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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어찌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랴 (욘 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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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찌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랴 (욘 4:5-11)

  
십진법에서 10은 꽉찬 만수입니다. 완전 수요 성숙의 수입니다. 오늘은 10년 10월 10일입니다. 영적으로 꽉찬 사람 - 가장 성숙한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2003년 윌로크릭교회가 새예배당과 주차장건축을 마치고 미국의 탁월한 컨설턴트 에릭 완슨(Eric Arnson)을 영입하여 몇년동안 집중적인 연구를 합니다. 그 결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 영적으로 가장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의 특징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영혼구원을 위해 힘을 씁니다. 즉 전도를 활발히 합니다. 
둘째, 수입에 비해 헌금을 많이 합니다. 
셋째는 사람을 섬기고 세우는 사역을 힘써 감당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세워주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내가 어찌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랴」입니다. 

I. 요나

요나서 하면 흔히들 사람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기적 사건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혹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불순종하여 도망가다가 혼쭐이 나고 억지로 사명을 감당한 선지자 얘기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이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서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 잃은 자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끼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 잃은 자를 향한 아버지의 가슴앓이, 통곡의 눈물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생명 하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 한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가치기준을 보여줍니다. 

이제 요나서를 살펴보십시다.

성경에서 요나를 설명하는 유일한 이력서는 요나서 1장 1절 “아밋대의 아들” 요나입니다. 어찌 요나의 이력서가 이뿐이겠습니까만 이 말은 요나에게서 사명을 빼고 나면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 사명이 무엇일까요?

여기 아밋대라는 말은 “아멘” - “진실”이라는 뜻입니다. 이 진실이라는 사람의 집에 아들이 한 명 태어났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요나 - 비둘기”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한 마리 비둘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하여 이 땅 구석구석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는 영광스러운 아들을 기대했던 아버지의 열망이 “요나”라는 이름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요나가 아버지 마음, 아버지 사랑을 알지 못하여 이 아름다운 이름에 걸맞게 살지 못했다고 하는데에 있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바로 그 요나의 모습은 그 옛날 선지자의 이름이기 이전에 바로 요~“나”의 모습이라고 하는데에 있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은 나의 불순종이었고 요나가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교회의 모습이요, 한국교회의 모습이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내가 구원받은 기쁨과 감격을 잃어버리고 영혼구원 - 전도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면 바로 내가 “요나”입니다. 

요나는 잠을 자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잠에서 깨어 외쳐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세상의 신음소리,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신음의 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앓이를 느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가슴앓이를 보고 사는 사람 - 그가 영적인 사람 -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II. 요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일어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40일 후 이 성이 멸망할 것이라고 외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1장 2절에 의하면 세 가지 동사로 요약되어집니다. -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얼른 생각하면 이 말씀은 요나에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이나 요나에겐 원수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 이거 신나는 사건이다.” 좋아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합니다. 진짜 하나님이 앗수르를 멸망시키려면 가만히 있다가 유황불을 내리면 될 일이지 왜 날보고 가서 외치라고 하실까? 감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내가 외치면 저들이 회개를 할지도 모르잖아. 모두는 아니라 할지라도 열 사람은 회개를 할거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또 기다리시고 인내하시고 앗수르를 용서 하실지도 몰라. 그럼 안 돼지. 절대로 안될 일이야.’ 요나가 아는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언제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은 좋지만 내 원수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은 대단히 기분 나쁜 일이거든요.

요나서 4장 1절-2절을 보세요.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그래서 요나는 도망을 치는 겁니다.

-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빨리 도망을 칩니다.
- 전혀 반대 방향으로 도망갑니다.
- 하나님이 못 보게 배 밑창으로 숨습니다.
-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들릴까봐 아예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요나를 잡아내기 위해 온 땅 온 바다를 뒤흔들어 버리셨습니다. 

 저는 요나서를 보면서 “만약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이 불순종의 자리에서 요나의 인생을 마감했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다. 요나의 인생이 1장 1절 2절 3절에서 마감되었다 할지라도 할 말이 없다. 요나의 인생이 이렇게 끝장났다고 할지라도 할말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불순종하여 도망가던 그 자리, 영적침체에서 헤매던 그 자리, 죄짓고 방황하던 그 자리에서 당신의 인생이 끝장났다면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요나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통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니느웨 땅에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요나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당신의 가족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당신의 태신자들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얼마든지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내하시며 내게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시고 오직 나를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니라도 하나님은 이 도시를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교회를 통하여 이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민족이 아니더라도 세계를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통하여 마지막 때 이 구원의 역사를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이 사명이 있기에 이 민족은 예수 안에서 위대한 민족입니다. 

