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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패러독스 (마 16: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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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패러독스 (마 16:24-27)

 
내 용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나름대로 삶의 가치관이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가치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여러분이 지금 바라는 희망 “내 평생소원 이것 뿐”을 뭐냐고 물으면 여기 계신 모든 교우님들은 각기 다른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국가도 민족도 소원이 항상 있습니다. 지금은 온 세계 어느 나라나 똑같이 원하는 일이 하나 생긴 것 같습니다. 바로 G8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달에 G20이 한국에서 모이는데 거기에 들지 못한 나라들은 지금 ‘우리나라는 언제 G20이 될까?’ 소원합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그렇게 소원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G20이 됐는데 10년 안에 G8국가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될 거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소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인데 그것을 이루지 못한 것을 인정하는 것을 얼마 전 김정일이 말한 것을 신문에서 봤습니다. 개인적 소원을 성취시킨 사람이 성경에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농사를 지어서 먹을 양식을 곡간에 많이 쌓아 두었다고 했습니다. 한해농사를 지었는데 여러 해 먹을 것이 생겼기 때문에 그는 만족스럽게 말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먹을 양식을 쌓아두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 쌓아둔 물건이 뉘 것이 되겠느냐?” 결국 헛된 삶의 가치관이란 교훈을 주기 위한 설교 말씀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가치 하나를 말한다면 오늘 성경말씀대로 판단이 됩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최고의 가치는 생명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정의를 내린다면 오늘 이 예배에 참석하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천하보다도 귀한 선물을 지금 모두 소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신기하고 감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삶의 가치관은 아주 훌륭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목표로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이 ‘생명’이라는 단어는 신구약 성경에 약 300번 나올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이 되어 있습니다. 이 오늘 말씀도 똑같은 문맥으로 복음서 여기저기에 6번 가량 반복 기록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천하보다도 귀하게 정의하신 이 생명의 문제를 오늘날의 인간들은 모두 헐값에 팔아넘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도들은 돈 몇 푼을 빼앗기 위해서 생명을 죽입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1년에 강도 살인 피해자는 몇 만 명씩 나옵니다. 요즘은 사람 죽여주는 사업까지 등장했습니다. 청부 살인업자가 있어서 한사람 죽여주는데 얼마 돈 내라고 거래합니다. 이 살인이나 자살 같은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인데 내 마음대로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어느 나라든지 문명국은 식품, 약품, 과학기구를 철저하게 검증합니다. 조금이라도 생명에 해를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잘못해서 생명을 대량으로 해치는 일을 막기 위한 제도적 수단입니다. 생명사랑입니다. 문명국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과학이라든가 풍성한 경제력이라든가 학문이라든가 모두다 생명보존에 도움을 주어야지 해를 끼치면 그 자체가 인류의 적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 모든 인류 과학의 노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연장할 수 있을까? 또 생명의 건강 유지를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그래서 줄기세포, 유전자 공학이 다 나온 겁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상당한 효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류는 인류의 삶과 생활을 향상시킨 몇 번의 변화가 있어왔습니다. 제1변화가 농업 혁명입니다. 야생의 들판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면서 열매를 따먹고 눈에 띄는 짐승을 잡아서 생명을 유지하던 우리 인간들이 한 곳에 모여서 정착 생활을 하고 농사를 지어서 안정된 식량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생긴 것을 말합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식량 안정의 행복을 누리면서 농업 혁명을 일으켜서 행복하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변화는 산업 혁명입니다.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만들어냈습니다. 안경이 필요하면 안경을 만들어내고 마이크가 필요하면 마이크를 만들어내고 자동차가 필요하면 자동차를 만들어냈습니다. 지금은 너무 많이 만들어내서 산업공해가 될 만큼 물건이 온 세상에 산더미같이 쌓여있습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다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제 3변화는 정보화 혁명이 이루어졌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내가 필요로 하는 세계 모든 정보를 내 책상에서 다 얻어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 예배드리는 것을 전 세계에서 실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내일 여러분이 파리로 가신다면 내 책상에 앉아서 내일 파리 기후가 어떤지 거기 모든 상황의 정보를 얻고 미리 준비해서 가실 수가 있습니다. 요즘 스마트폰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성경책을 안 들고 다닙니다. 스마트폰에 성경 66권, 찬송가 600곡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와서 켜면 다 나옵니다. 이제 앞으로 그 어려운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시대가 옵니다. 통역폰이 나오는데 어느 나라를 가든지 말하면 다 통역해 줍니다. 얼마 있으면 나올 겁니다. 이제는 기계 말을 안 들으면 살지 못합니다. 이렇게 정보화 혁명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또 올 혁명이 뭔가요? 그것이 바로 생명 혁명 시대입니다. 인간 생명의 신비를 과학적으로 밝혀서 건강하게 오랫동안 넉넉히 살 수 있는 문제해결입니다. 저는 신앙적으로 이것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열어주신 하나의 선물이 될 것이라고 믿는데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기독교는 어느 시대 세계관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마음을 열어놓고 살아라.” 말했습니다. 지구가 돈다고 말하는 갈릴레오를 하나님께 대한 불경죄라고 데려다가 호통을 치는 죄를 이제 다시는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열어놓고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열어주신 선물이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바라보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열려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여기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생명은 천하보다도 귀하게 정의하셨는데 그 생명을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일종의 생명 패러독스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런 모순된 말씀을 하셨는가? 죽으란 말인가, 살라는 말인가 잘 분간이 안 됩니다. 여기 오늘 성경 말씀에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시고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또 다른 곳에 가보면 “이 귀한 생명을 죽도록 충성하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뭡니까?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최대의 고귀한 생명이라는 선물이 주어졌는데 이 세상에는 불행하게도 그러한 천하보다 귀한 고귀한 남의 생명을 무참히 빼앗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령의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악령의 활동을 이 세상에서 정지시키는 일은 다른 생명 구하는 일에 내 생명을 던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육신의 죽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생으로 연결되는 내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영생의 진리를 위해 내 생명을 던지는 일에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일이라서 예수님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말씀하시며 자신이 먼저 인류의 생명 구하기에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던져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패러독스입니다. 

