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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자의 선택 (신 30: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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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자의 선택 (신 30:15-20)


사람들은 누구나 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학교를 선택해야 하고, 친구를 선택해야 하고, 직업을 선택해야 하고, 배우자를 선택해야 하고, 종교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그 사람이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 때부터 사탄의 꼬임에 빠져 선택의 실수를 계속했습니다. 마귀의 전략은 언제나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성공의 길로 알고 선택했는데 그 것이 성공이 아닌 실패의 길이었습니다. 행복의 길로 알고 선택했는데 그만 그 길이 불행의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선택의 안내서를 주셨습니다. 그 안내서가 곧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의 소중함을 깊이 깨달았던 링컨 대통령은 말하기를“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 중 하나는 성경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인간들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께서 본문 19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하셨습니다.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가 다 우리의 선택여하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이 중요합니다. 

一. 생명과 복을 선택한 사람의 삶은 무엇일까요?

1. 생명과 복을 선택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본문 20절에“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이는 권세나 명예를 사랑합니다. 어떤 이는 향락을 사랑합니다. 어떤 이는 돈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의 업적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을 유일한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그 사람의 인격은 추한 세상만큼이나 추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의 발자취 또한 모래 위에 남긴 발자취처럼 허무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은 남다른 지혜와 권세와 부귀를 한손에 쥐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그러한 솔로몬이 훗날 깊이 후회하며 전도서 1장 2절과 2장 11절에 밝히기를“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한 구절에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그가 살아온 삶이 후회스럽다는 뜻입니다. 

반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삶의 목적으로 살아간 사람들은 그의 인격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젖어 푸른 하늘처럼 맑고 깨끗할 것입니다. 그의 발자취는 창공의 빛처럼 밝게 빛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보람된 삶의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후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됩니다.

심리학자인“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삶의 방식을 두 가지로 보았습니다. 소유 추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존재 추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 소유추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쫒아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성공이며 행복으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삶은 아름답지 못하며 반드시때늦은 후회를 남기게 됩니다. 세상 열락을 쫒아 타락한 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으로 소돔과 고모라성이 불탈 때 롯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과 물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던 사울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자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욕에 눈이 어두워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은 30에 팔아넘겼던 예수님의 제자 가롯유다 역시 저주의 죽음인 자살로 끝을 맺었습니다. 

둘째, 존재 추구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춰서 살아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까지 버리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을 사랑하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축복을 자자손손 받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다윗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에 맞춰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목동 다윗을 높이셔서 나라의 가장 위대한 대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에 일생을 바친 슈바이처와 프랑스의 작가 카뮈는 1957년 같은 해에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슈바이처는 평화상을, 카뮈는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 다 상금으로 10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카뮈는 그 상금으로 파리 근교에 멋진 별장과 고급 승용차를 구입했습니다. 카뮈는 1960년 1월 4일 그 고급 승용차를 타고 별장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슈바이처는 그 상금으로 아프리카에 랑바레네 병원을 지었고, 그 병원에서 아프리카의 불쌍한 사람들을 치료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카뮈라는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하면 내게 유익이 되고, 내게 평안과 즐거움을 주며, 나를 영화롭게 할까 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반면 슈바이처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까 하는 것이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본문 20절에“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하셨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본문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6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그 길”은 무엇이며,“명령”은 무엇이며,“규례”는 무엇이며,“법도”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다 같은 동의어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길, 명령, 규례, 법도 등으로 거듭 네 번씩이나 어휘를 달리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주의 길에서 벗어나 축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만 영원한 생명이 있고 참된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축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장 6절~8절에 말씀하시기를“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모든 축복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되 선별적인 것이 아닌“그 모든 길로 행하며”(16절)라고 하셨습니다.“그 모든 길로”행한다는 것은, 내 생각이나, 내 상식이나, 내 형편에 맞춰 어떤 것은 행하고, 어떤 것은 제외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듣고 싶은 말씀이 있는가 하면,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내 귀에 듣기 좋은 말씀이 있는가 하면 듣기는 싫지만 꼭 들어야할 말씀도 있다는 것입니다. 듣기에 좋은 말씀이라면 흔히 세상적 축복에 관한 말씀일 것입니다. 들어야 할 말씀은 죄악에 대한 지적과 책망이나 헌신, 희생 등에 대한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천군천사가 찬양하는 부활의 영광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영광스러운 하늘보좌에서 추한 세상에 까지 낮아지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희생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부활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십자가가 없으면 영광도 없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에 맞는 음식이 있는가 하면, 입에는 맞지 않지만 몸을 생각하여 먹어야 하는 음식도 있습니다. 내 입에 맞는 음식만 먹는다면 그것은 편식하는 것으로 영양결핍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그 모든 길로”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생명과 복을 선택한 사람의 삶은 하나님께 부종하는 것입니다. 

