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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품신앙 (행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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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신앙 (행 5:1-11) 
 
  
경제용어 중에 거품경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엄청난 활황인거 같지만 실상은 취약하기 이를 때없는 경제상황을 빗댄 말입니다. 실제와는 달리 겉으로 나타나 보여지는 과대 팽창된 허상의 경제가 바로 거품경제입니다. 어떤 재화가 실제적인 가치보다 과대평가되어 거래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과대평가되는 것은 인간의 기대심리와 욕심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화의 가치에 자꾸 거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품이라는 것은 한없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데 위험성과 문제점이 있는 겁니다. 거품은 일었다 사그라드는 것입니다. 거품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거품은 언젠가 반드시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세계적인 현상이 바로 이 거품이 모든 면에서 제거되고 있고 거품이 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체가 들어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거품으로는 안됩니다. 거품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 거품없는 진실된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국회에서 하는 청문회는 부정적인 면도 있고, 왜 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지만 주요 임명직 인물을 덮고 있는 거품을 빼는 기회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좋은 제도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 내 안의 거품을 제거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신앙이든, 경제든, 지식이든, 정서적인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거품을 제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도 거품교회가 있고, 부흥도 거품부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거품이 제거되면 남은게 별로 없는 교회, 거품이 사라지면 남은게 없는 그런 부흥은 거품교회이며 거품부흥인 것입니다. 이런 거품교회와 거품부흥으로는 사회적 도덕의식이나 도덕 수준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유해무익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우리들은 거품없는 인생이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는 거품이 없는 교회, 거품이 없는 부흥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거품신앙이 있습니다. 과대망상적인 신앙은 거품신앙입니다.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고,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 안일에 빠진 신앙은 거품신앙입니다. 

어느 정신병원에서 정신병환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나는 하나님이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는 정신병자가 "나는 너를 하나님으로 임명한적이 없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과대망상병 환자들이 많습니다. 거짓선지자들, 거짓능력자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추종하며 따라다니는 불쌍한 인생들도 많습니다. 이런 거품신앙도 결국 거품이 꺼질 날이 오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가끔 대형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을 대하다보면 저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쥐꼬만도 못한데 호랑이인척 흉내만 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크기가 신앙의 크기인줄 착각하면서 교만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거품이 많이도 끼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허장성세의 거품신앙의 진면모를 보는 것 같아 허탈할 때가 있었습니다. 

왜곡된 신앙. 왜곡된 직분, 왜곡된 진리 이런 것들은 모두 거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뜨겁고 화려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은혜"하고 "믿습니다"를 연발하지만 밥 먹듯이 죄를 짓는 교인들의 신앙은 거품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중심해서 산다고 하면서도 자기 중심적인 삶을 고집하는 신앙은 거품신앙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 많은 직분자들과 수 많은 교인들이 풍성하고 좋은 신앙인들 같아보이지만 실재도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겉보기에는 자유인 같지만 실상은 죄의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거품경제의 끝은 경제의 파탄인 것처럼 거품신앙의 끝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거품신앙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죄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믿지 않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 있었던 교인이었으며 성도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죄는 헌금을 드리는 것을 거부한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남들보다 과분한 헌금을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죄는 일부를 드리면서 전부를 드리는 체하였던 죄였습니다. 그것은 위선의 죄로서 실제로 아닌 것을 마치 정말인 것처럼, 실제로 하지 않은 것을 마치 다 한 것처럼 나타내려는 태도였습니다. 
이들의 신앙에는 거품이 끼여 있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중에 누구 하나라도 이러한 것을 충고하는 슬기를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망할려면 부부가 똑같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좀 허황되면 아내라도 그러지 말아야 하고 아내가 불신실하면 남편이라도 신실하면 화를 면할 수가 있을텐데 망할려면 같이 눈이 머는 것입니다. 

경건한 체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님이 얼마나 혹독하게 비판을 하셨는가를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혹독한 그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거품을 거두어낸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거품 속에서 안주하고 안일하게 사는 자들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 6:1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치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피상적으로 생각을 해서 하나님이 너무하시지 않았느냐하는 사람들도 있을까 걱정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거품의 위험성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주시는 모범적인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행위는 선전용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전용신앙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신앙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거품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속여서 지은 건물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늘 마음으로부터 이런 유혹을 받습니다. 덜 하고도 많이 한것처럼 보일 수는 없을까? 적게 돈을 들이고도 많이 돈을 들인 건물처럼 보이게 할 수는 없을까? 실재와는 다르게 부풀리려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피흘리기까지 이런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피흘리기까지 이런 거품신앙의 유혹을 싸워서 이겨야 할줄로 믿습니다. 주님은 거품신앙, 거품인격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작아도 실재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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