 새끼까지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가 문 좌우 설주와 인방이 있으면 죽음의 천사가 넘어(유월)갔습니다. 그 밤에 애굽의 수도와 도시 그리고 산골짜기까지 통곡소리가 진동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애굽 사람들이 우리가 다 죽게 생겼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보내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장면과 비교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은금패물 뿐만 아니라 그들이 구하는 것을 다 허락하셨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 또는 430년간의 종살이를 청산하고 애굽을 빠져 나왔습니다. 이때의 분위기는 아마 우리나라가 남아공 월드컵에서 4강에 올라갔다고 해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찬식을 침울하고, 침침하고, 초상집 같은 분위기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지십니까? 유월절 분위기를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셋째, 유월절을 지킨 유대의 전통에서도 어둡거나 초상집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의 순서를 보면 
① 감사기도를 드린 후 포도주 잔을 돌렸습니다.(이때 참석자들이 손을 씻기도 합니다) 
② 쓴 나물을 하로셋이라는 과일 등으로 만든 소스에 찍어 먹었습니다.
③ 두 번째 잔을 돌리고 난 이후 지도자가 유월절의 내력을 설명하거나 질문에 답해 주었습니다. 
④ ‘할렐’이라는 시편113과 114편을 노래했습니다. 
⑤ 양고기와 누룩 없는 떡을 먹었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만찬이라고 했습니다. 
⑥ 세 번째 잔과 네 번째 잔을 마셨습니다.

이렇게 4번 포도주를 마신 것은 출6:6-7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는 말씀을 기억해서 4 잔의 포도주를 마셨던 것입니다. 

⑦ 그리고 할렐 후반부 115편과 118편을 부르면서 마쳤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어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희 방패시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할지로다…” 
말씀을 소리 내서 읽어 보시면 도저히 어두운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 찬양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넷째, 본문에서도 26절에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가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 성찬식 끝 분위기는 찬미였습니다. 


성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셔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더 받아내기 위한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석하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또 한 번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경험 중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사건이 성만찬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명작이지만 기독교의 신앙을 잘못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더욱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님을 모신 거룩한 새로운 창조물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감격으로 십자가가 기다리는 현장으로 예수님처럼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부족하지만 예수님과 함께라면, 태산이 가로 막았다 하여도 태산보다 크신 예수님과 함께라면 넘어 갈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에게 이런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어렸을 때 검정고무신과 반장화를 신고 자랐습니다. 그 다음에는 운동화를 신었고, 그 다음에는 가죽 구두와 고급운동화를 신었습니다. 지금은 건강 구두를 신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평생을 짚신만 신다가 죽기도 했고, 고무신만 신다가 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세상이 빠르게 변합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수많은 고난의 장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그 속에 파송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성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모신 우리가 담대하게 세상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십자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신 그 길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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