본문 20절에“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의지한다는 말씀은“굳게 연합하다.”“착 달라붙다.”“밀접히 결합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탄의 집요한 유혹은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나무 줄기와 가지의 비유, 양과 목자의 비유 등 모든 비유는 하나님과 떨어지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서 잘려나가면 곧 마릅니다. 양이 목자와 멀어지면 맹수의 먹이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굳게 연합하라.”“착 달라붙어라.”“밀접히 결합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멀리서 바라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 2절에 기록하기를“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깨닫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전능자이십니다. 평강의 왕이십니다. 생명과 복의 근원이십니다. 이사야 9장 6절에 말씀하시기를“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하여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밝히시기를“예수(천국은)는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는 내가 소유한 얼마의 재산에 견줄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육신의 생명에 비교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굳게 연합했습니다.”“착 달라붙어 있었습니다.”“밀접히 결합했습니다.”즉 부종했던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 가족이 아닌 이상 너무 가까워지면 반드시 실망스러운 허물과 실수가 보이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면 변함없는 친분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끝없는 깨달음과 감격과 감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9장 6절에“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二. 생명과 복을 선택한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길을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며 살아가려면 많은 절제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노력이 필요합니다. 땀 흘림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모진 핍박도 견디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1. 번성하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본문 16절에“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번성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후손이 번성하고, 사업이 번성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러한 축복된 자리로 인도하시고자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들에게 당부하시기를, 그 모든 길을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 하는 일에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16절하반절에“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하셨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만 됩니다.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시편 127편 1절~2절에“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3. 후손이 잘되리라 하셨습니다. 

본문인 신명기 30장 19절~20절에“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하셨습니다.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가운데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단 한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신앙의 유산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1장 18절~21절에“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열조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의 장구함 같으리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타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떠한 난관이 닥쳐와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길 지혜를 주십니다. 이러한 사람은 반드시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유산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조부의 사촌 되시는 윤치호 선생이 미국 유학중에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고“야! 이것이야.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예수님만이 살 길이요, 예수님 안이 천국이구나.”라고 확신하고, 집에 돌아와서 안국동의 윤씨가문 전체를 전도해서 그 가문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사람, 윤보선 대통령의 조부만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윤보선 대통령의 조부는 8남매의 자녀를 두었는데, 특별히 그 막내딸의 믿음이 좋았다고 합니다. 온 집안이 다 예수를 믿어 천국에 가는데 자기 아버지만 지옥에 갈 것을 생각하니 막내딸은 마음이 아파서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끝까지 믿지 않으니 단식 투쟁에 들어갔습니다. 금식하면서“하나님, 우리 아버지 영혼을 구원해 주세요. 아버지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예수님을 알아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윤보선 대통령의 할아버지는 딸이 그렇게 금식을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흥, 며칠 굶으면 안 먹고 견디나 보자.” 그런데 끝까지 먹지 않으면서 “아버지, 아버지가 예수를 믿지 않으면 저는 이대로 죽습니다. 저는 죽어도 괜찮아요. 천국에 가요. 그러나 아버지가 걱정이에요. 제가 죽더라도 예수를 믿으셔야 합니다.”하면서 끝까지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윤 대통령의 할아버지가 제사상을 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제사상 앞에서 울면서 하는 말이“조상님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것이 마지막 제사상이니 마음껏 드십시오. 앞으로는 제사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제사보다 더 귀하고 의미 있는 추도예배가 있는데 그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계속해서“조상님들, 죄송합니다. 많이많이 드십시오. 앞으로는 없습니다. 앞으로는 없습니다.”라고 하더니“제 딸이 제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딸 때문에 할 수 없이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제사를 지내고 교회에 나가더니 은혜를 받아서 아주 열심히 믿었습니다. 부자이니까 매주 소 한 마리를 잡아서 온 교인들에게 다 다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흔아홉 칸짜리 집에 교인들을 초대해서 융숭하게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이 되면 할아버지가 대장이 되어 온 식구와 함께 교회에 가서 성가대원으로 교사로, 마치 교회를 섬기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렇게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집안에서 서울대학교 총장, 농림부 장관, 대통령 등, 한국의 별들이 부지기수로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그 가문은 대단한 가문입니다. 또한 모두들 효성이 지극해서 신혼여행 갈 때도 아버지를 모시고 갈 정도라고 합니다. 

한 학자가“한국의 큰 재벌 중에는 명예와 재물을 3대 이상으로 물려준 가문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옛날 양반들이 다 몰락해서 명예와 재물을 지금까지 이어가는 가문은 한국에 오직 두 집안뿐인데, 그중 한집안이 윤보선 대통령 집안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선택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람의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반면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도록 하셨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은 자유이지만, 영생은 불신자의 자유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는 선택의 결과입니다. 

순종과 불순종은 사람의 자유이지만, 축복은 내 마음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은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바른 선택의 열매입니다. 
기도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기적의 응답은 사람의 자유에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무릎을 굻고 간구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선택은 누구나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결과인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을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바꿀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이 중요합니다. 생명과 사망, 저주와 축복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여 결정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권면 하셨습니다. 

“생명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여 섬기라”하셨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라”하셨습니다. 

이 복된 하나님의 권면이 우리들의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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