‘생명이 살아있다’는 우리 생명을 한번 분석해볼 때 우리 인간이 이 목숨 하나를 지상에 존재시키기 위해서 투쟁을 한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동물들도 자기 생명 보존을 위해서 얼마나 지혜롭게 행동하고 얼마나 극한투쟁을 하는지 인간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동물의 세계는 아주 분명한 것이 나타납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을 희생시킵니다. 자기 새끼일지라도 극한 상황이 오면 물어 죽여 버립니다. 자기가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계에서도 절대 양보를 안 하는 것이 먹이를 먹을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 제비들이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시골 농가에 집집마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와서 집을 짓고 처마에서 새끼를 번식시켜서 날아올 때는 두 마리가 왔지만 돌아갈 때는 어느 집이나 똑같이 7~10마리가 되어서 갑니다. 그 집을 짓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집은 지은 다음에는 반드시 그렇게 새끼를 번식시켜서 나가는데 동물들이 인간보다도 우수한 능력이 하나가 주어져있습니다. 바로 육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지진 지역이 아니라서 그런 일이 없지만 지진 지역에 가면 지진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동물들은 한 달 전부터 지진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움직입니다. 유난히 개미들이 집안으로 많이 기어들어오고 쥐들이 전부 거리로 노출됩니다. 뱀들이 전부 숲속에서 기어 나와서 어디론가 가기 위해서 꿈틀거립니다. 이런 동물들의 움직임은 지진 예고입니다. 제비는 장마철을 미리 압니다. 긴 장마철이 올 것을 예상하면 새끼에 절반 정도는 물어서 집어던져 죽여 버립니다. 

집어던진 새끼들을 꾸물거리는 것을 사람들이 ‘이게 왜 떨어졌나?’ 하고 집어서 다시 제비의 집에다 넣어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반드시 어미가 물어서 무자비하게 땅에 떨어뜨립니다. 왜 그러는가? 하루에도 제비 한 쌍은 수백 마리의 곤충을 잡아야 식구가 살아갈 수 있는데 장마철에 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먹는 입을 절반 이상으로 줄이기 위해서 자기 엄마, 아빠가 살아남기 위해서 새끼들을 미리 죽여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동물의 세계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한 생명 원리는 이러한 동물적 생명 원칙에 반대되는 생존 원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이 지금 이렇게 어지러워지는 것은 바로 온 세상 사람들, 온 나라의 국가 이념이 동물적 생존 원칙을 위해서 인간의 생존 원칙을 파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역사적으로 강대국들은 약소국가들을 침략했습니다. 무수히 죽였습니다. 자신과 자국의 동물적 생존을 위해서 다른 생명을 소멸시키는, 물리적인 힘을 조직적으로 사용하면서 인종청소 작업을 끝없이 했던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것이 중남미 전쟁의 역사이고 알렉산더요 칭기즈칸이요 히틀러였습니다. 