그런점에서 요나가 만난 풍랑도 축복입니다. 대풍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거친 파도 소리는 요나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 시간 풍랑 만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나오신 분 계십니까? 이 시간 내가 탄 배가 깨지는 고통 중에 나오신 분 계십니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이 진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사명의 사람으로 거듭나길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도망가면 하나님이 앞에서 길을 막습니다. 뒤에서 당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면 하나님이 앞장 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내 곁에서 나와 동행해 주십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와 주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피하여 도망가는 길은 낭패의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 붙들고 순종하여 가는 길은 승리의 길입니다. 이건 인생의 법칙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피해 도망가기 위해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옵니다. 지중해엔 언제나 있었던 바람이니 그냥 그러다가 그치겠지. 바람이 불어오니 시원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을 겝니다. 이것 봐라 바람이 세어집니다. 그럴 수 있지. 어제 오늘 있었던 일도 아니고 가끔 있었던 일 아닙니까? 이게 왠일입니까? 먹장구름이 몰려옵니다. 대풍이 일어납니다. 배가 금방이라도 뒤집혀 질 듯 깨질 듯 요동을 칩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늘 있던 인생의 어려움이지요? 그런데 바람이 점점 거세어 집니다. 여러분 죽도록 맞고 얻어터진 다음에 돌아오지 말고 산들바람 불 때 주님 앞에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먹장구름 만나 만신창이가 된 다음에 돌아오지 말고 산들바람 불 때 주님 앞에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풍랑입니다. 하나님께선 요나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당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금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당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 마음입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고백해 놓고 하나님을 배신하는 자리에 계신 분 아니계십니까? “하나님 섬기겠습니다. 헌신하겠습니다.” 작정해 놓고 차일피일 미루며 게으름에 빠져 있는 분 아니 계십니까? 젊은 시절 그토록 뜨겁게 약속했던 서원을 잊어버리고 살아 계시는 분 아니 계십니까? “하나님 이번 일을 잘 완성해 놓고 충성하겠습니다. 아이가 대학에 가면 내가 그 일 감당하지요.” 약속이행을 미루고 살아가시는 분은 아니 계십니까? 풍랑 앞에 고집 부리지 마십시오. 흔들거리는 사업의 배 안에서 무릎을 꿇으십시요. 건강의 적신호가 오는 인생의 배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십시요. 가정이 위기 앞에 흔들릴 때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가 어떤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성공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III. 니느웨도 아끼시는 아버지

우리는 요나를 너무 쉽게 비판합니다만 당시의 배경을 살펴보면 요나의 마음을 이해함직도 합니다. 니느웨는 옛 앗수르의 수도입니다. 앗수르는 대단히 잔인한 나라였습니다. 한 나라 한 도시를 쳐들어가면 모든 사람 모든 문화 재산 모두를 아예 불살라 버렸습니다. 포로들을 끌고 가는데 그냥 잡아가는  것이 아니고 코에다 구멍을 뚫고 끈으로 묶어 끈 하나만 당기면 전부다 끌려오도록 해서 도시를 지나갑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음 마을은 아예 항거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반항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막 모래 바닥에 묻어 콧구멍만 밖으로 내밀게 하고 햇볕에 말려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앗수르가 쳐들어온다면 아예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요나는 이 장면을 여러 마을에서 목격했습니다. 소문을 들었습니다. 앗수르 ‘앗’자만 들어도 ‘악’하고 괴성이 나왔습니다. “이런 잔인한 민족은 망해도 싸다. 반드시 망해야 한다.”라고 생각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그 끔찍한 니느웨 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라는 겁니다. 

많이 좋아지긴 했습니다만 요나의 앗수르에 대한 감정만큼이나 우리에게도 나쁜 감정을 지우기 어려운 멀고도 가까운 한 나라가 있지요. 

프로 권투가 한창 인기가 있을 때 일본 선수하고 붙으면 온 국민이 T.V. 앞에 몰려들어 응원을 했습니다. 

