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삭개오처럼 (눅 19:1-10)

  • 잡초 잡초
  • 321
  • 0

첨부 1


삭개오처럼 (눅 19:1-10)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다. 따라서 세리들은 로마정부의 권세를 등에 업고, 자기들의 재량대로 가장 악랄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로마정부에 일정한 세액을 바치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착취하여 사복을 채우고, 부정축재를 했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매국노와 죄인으로 취급하여 상종을 하지 않았다.(눅5:30) 사람들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과 다툴 때도 “세리 같은 놈”이라고 욕을 했다.

성경에는 세리를 말할 때 “세리와 죄인”이라는 표현을 함께 쓰기도 했다.(막2:15-16) 

따라서 당시 여리고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 역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증오의 대상이 었고,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으며, 항상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등에 지고 살아야 했다. 

본문에 삭개오를 가리켜 두 가지로 말한다. 

①세리장이다. 
유대나라가 로마의 속국이던 그 시절 유대인으로 세리장의 위치에 이르렀다는 것은 큰 출세였다. 

②부자이다. 
그는 윤리나 도덕, 양심을 저버리고 오직 실리를 따라 사는 사람이었다. 삭개오라는 이름은 “순결하다” “정결하다” “결백하다”라는 뜻이지만, 사실 그는 그의 이름과는 정 반대로 살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처럼 많이 가졌으나 생각 외로 행복하지 못했다. 흔히 사람들은 권력과 부를 거머쥐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세상에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은 모두 행복한가? 솔로몬을 보라. 삭개오도 그래서 예수님을 찾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니라”고 했다. 시내를 관통하여 지나가셨다는 말이다. 삭개오를 만나주시기 위해서였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싶었다. 즉 “예수께서 누구인지?”라는 뜻이다. 예수님에 대한 영적인 호기심, 궁금증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중요한 것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많이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소문이 아닌 자신이 직접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소문으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데는 두 가지 큰 장애가 있었다. 

①신체적인 약점 곧, 키가 작은 것이었다. 
이 문제는 자기의 문제이다. 

②외적인 장애 즉 많은 사람들로 인한 환경적인 장애였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문제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데도 이처럼 두 가지 장애가 있다. 하나는 자기에게 있고,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있다. 

내 믿음이 부족하고, 기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고, 열심히 부족하고,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싼다. 교회에 오면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만 보인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때로는 불리한 것이 변하여 유리하게 되고, 화가 변하여 복이 될 때도 있다. 사람이 가진 핸디캡이 오히려 영적으로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사회적인 신분이 낮기 때문에 주님을 더욱 찾게 되고, 가난하기 때문에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된다. 병들었기 때문에 주님께 더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삭개오는 이 때 한 가지 결심을 해야 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없으니 그냥 가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가 올지 알 수 없으니 기어코 예수님을 만나보고 가자” 하는 것이었다. 삭개오는 후자를 택했다.

그때 삭개오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돌 무화과나무였다. 하나님은 낙심하지 않고, 길을 찾고 찾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하신다.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나무를 보고, 거기에 올라갈 생각을 한 사람은 삭개오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즉시 그 나무로 달려갔다. 그가 달려간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①다른 사람이 먼저 올라가 그 자리를 빼앗길까? 염려해서이다. 
②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가 날쌔게 그 나무에 올라간 것은 자존심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나이로 보거나, 지위로 보거나 그가 돌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간다는 것은 자신의 위신과 체면을 모두 포기한 일이다. 
나무 위에 올라가는 일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잘못하면 낙상할 수도 있다.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가니 이제는 자기의 키가 제일 컸다.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올라가 있는 나무 맞은편에 오셔서 그를 쳐다보셨다. 
예수님은 나무 위를 쳐다보시며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왜냐하면 내가 오늘 너의 집에서 하룻밤 유숙하고 가야하겠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자신을 초청하지도 않았지만, 자청하여 그의 집의 손님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며, 자기 집에서 유숙하시겠다고 하시자 감개무량했다. 

삭개오는 그에게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다. 지체하지 않고, 급히 내려왔다. 기회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만 원했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만을 원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집에서 유숙하시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이처럼 갈망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솔로몬을 보라.

삭개오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알았다 그러나 “주여!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만일 다른 사람의 재산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전에는 삭개오가 재물을 의지하고, 모든 행복과 평안이 재물에 있는 줄로 알고 살았으나, 이제는 모든 가치관이 달라졌다. 
지금부터는 재물을 구원운동에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고백을 들으시고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다.”고 말씀 하셨다. 

예수님은 그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 새사람이 된다. 삶의 의미를 바로 찾게 된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