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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을 지켜라 (말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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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을 지켜라 (말 2:1-9)


앤서드 멜로이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가게 주인이 자기 스승에게 찾아가서는, 맞은편에 큰 연쇄점이 생겨서 자기는 망하게 생겼다고 했습니다. 자기 가정이 10년 동안 지켜 온 가게를 잃어버린다면 자기는 다른 기술도 없으니 파멸할 것이라고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가게 주인의 스승은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그 연쇄점 주인을 두려워한다면, 그를 증오하게 될 것이고 그 증오가 자네가 파멸하는 원인이 될 걸세.”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매일 아침 가게 앞에 나가서 자네 가게를 축복하고, 돌아서서 길 건너 연쇄점도 축복하게.”
“아니, 경쟁자이자 파괴자를 축복하라고요?”
“자네가 그에게 축복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네에게 좋게 되돌아올 걸세. 자네가 그에게 바라는 악은 무엇이든 자네를 멸망시킬 걸세.”

여섯 달 후에 그 식료품 가게 주인은 자기 스승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걱정과 근심만 했다면 정말로 가게를 닫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대로 했더니 지금은 그 연쇄점까지 맡고 있으며 어느 때보다도 경기가 좋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악의는 자신을 파괴하고 이웃을 파괴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은 서로를 복된 삶으로 인도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복을 주시길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탄식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기복 신앙에 빠져있다고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그렇다면 마땅히 우리가 원하고 따를 길은 당연히 생명과 복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가 복을 누리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복을 누리는 것은 순종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니까 복을 주시기를 우리가 간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길은 단지 복을 위한 길만이 아닙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저주와 사망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길은 당연히 둘 중 하나입니다. 입으로는 복을 받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아무리 복 받기를 원한다고 해도 결과는 저주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자 너희 앞에 복과 저주라고 하는 두 길이 있다. 복 받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따라 순종해라.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질서를 지켜라. 하지만 그 질서를 따르지 않고 불순종한다면 그 결과는 사망과 저주다.”
거기에 다른 말씀이 없습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입니다. 생명과 복을 고르기를 원한다면 순종의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목자를 따르는 양의 길입니다. 양이 생명을 얻고 풍성한 꼴을 얻으며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목자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양은 그저 목자가 이끄는 대로 그 뒤를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목자의 인도를 따르지 않게 되면 그 양은 잃은 양이 되고 맙니다. 잃은 양은 그 자체로 죽은 목숨입니다. 잠시는 자유로울지 몰라도 양은 스스로는 먹이를 구하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방어할 재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 음성을 따르게 되면 더 이상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목자가 자기 목숨을 걸고 양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기로 작정하셨다면 이런 말씀을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그 반대로 긍정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만일 듣고 순종하며 마음에 두어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면 내가 너희에게 복을 내려 너희 삶을 복되게 하리라 내가 이미 복되게 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라.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칭찬할 것이요 거룩한 향료를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들림을 받으리라.”
그러니까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단순히 저들을 속상해하면서 야단치는 가운데 “이건 다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도 않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괜히 딴 소리 하지 말아라. 아주 꼴좋게 됐구나” 라고 하시면서 등을 돌려버리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짜 마음은 처음부터도 그랬지만 우리를 칭찬도 해주고 싶고 복도 주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니까 너무 속상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온 우주 만물을 다 만드시고 난 다음 제일 나중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전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신 것은 곧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을 만드신 다음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시면서 “참으로 좋다. 난 너무 기뻐, 너희를 보고만 있어도 내 마음이 정말 좋구나”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느끼고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보시는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면서 이런저런 말씀을 조근조근 나누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겁니다. 나는 한참 세상에 빠져있고 다른데 눈길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나만 보고 계십니다. 

8일 광주 북부경찰서에 따르면 한모(44.여)씨는 두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지난 5일 오후 5시 45분께 광주 북구 문흥동 인도를 걷고 있었습니다. 잠시 한눈을 판 한씨는 문득 아들이 생각났고 바로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아들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한씨의 눈에 바로 옆 도로를 건너고 있던 아들이 보였고, 이어 어린 아들을 보지 못하고 달려오는 봉고 트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크게 놀란 한씨는 아들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도로에 뛰어들어 아들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습니다. 