이런 문제에 있어서 독일도 영국도 일본도 스페인, 몽골, 소련 수많은 강대국들은 절대로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생명 살리기에 내 생명을 희생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생명 패러독스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너무나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을 위해서 내 생명을 던져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평생 아벨의 생명을 죽인 가인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가장 큰 비극과 불행은 내 생명을 위한 다른 생명 죽이기였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불행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 결단이 곧 십자가에서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이 귀한 생명을 희생시켜야 되는 생명의 패러독스입니다. 오늘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러한 진리를 따르는 것만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동물적 생존 원칙에서 벗어나 인간적 생존 원칙에서 사는 길이다.”
세상의 생명 원칙을 보면 한쪽을 죽여야 한쪽이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생명이 생기기까지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생명이 내 생명으로 연결이 되어 또 다른 생명을 만들어내는 탯줄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뱃속에서 이 탯줄 연결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아기는 뱃속에서 죽습니다. 그 탯줄은 생명과 생명을 연결하는 생명줄입니다. 그런데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그 중요한 생명줄을 무자비하게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한쪽을 끊음으로 한쪽을 자생능력을 갖게 하는 작업을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생명 관계를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한쪽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예수의 삶을 선택합니다. 

이것이 인생의 가치관이기 때문에 이대로 사는데 만약 이렇게 살아가는데 내 생명에 희생이 필요할 때가 온다면 나는 그 길을 따르고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세례의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동방정교의 신자들은 세례 받는 즉시 자기 생일을 없애버립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것은 헛수고이다. 새로운 생명 탄생의 의미로 이제 나는 세상에 인간으로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세례 일자를 자기 탄생일로 정하고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나와 같이 되려는 자는,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하나님과 같이 영원히 영생을 누리려는 자는 나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생명 살리기에 내 생명 던지는 일을 위해서 살라.” 우리 사람은 누구든지 이런 생각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십자가가 무거운가? 너무 무겁다.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 나는 이 고난스러운 십자가를 평생 지고 이렇게 고난스럽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렇게 안하고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너무 십자가가 무겁다.’ 오늘 여기 보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주 절친한 친구 목사님은 나만 보면 약간의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늘 합니다. “하나님은 공평치 않으시다.” “뭐가?” “왜 하나님이 이 목사님은 그렇게 사랑하시고 난 이 모양이냐?” “어떤 모양인데?” “나는 이 목사처럼 한 달만 살고 천국 가도 좋겠다.” 이렇게 늘 비아냥스럽게 말을 합니다. 저는 그 친구가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잘 압니다. 제가 목회하는 교회는 교인이 많고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는 교인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자꾸만 그럽니다. 

그런데 저는 그 친구와 동유럽 여행을 둘이서만 한 적이 있습니다. 기차를 타고 밤새도록 침대에 누워서 이야기하며 갔던 시간이 있었는데 그렇게 되니까 가까워졌습니다. 출생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과정과 현실을 모르고 있던 분야를 서로 이야기하면서 가니 여행이 지루하지 않고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서 다 알았습니다. 제가 그 친구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 항상 나를 부러워했지? 당신이 가지고 있는 조건, 내가 가지고 있는 조건 다 오픈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당신 주변에 당신이 이루고 있는 모든 조건과 내 것과 바꾸자. 

우리가 아마 여기서 약속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바꾸어 주실 수 있을 것이다. 바꾸겠느냐? 결정해라.” 그랬더니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아내까지 포함하는 거냐?” “그것도 당신이 결정해라.”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게 바꾼다고 바꿔지겠느냐? 생긴 대로 살자.” “바꾸기 싫지? 왜?” 따져보니까 자기가 좋은 게 훨씬 더 많거든요? “나한테 이제 비아냥거리지도 마. 당신이 훨씬 더 좋아. 객관성 있게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교인이 좀 더 많다는 그 조건 하나 때문에 나한테 자꾸 그랬지? 훨씬 좋지? 못 바꾸겠지?”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적당한 길을 인도해주십니다. 지금은 잘 몰라도 영생의 생명을 얻은 후에는 그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보세요.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잘 안보입니다.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그 때 가서 밝히 알리라. 내가 이런 과정에서 이렇게 사는 것, 내 몫의 십자가, 누구에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내 이렇게 다소 고난스럽게 살았던 것은 이것을 벗어날 때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축복에서 벗어나게 될지 모르는 위험이다. 가장 선하고 좋은 길을 내게 주신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받기 원하면서 살아가는데 언제 사랑이 뜨겁고 언제 식어졌는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주는 것이 아까워진 사람은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사랑이 뜨거울 때는 무엇이 아깝습니까? “아낌없이 주련다.” “다 가져 봐!” 맞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식어지면 주는 게 싫고 받는 것도 귀찮고 싸늘한 계약서만 남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게 와 있고 내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는 순교까지 합니다. ‘아! 나는 주님을 위해서 내 생명을 십자가 위해 똑같이 희생하겠습니다.’ 그 뜨거움을 막지 못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식어지고 그 사랑이 식어지면 싸늘하게 짜증만 납니다.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 생각이 전혀 없어집니다. 생명의 영생을 주려면 내 생명을 버려야 합니다. 생명의 패러독스로 살아야 합니다. 