지난 17세이하 여자 축구 월드컵에서 온국민이 그토록 흥분했던 이유는 우승이라는 사실도 중요했지만 결승전 상대가 일본이 있다는데 더 큰 흥분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태풍이 불어오는데 태풍이 한반도를 향해 돌진해 오다가 일본으로 방향을 돌렸다고 하면 말은 하지 않지만 괜히 입이 찢어집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만은 정말 그래서는 안되는데 말입니다. 이제 저들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일본에 대한 감정과 도무지 비할 바가 못되는 것이 요나의 앗수르 니느웨에 대한 감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징글징글한 니느웨를 아끼신다는 겁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니느웨를 아끼신 하나님께서 일산을 파주를 서울을 한국을 아끼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신이 잃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앓이를 외면하고 그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슴에 아버지의 가슴앓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 당신의 가슴에 도무지 용서가 안되는 누군가가 있습니까?
- 저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을 거야. 아니 절대로 구원받아서는 안된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 저 사람은 지옥 제일 밑바닥에 예약된 사람일거야 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들도 아끼십니다.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도 아버지 마음, 아버지 사랑 때문이었고, 아버지 사랑이 있다면 그들도 구원받을 것입니다. 더구나 당신이 품고 기도하는 가족들, 목장가족들 그리고 태신자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아끼시겠습니까? 

요나를 연구하다보면 결론이 참 애매합니다. 

요나서 마지막 구절 4장 11절은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물음문으로 끝이 납니다. 제가 요나서를 기록했다면 요나의 응답을 한 구절이라도 더 붙였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요나가 드디어 깨닫고 응답하니라 아버지 마음을 이제야 알았나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아멘-”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러나 요나서는 결론이 없습니다. 미완성 교향곡입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요나서 마지막절은 네가 기록하라는 겁니다. 네가 어떻게 순종했는가를 가지고 아버지 앞으로 오라는 겁니다. 요나서가 기록된 이후 수천년동안 우리 모두는 마지막 절 그리고 요나서 후편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 네가 아버지 마음을 얼마나 아느냐?
- 네게 잃은 자를 향한 아버지의 가슴앓이가 있느냐?
- 너는 그 아버지 마음을 전하는데 얼마나 순종하고 있느냐?
- 그 순종의 기록들을 가지고 내게 돌아오너라!


IV. 니느웨를 향한 가슴앓이

하나님께 혼 줄이 난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대단히 재미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요나3:3-4)

니느웨는 걸어만 가도 사흘은 걸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루동안만 설렁설렁 다니며 외쳤습니다. 전혀 성실한 모습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보십시오. 이처럼 요나의 알량한 순종을 통하여서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루가 못되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온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외치는 마을마다, 입을 열 때마다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심령들이 주님 앞에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임금으로부터 시작하여 온 백성들이 심지어 짐승들까지 하나님 앞에 나와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금식기도 대행진이 일어났습니다. 가축들까지 금식을 했습니다.

이쯤되면 요나가 하나님 아버지 마음과 사랑을 알아야 하는데 요나는 오히려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악을 쓰며 말합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고국에 있을 때 안가겠다고 했던 것 아닙니까? 나를 바다에 던져 물고문까지 시키고 물고기 뱃속 - 말이 물고기 뱃속이지 위장 창자 속이니 똥통이 아닙니까? 똥통에까지 집어넣어 억지로 나를 이곳으로 보내더니 그 원수 놈들을 살려줍니까? 차라리 나를 죽여주시지요. 죽여요 죽여! 

하나님께서 지금 요나에게 보여주고 싶은게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그 영혼들을 얼마나 아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슴앓이를 가르쳐 주고 싶었던 선지자가 또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호세아 선지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창녀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커다란 고통이었는지 모릅니다. 이 남자 품에서 저 남자 품으로 그리고 결혼한 그 다음날 다시 옛 남자 품으로 도망갑니다. 그 아내를 다시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도망가서 빚더미에 앉아 있는 아내를 값 주고 사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담을 뛰어 넘어 도망갑니다. 한밤중 가시담을 뛰어 넘어 도망갑니다. 또 아내를 찾아 터덜터덜 나서는 호세아 선지자.

하나님 내가 왜 이런 꼴을 보고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의 선지자가 창녀를 안고 사는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호세아에게 들려옵니다. “호세아야 너의 마음이 나의 마음이니라. 너의 비참한 모습이 나의 비참한 모습이니라. 내가 사랑해야 될 백성들이 네 아내처럼 창녀 짓을 하고 죄와 함께 뒹굴고 있구나. 이들을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야 될 내 백성이라고 끌어안고 사는 내 마음을 이해하겠느냐.” 그랬군요 하나님. 내가 바로 고멜이었군요. 내가 창녀였군요. 눈물로 아내를 사랑하고 용납하는 호세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고통, 아버지의 눈물, 아버지의 가슴앓이를 보여주고 싶은 겁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순간 내 인생은 가장 커다란 기쁨과 감격을 갖게 되지요.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아픔을 하나 갖게 됩니다. 나는 구원받아 이렇게 행복한데 사랑하는 내 가족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슬픔이지요. 내 곁의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는 그날까지 이 슬픔, 이 아픔은 계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슴앓이요 내 가족 내 이웃을 향한 우리의 가슴앓이입니다. 이 가슴앓이가 없이 내 가족 내 이웃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가슴앓이는 참 소중한 아픔이 됩니다. 