트럭을 운전하던 이모(39)씨는 갑작스럽게 뛰어든 한씨를 보고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한씨와 충돌하고 말았습니다. 이씨는 119에 전화를 걸어 한씨를 병원으로 옮겼고 한씨는 다행히 전치 2주의 가벼운 부상에 그쳤습니다. 경찰 관계자는 “사고를 조사하다 한씨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또 한 번 놀랐다”며 “어린 아들이나 산모 모두 무사해 다행이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생각지 않고 차도로 뛰어들어 아이를 온 몸으로 감싸 안는 그 마음이 느껴지시는가요? 그렇게 아이를 사랑하는데도 엄마의 눈길이 순간적으로 아이에게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번도 내게서 눈을 떼신 적이 없으십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러나 그런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가 너무도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하나님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엉뚱한 길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를 보면서 너무도 마음이 아파하십니다. 그래 견디다 못해 “나 좀 봐줄 수 없니 나는 정말 속상하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벌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고 하시는 것은 우리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의 눈물의 고백입니다. 이 주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에 담아 주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주신 우리들에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데 그 약속은 생명과 평강의 약속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우리가 지키게 될 때 우리에게 생명이 있고 평강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 생명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구원을 받은 하늘나라 백성이 되고 성도가 되었다는 것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오히려 생명의 풍성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풍족하게 누리는 삶을 살게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무능력한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양도 풍성히 누리가 위해서는 최소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양들과 함께 어울리며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이르러 스스로 풀을 뜯고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수고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땀 흘리며 수고하지 않고는 먹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땀이 날 정도로 수고하라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을 따려고는 않고 그저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그렇게 오늘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평강도 마찬가지입니다. 평강이라는 것은 잘못된 관계가 바로 잡힐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 그 어떤 불안과 두려움과 염려도 없어야 하는데 과연 우리는 그렇습니까? 그럼 어떻게 우리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까? 그건 하나님께 손을 내밀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 끙끙 앓고 있지 말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나 힘들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웁니다. 재워 달라고 울고 쌌다고 울고 불편하다고 울고 배고프다고 웁니다. 그러면 엄마가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해줍니다. 자장가를 불러주기도 하고 기저귀를 갈아주기도 하고 목욕도 시키고 젖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단잠에 빠져들기도 하고 엄마 품에 안겨 방끗방끗합니다. 이제는 편해졌다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울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알려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지금까지 받지 못한 것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도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은데 이런 저런 어려움이 있고 이런 저런 불편이 있다고 그러므로 말씀드리십시오. 어떤 때는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먼저 만들어주실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우리가 우리의 사정을 아뢸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는가를 보고 싶어서입니다. 
자 보세요.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그렇다면 풍성한 생명을 주시고 평강을 주시는데 왜 우리들에게 힘든 일들이 생기는 겁니까? 자 요셉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래 봤자 노예 아닙니까?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이제 조금 출세해서 가정 총무까지 되었는데 그런데 왜 그때 시험이 옵니까? 그럼 시험도 없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그 시험을 이겼으면 상급이 있어야 되는데 오히려 감옥에 갇히지 않습니까?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래 봤자 감옥에 갇힌 죄수일 뿐입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됐습니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가 하루아침에 총리대신이 됩니다. 그것도 남의 나라입니다. 당시 온 세계를 주름잡던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단지 옛날이야기로만 들으려고 합니까? 아니요 이런 일이 크고 작기는 하지만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요셉에게 아픔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요셉에게도 이렇게 되기까지는 13년이라는 아픔의 세월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그냥 주저앉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주저앉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포기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힘든 이유는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냐? 이런 경우에 뭐를 어떻게 할 수 있냐?”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래요 도무지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도무지 길이 없다는 것 잘 압니다. 한데 정말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이 알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끝까지 믿는 것, 끝까지 따르는 것,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맡기십시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결책을 다 주셨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지요. 