이 근래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생명 관계 사건이 두 번이 터졌습니다. 하나는 칠레 33명 광부 구출 사건이고 또 하나는 대한민국 천안함 사건이었습니다. 두 사건이 모두 생명에 관계된 사건인데 성격은 정 반대입니다. 천안함 사건은 테러에 의한 생명 죽이기 사건이었고 칠레 광부는 살리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천안함 사건은 온 세계인에게 고난과 어두움을 안겨준 마귀의 사건이었고 광부 사건은 인류에게 희망을 밝혔습니다. 지금 온 세상에 제일 큰 마귀 역사는 생명 죽이기 테러 문화입니다. 지금 온 세상은 이것 때문에 고난스럽고 불필요한 고난을 감수하고 살아갑니다. 

G20의 3만 명의 경찰관을 동원해야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테러 때문입니다. 이제는 공항 검색대에 가서 창피하게 알몸 투시해야 됩니다. 자기 집 안방에서나 벨트를 풀었지 공항에서 여자들 옆에서 벨트를 풀어야 하니 무슨 문화가 이렇게 꾸질꾸질하게 되었느냐 말입니다. 몸수색이 너무 지나치다고 시애틀 공항에서 되돌아간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상 역사 가운데 비인도적 전투를 한 나라가 일본이라고 규정을 합니다. 가미카제 전투입니다. 아무리 전쟁이지만 사람의 생명을 무기로 삼아 비행기와 함께 투하시키는 것이 비인간적입니다. 

그러면 그런 일본은 그 전쟁에서 이겼습니까? 졌습니다. 지금은 자살 폭탄 테러입니다. “생명을 던졌다면 생명 살리는 일에 던져야지 내 생명과 함께 다른 생명을 죽이는 이것은 악령의 역사다.” 빨리 없어져야 하는 문화입니다. 매몰 광부 33명을 살리기 위한 노력은 온 세계 밝은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이 죽음의 시간 속에서도 작업반장 루이스 우르주아의 명령에 질서 있게 따랐다고 했으며 그 캄캄한 지하 622미터 속에서도 예배 자리를 따로 마련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예배 모임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먼저 구조된 마리오 세불베다의 왼쪽 팔뚝을 보십시오. 

“JESUS”는 큰 문구와 함께 티셔츠를 입고 구출되었습니다. 광부가 33명인 줄 알았는데 그들은 34명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더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그 분은 주님이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칠레 축구 협회는 33명에게 한국 여행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그 제안대로 한국 땅에 한번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안함 46명의 젊은 병사들의 죽음은 한국뿐이 아닌 온 세계 사람들의 어두움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누가 그런 악령의 심부름을 했는지 세계가 어두워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일한 사람은 무엇을 얻었습니까? 

33명 광부 구출은 생명 사랑이기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는 온 세계 사람들이 밤을 새워가면서 그 구출 과정을 하나하나 보면서 행복한 눈물의 박수를 보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지요? ‘아! 내가 이 지상에 이렇게 발을 딛고 서있고 찬란한 햇빛을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 생명 사랑입니다. 

바로 천하보다도 귀한 그 생명이 오늘 아침 현실적으로 나에게 이렇게 주어져있음에 대한 감사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리면서 살아있는 동안 생명을 존중하고 내 생명을 다른 사람의 생명 보존을 위해서 바치는 사람이 되고 그런 교회가 될 때 주님은 기뻐하시고 “그래!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구하기에 나서라. 나와 같이 하라.” 이 삶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동물적 생명 원칙에서 벗어나서 인간적 생명 원칙에서 살아봐라.” 이렇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저와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되어 지기를 축원합니다.
  
「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주님은 진리의 말씀을 저희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생명이 천하보다도 귀하기 때문에 그 생명을 생명 살리기에 쓰라고 생명의 패러독스 진리를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삶의 결단이 말씀을 통해서 모두에게 주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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