본문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네가 그토록 싫어하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앓이를 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이 나라 나아가 열방의 구원을 위한 아픔을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 하나님의 가슴앓이가 내 가슴에도 있습니까? 
- 하나님의 눈물이 내 가슴에도 있습니까? 
- 하나님의 아픔이 내 가슴에도 있습니까?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은 소풍가서 보물찾기 하듯이 요행히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아픈만큼 영혼의 열매는 소중한 것입니다. 


V. 기쁨의 이유. 아픔의 이유?

억지 춘향격으로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유황불을 내릴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그 성을 용서하는 겁니다. 니느웨 성이 놀라운 부흥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요나의 반응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4:1)

요나서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한번도 요나가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얼굴 한번 활짝 펴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갈 때도. 물고기 뱃속에 던져져 회개하는 그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오는 발걸음 속에서도. 하나님의 예언자로서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 모습 속에서도. 요나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요나는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망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니느웨성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언덕에 올라갔습니다. 중동의 태양이 따갑게 내려 쪼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 박 넝쿨이 무럭무럭 자라더니 순식간에 요나의 머리를 덮었습니다. 그늘을 만들었습니다. 이 순간 비로소 요나가 기뻐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요나가 크게 기뻐하였더니”(4:6)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는 그 장면에서 요나는 기뻐하지 아니했습니다. 한 도시가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 속에서 요나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조그마한 도시가 아니고 당시 최대의 도시였던 니느웨 성, 12만명이 사는 엄청난 도시가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토록 놀라운 부흥을 바라보면서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박 넝쿨 하나를 보고 그토록 기뻐하고 있습니다. 심히 기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고 기뻐하고 무엇을 보고 슬퍼해야 하는지, 선지자에게 아버지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앓이, 아버지의 눈물이 없었던 선지자 요나의 가슴이 오늘 요~ “나”의 모습은 아닐런지요?

오늘 우리의 가치관이 타락하면 

①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을 기뻐하지 못합니다. 
② 마땅히 싫어해야 할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③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고 Yes 해야 할 때 Yes 하지 못하고, No 해야 될 때에 No 하지 못합니다. 
④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소중하게 생각되지 않습니다. 

이 순간 하나님의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니 아침에 해가 뜨자 박넝쿨이 말라버렸습니다. 정신이 아찔할 만큼 더워지자 요나는 하나님을 향해 차라리 죽여달라고 악을 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나야, 네가 왜 화를 내냐? 네가 박을 심기를 했냐 키우기를 했냐 요나야,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없어지는 이 박넝쿨을 아꼈거늘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4:10-11)

- 너는 박넝쿨이 그토록 귀하냐. 내게는 사람이 귀하고 영혼이 귀하다.
- 너는 네 삶의 환경이 그토록 귀하냐 내게는 이 도시의 뭇 영혼들이 귀하다.
- 저들을 위해 나는 독생자를 보냈다. 그를 죽게 했다. 

너를 찢을 수 없어 나의 외아들을 찢었고 너를 저주할 수 없어 나의 외아들을 저주했다. 그리고도 저들을 구원할 수 없다면 나의 아픔, 나의 고통, 나의 가슴앓이가 오죽하겠느냐?

요나가 그렇게 못마땅해 한 이유를 심리학자들은 요나의 자기체면 때문이었다고 얘기합니다. 망한다고 외쳤으면 망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말했는데 감히!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내가 거짓 선지가가 되고 마는 것 아닌가?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고 화를 냅니다. 

예언자는 무엇이며 선지자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의 자존심이 그렇게도 중요한 것 이었습니까? 내가 당당한 대접을 받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볼 수만 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내가 볼 수만 있다고 한다면 내 자존심이 구겨져도 내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가 손해를 본다 할지라도 마땅히 기뻐해야 될 사람이 예언자 아닙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박 넝쿨 때문에 몸부림해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던 삶의 박 넝쿨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몸부림하며 울어보았지만 말라 비틀어져 가는 내 영혼을 끌어안고 내가 울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박 넝쿨 때문에 나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보았지만 내 영혼을 내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내 주변을 구원하지 못해서 내가 몸부림하며 괴로워하며 그들 때문에 내가 울어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영혼의 상태였습니다. 

요나서의 결론을 아십니까? 마지막 절입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요나4:11)

네겐 박넝쿨이 귀하냐? 내겐 사람이 귀하다. 
내가 어찌 죽어가는 영혼을 아끼지 아니하랴.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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