운동을 해도요 코치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처음에는 안 해 본 거라서 코치 말대로 따른다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령을 부리면 결코 되는 일이 없습니다. 되는 것 같지만 더 이상 발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 죽기 살기로 코치의 말을 따르면 처음에는 힘들어도 어느 단계부터는 아주 편안해집니다. 그러면서 문득 돌이켜 보면 아니 저게 왜 그렇게도 힘들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이 꼭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최우선입니다. 자동차를 그냥 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먼저 필기시험에 합격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공부해야죠. 어떤 할머니께서 900번 이상 시험을 봐서 합격한 이야기가 한때 화제가 됐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요 그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더니 결국 시험에 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 실기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기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운전 연습을 해야 되지를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실기 시험을 합격해도 그 다음에는 또 도로 연수가 필요하지를 않습니까?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합니까? 결국은 안전운행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마디로 사고를 내지 않도록 위해서입니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나잖습니까? 그러면 운전을 포기합니까? 그러니까 지금 운전하시는 분들 한 번도 사고 낸 적이 없으셨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참된 생명과 평강을 누릴 수 있도록 이런 연단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짜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평강을 누릴 수 있는지를 바로 알 때 올바른 인격적인 교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우리는 생명과 평강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답답하면 답답하다고 말씀드리세요. 힘들면 힘들다고 하세요. 도와 달라고요. 무서우면 무섭다고 하세요. 도망치지 마세요. 도망치면요 지금은 안전한 것 같은데 그래서 편안한 것 같은데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죽어요. 죽는데 영원히 죽어요. 시험을 보는데요 너무 긴장하면 막 설사도 하고 몸살도 생기고 춥고 떨리고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그런다고 해서 시험장에 안 가면 어떻게 됩니까? 시험을 안 보면 그건 볼 것 없이 불합격이죠. 떨어질까 봐 시험을 안 봅니까? 그러면 합격할 가능성은 그 어디에도 없는 거죠.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예수를 믿기로 했으면 더 좋은 일이 있어야 되는데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만사형통 아닌가요? 하지만 그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주시고 싶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니 모든 해결책이 주님께만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생명과 평강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문제가 생겨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나는 그저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우리가 자동차 보험을 듭니다. 그러면 사고가 나도 보험회사에서 다 해결합니다. 내가 해결하겠다고 쫓아다닐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해결하겠다고 몸부림칠 이유도 없어요. 아니 처음부터 사고가 없게 해 주시면 안 되냐고요? 하지만 사고를 누가 냈습니까? 하나님이 사고를 만드셨나요? 사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문제는 내게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해서 그렇지 하나님은 미리 다 사인을 보내주셨습니다. 내비게이션이 미리 알려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음에 담아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강을 풍성하게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의 사해는 해면보다 398m나 낮은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소금호수입니다. 이곳은 연중 기온이 섭씨 40도이고 매일 약 500만 톤의 물이 이 사해로 들어오지만 밖으로 흘러 나가지 않습니다. 따라서 보통 바다보다 염도가 7-8배가량 높고 물고기조차 살 수 없는 바다, 이름하여 “죽음의 바다”라 부릅니다.
그러나 사해에는 염분만 많은 것이 아니라 각종 광물질이 풍부합니다. 칼슘, 마그네슘, 포타슘, 황 등…….그래서 오늘날은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보물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또한 주변에는 피부병, 류머티즘 등의 치료에 탁월한 효능이 있는 온천이 많습니다. 요즈음, 미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 진흙까지 파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으로 좋은 화장품까지 만들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곳을 사해라 부르지 않고 “염해”라 부릅니다. 죽음의 바다가 아닌 소금이 있는 바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죄악과 더러움으로 오염된 죽음의 땅에 오셔서 회복시키고 복된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그 어떤 고통이나 시험되는 일도 사실은 시험을 가장한 하나님의 복주심이요 은혜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환난과 고통은 지금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빚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토기장이가 주물럭주물럭하며 그릇을 만들어가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작품으로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이냐고 하십니까? 

가까이에 일석 도예라고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이 있습니다. 철저히 손으로 만듭니다. 보통 우리가 흔히 보는 반듯한 그릇들도 있고 이리저리 우그러지고 찌그러진 그릇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그러지고 찌그러져 보이는 것이 진짜 비싼 것 아십니까? 하나님이 마찬가지로 우리를 명품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평안이 그저 싸구려가 아닌 진짜 명품으로서 영원한 생명과 평안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림이 없는 생명과 평안을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더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더 놀랍고 신나는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의 시간들이 우리들 앞에 항상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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