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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부로 대하지 말라 (눅 22:6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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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대하지 말라 (눅 22:63-65)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때리면서 모욕하였다. 또 그들은 예수의 눈을 가리고 말하였다.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추어 보아라.” 그들은 그 밖에도 온갖 말로 모욕하면서 예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 두서없는 상념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저는 이번 주에 신문에서 본 두 개의 기사 때문에 무거운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하나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며칠 전 이스라엘 군사법정은 부사관 2명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그 경과는 이렇습니다. 2009년 1월 부사관 2명은 가자 외곽의 텔알하와에 있는 집을 수색하다가 폭탄이 설치된 것으로 의심되는 가방 2개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어린 팔레스타인 소년 하나를 지목해 그 가방을 열라고 종용했습니다. 아이는 두려웠지만 위협에 못 이겨 가방을 열었습니다. 가방에서는 돈과 종이 뭉치만 나왔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얼마나 긴장했던지 바지에 오줌을 쌌고, 부사관들은 그 광경을 보며 웃었습니다. 아이가 두 번째 가방을 열지 못하자 그들은 가방에 총을 쏘아 폭발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그 이스라엘 부사관이 특별히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두려웠기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들도 부모에게는 소중한 아들들이고, 벗들에게는 좋은 친구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아군과 적으로 가르는 일에 익숙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무고한 팔레스타인 소년을 존엄한 인격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대한 것입니다. 자기들 대신 가방을 열게 한 것도 잘못이지만, 오줌을 싸고 있는 아이를 보고 웃은 것은 더욱 큰 잘못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자기들이 ‘도둑질하지 못한다’는 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을 겁니다. 이 계명에서 ‘도둑질’의 목적어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 계명은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것,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 유괴 등을 금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이지리아 북부 잠파라 주에 살고 있는 많은 주민들이 최근 납중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중에는 어린이들이 많았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금값이 폭등하자 주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납 오염 지역에서 무리하게 작업을 하다가 납중독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납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신경조직이 파괴돼 지능저하, 행동장애를 낳고 급기야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 번쩍이는 광물질의 뒤안길에 그런 눈물과 아픔이 배어 있습니다. 성덕대왕신종을 만들기 위해 끓는 쇳물 속에 던져졌던 아이 에밀레의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셈입니다. 

이 두 가지 기사는 제게 인도 북부 자르칸트 주에서 운모를 캐기 위해 하루 종일 흙속에 파묻혀 일하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떠올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이 하루 종일 일해 손에 쥐는 돈은 잘해야 1,000원입니다. 그들이 캐는 운모는 여성들이 좋아하는 ‘펄’의 원료가 된다고 합니다. 펄은 눈가나 목에 아래 뿌려 반짝이는 효과를 내는 것이라 합니다. 그 무표정한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희망조차 없이 살아가는 어린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두서없는 상념 속에서 떠오른 것은 이 세상이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과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며 살고 있는 우리 모습이었습니다. 슬펐습니다. 무정한 세상이 슬펐고, 그 세상에서 모욕 받고 웃음을 잃은 채 살아가는 이들이 슬펐고, 그런 세상을 보며 슬퍼하실 주님의 마음 때문에 슬펐습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모욕당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 예수는 지금도 그들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계십니다.

• 예수를 조롱한 사람들

겟세마네 동산에서 관원들에게 잡히신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문에 이어진 것은 모욕과 폭력이었습니다. 예수를 지키는 사람들은 예수를 때리면서 모욕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눈을 가리고 말하였습니다.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히어 보아라.” 그들은 온갖 말로 모욕하면서 예수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도록 한 것일까요? 그들은 누군가에게 고통과 굴욕감을 주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사디스트(sadist)였을까요? 그들은 타고난 악인들이었을까요? 차라리 그들이 타고난 악인들이었다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런 사람이려니 하면 되니까요. 문제는 그렇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도 집에 돌아가면 좋은 남편이요, 아이의 재롱을 보며 흐뭇해하는 아빠였을지도 모릅니다. 집에서의 그와 공적인 자리에서의 그는 하나입니까, 아니면 둘입니까? 이런 자기 불화야말로 인간의 한계이고 슬픔의 뿌리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보고 더욱 광포해지는 사람들은 어쩌면 약자들인지도 모릅니다. 내면에 힘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의 무력감을 숨기지 위해 거칠어질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채워준 완장의 힘을 빌어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것을 일러 병적인 합일화(incorporation)라 합니다. 합일화란 ‘자기’와 ‘자기가 아닌 것’을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중요한 인물이나 조직의 태도와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을 일컫는 말입니다. 상대를 이상화하고 그의 신념이나 인격, 정서 등을 마치 자기 것인 양 무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 이 현상은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한 이들에게서 일쑤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빌라도의 병사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주홍색 옷을 입힌 후,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희롱하고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쳤습니다. 인간적인 굴욕감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백성의 지도자들과 병정들은 예수를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이런 모욕의 공모를 통해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강자의 편에 서 있다는 안도감이었을까요? 아주 직관적으로 강자의 편에 서는 이들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은 참 불쌍한 약자들입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이 예수님께 “선생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막10:37) 하고 청탁하였을 때 주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제자들은 몰랐던 그 잔을 주님은 남김없이 들이키고 계십니다. 주님은 굴욕, 고통, 야수가 되어 버린 인간을 온 존재로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여 정화시킨 후 다른 존재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는 흙처럼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이것이 예수의 길입니다. 그것은 좁은 길이지만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아주 작은 고통에도 비명을 지르고, 아주 작은 모욕에도 몸을 부르르 떠는 우리조차 주님은 불쌍히 여기시고 품어주십니다. 

• 예수와 만난 사람들

바울 사도는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꽃을 가슴에 품은 사람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향기가 된다는 말일 겁니다. 佛家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말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대면하고 살아가는 이웃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만나는 이들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까? 잘 살고 못 살고는 사는 집의 크기나 통장의 잔고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들의 가슴에 남겨놓은 흔적으로 평가되지 않을까요? 생각만 해도 흐뭇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얼굴>이란 시에서 그런 이의 모습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가슴이 그저 시원한,/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예수는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와 만난 사람은 누구나 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세리는 참회하고, 간음한 여인은 자학을 버리고 참 사람의 길을 찾았고, 소외감에 몸부림치던 사람은 자기가 만든 담을 허물고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를 만나면 눈이 열리고, 다리에 힘이 생기고,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에게는 지켜야 할 ‘자아’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든 품을 수 있었고, 누구에게라도 자신을 아낌없이 내줄 수 있었습니다. 

이 무조건적인 사랑이 존재의 변화라는 기적을 낳았습니다. 이런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사람들은 그런 삶은 외면합니다.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 제목은 가히 충격적입니다. <<교회로부터 예수를 구하라 Saving Jesus from the Church>>. 이 책의 표지 그림은 공업용 테이프로 입이 봉해진 예수의 초상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데서 벗어나 예수를 따라 살 수 있을까 How to Stop Worshiping Christ and Start Following Jesus”. 예수는 경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따름을 원하십니다. 이미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길을 알았습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지만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십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내내 제 귓전에 뱅뱅 도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이란 곡입니다.

당신은 나를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내 마음 우울하고 내 영혼 지칠 때
괴로움 몰려와 내 마음 무거울 때
나는 여기서 가만히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잠시 내 곁에 머무실 때까지

당신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기에 산 위에 우뚝 설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시기에 폭풍이 이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받쳐줄 때 나는 강해집니다
당신이 나를 일으켜 나를 더 큰 존재가 되게 합니다

주님은 다가오시고, 일으켜주시고, 떠받쳐주심으로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와 힘을 제공해주십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최소한으로 살라 

이 마음으로 살 때 인생은 순례가 됩니다. 우리 삶의 푯대이신 예수님을 향한 순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순례자는 불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인생길에서 만나는 사소한 일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순례자는 곁에 동행이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여깁니다. 이번 주간에 제가 만난 말씀이 있습니다. 2세기의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의 말입니다.

“너의 삶에 남은 시간은 짧다. 
산 위에서와 같이 살라.” 

이 구절을 저는 최완택 목사님의 글을 통해 만나게 되었는데, 목사님은 이 구절을 소개하고는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 잠시라도 살아본 사람은 알 수 있다. 산 위에는 무엇이든지 최소한이다. 더 이상 줄이기 어려운 작은 한도에서 살아야 한다. ‘최소한’을 갖고 살면 오히려 아주 넉넉해지고 건강하게 된다.”

예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바로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최소한’이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살아갑니다. 소유가 늘어날수록 번민도 깊어집니다. 더 편리한 것, 더 나은 것을 갈망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번민이 깊어질수록 타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가팔라지고 또 인색해집니다. 자발적으로 삶의 규모를 줄이는 순간, 삶의 비애는 절로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니 병입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 앞에 서있습니다. 홀로 행복한 길을 추구할 것인지, 더불어 행복한 길을 추구할 것인지…. 하지만 홀로 행복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간의 나사로를 외면한 부자의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 미몽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깊은 행복을 가장 연약한 이들 속에 숨겨두셨습니다. 그들 곁에 다가가, 그들 곁에 머물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을 때, 그 행복은 서서히 몸을 드러냅니다. 

살아가는 동안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마십시오. 직장에서건, 학교에서건, 식당에서건, 차 안에서건, 집에서건, 만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그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때 우리 마음에는 평화가 차오르고, 그리스도를 아는 생명의 향기가 번져갈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함부로’라는 말과 결별한 사람들입니다.

모욕 받고 위협받은 팔레스타인의 소년, 납 중독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이지리아의 어린이들, 흙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인도의 어린이들,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한 번도 초콜릿을 먹어본 적이 없는 어린이들, 종일 축구공을 기우며 생계를 이어가는 남아시아의 어린이들, 그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혼이 굳어버린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살고, 덜 쓰고 많이 나누는 삶을 선택할 때 우리는 어느덧 그분의 길 위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가을에 그리스도를 아는 생명의 열매가 우리 가슴에 맺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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