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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관계와 다툼 어떻게 처리십니까? (약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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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와 다툼 어떻게 처리십니까? (약 4:1-10)


어떤 분의 글을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자기 딸이 세 살 때였답니다. 부부 싸움을 하는 자신과 아내를 보고 앉으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부부 싸움하다가 아이가 앉으라 해서 서로 앉았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부부와 어깨동무를 하고 세 사람의 머리를 가운데로 모으더라는 것입니다. 그 후 아이가 하는 말이 "우리 쫌 사이좋게 살자."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결혼할 때는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 위해 결혼하지만 살다 보면 부부싸움으로 멍드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결혼하지 15년 된 주부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파트에서 아내가 아이들이 다 잠든 후에 연속극을 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스포츠 중계석"을 보자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하였답니다. 그러자 먹던 빈대떡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러자 부인은 "나를 무시했다"며 문밖으로 뛰쳐나가 아파트 아래로 뛰어 내렸습니다. 

다툼은 부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 동료와 학교 아이들 나라와 나라 간의 다툼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도 다툼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다투는 모습을 경험한 성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경험하면 참 신앙생활이 무기력하게 됩니다. 교회 일 깊숙이 개입하고 싶지 않게 되고 겉도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어느 곳에서나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다툼의 기록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도 죄인인 인간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처리해야 합니다. 잘 못 처리하면 하나님 영광도 가려 버리고 자신도 망하고 상대방도 교회도 망합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집도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 다툼을 잘 풀지 못하고 큰 아들을 작은 아들을 쳐 죽였습니다. 

오순절 성령이 충만히 임한 초대 교회도 다툼이 있었습니다. 히브리파와 헬라파가 구제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람도 마가문제로 다툼이 있었습니다. 교회도 인간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다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늘 야고보서를 받는 성도들도 다툼이 있었습니다. 1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니로부터 나느냐?” 싸움은 헬라어 '폴레모이'로 국가 간의 큰 전쟁을 의미하며 '다툼'의 헬라어 '마카이'로 규모가 작은 분쟁을 의미합니다.(고후 7:5;딤후 2:23;딛 3:9). 

야고보는 동의어에 가까운 두 단어를 사용하여 당시 수신자들 사이에 일어났던 개인적 혹은 집단적인 분쟁이나 불화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은 다툴까요? 다툼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1. 다툼의 원인(1)

오늘 본문을 보면 싸움이 어디서 다툼이 어디로 쫒아나느냐고 질문하고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악한 욕망 때문입니다. 플라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전쟁의 근원은 욕심에 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다투는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욕구 충돌입니다. 둘째는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셋째는 감정의 충돌입니다. 
욕구 충돌은 실제적인 이익과 관계해서 발생하는 충돌입니다. 가족 식구끼리 텔레비전을 보면서 남편은 스포츠를 좋아합니다. 아내는 멜로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은 공연을 좋아합니다. 텔레비전은 한 대입니다. 수요는 셋인데 공급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가지고자 하는 사람은 셋인데 물건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싸움이 일어납니다. 다툼이 일어납니다. 

가치관의 차이에 의해서도 다툼이 일어납니다. 삶의 방식과 관계가 있습니다. 
아들은 노란 머리를 들이고 싶어 합니다. 아들은 머리를 땋고 다닙니다. 아들은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노란 머리 보기 싫습니다. 머리를 땋고 다니면 저녁에 몰래 들어가 가위로 자르고 싶습니다. 그러면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치관의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감정충돌에 의해서 다툼이 일어납니다. 같은 말이라도 기분을 상하게 하면 감정이 충돌되어 싸웁니다. 기분 나쁘게 쳐다보았다고 시비하다가 살인까지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정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정욕을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욕심입니다. 악한 의미에서의 욕심입니다. 그릇된 욕심입니다. 다른 사람은 관계없이 나만 만족하면 된다는 그릇된 욕심 말입니다. 자기만 취하고 자기만 받고 자기만 얻으려는 소유의 욕망, 감각적인 욕망에 지배받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다투게 하는 원인이다는 말입니다. 이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욕망의 노예가 되면 계속적인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욕심이 많은 사람은 다툼을 일으킨(잠28:25)"다고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사망을 낳습니다. (약 1:15)"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니까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창13:6,7)가 타둡니다. 야곱과 에서(창25:22), 이삭의 목자와 그랄의 목자(창26:20,21), 예수의 제자들(막9:34;눅22:24)이 다툽니다. 


2. 다툼의 결과(2-5)

1)다툼의 결과는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2). 

2절을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빼앗아 가지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심에 못 이겨 싸움을 벌입니다. 여러분이 갖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여서라도 자신이 갖고 싶을 것을 가지려 합니다. 명예를 가지려 합니다. 권력을 가지려 합니다. 자기의 옳음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꺾어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속이 후련합니다. 지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툼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능히 취하지 못합니다. 다투고 싸우는 것만 남습니다. 어떤 명분의 전쟁일지라도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어가고 가정이 파괴됩니까? 가정에서 싸우면 그 가정 무엇을 얻습니까? 자존심이 높아집니까? 부부싸움으로 얻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좀더 잘해보겠다고 싸우지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젊을 때 다투는 교회에 다녔습니다. 장로님이 매주 설교를 적어 목사님에게 따졌습니다. 결국은 교회가 분열되어 세 교회로 나누어져 버렸습니다. 지금 시골에 가보면 그 후 제가 젊은 시절 다녔던 교회는 노인 몇 명이 나오는 초라한 교회로 변해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싸우는 교회 나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져 버렸습니다. 다툼의 결과는 자신도 추해집니다. 심하면 감옥에 갑니다. 상대에게도 피해를 줍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2)기도하지 않게 됩니다(2).

우리 신앙인에게 하나님은 기도라는 특별한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툼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기도를 잃어버립니다. 자신의 꾀와 모략을 가지고 상대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자기의 주장이 옳고 상대편이 틀리다는 것을 입증하려 합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해를 끼치고 그것이 안되면 자신에게 해를 끼칩니다. 정의와 진리의 수호라는 거창한 명분을 말하지만 하나님도 없고, 성경도 없고, 기도도 없고, 오직 자기 힘과 자기주장만이 난무합니다. 상대를 꺾을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만 모색합니다. 그러다 않되면 법정에 고소, 고발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재판을 받습니다. 가정에 다툴 문제가 있으면 다투지 말고 그 문제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툴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3)기도하되 목적이 잘 못된 기도를 합니다(3).

교회에서 다툴 때 보면 서로 패거리를 나누어 기도회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기도회는 진정한 기도회가 아닙니다.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기 위한 기도회입니다. 자신들이 이기게 해달라는 기도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에 대하여 오늘 3절 말씀을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구하여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왜요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4)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4,5).

간음한 여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다투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에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투는 자들을 '간음하는 여자들이여'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부이고(호2:19~20)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고후11:2)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유부녀가 다른 연애 상대를 따라다니는 것은 남편에게 신실하기 못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기 까지 순전한 사랑으로 돌아오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돌아오지 않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결국 다투면 어떻게 됩니까? 세상과 벗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세상의 벗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제거 대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3. 다툼의 치료책

다툼에 대한 치료책은 여러 가지 원인에 따라 처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토마스 고든은 "부모 역할 훈련"에서 욕구 대립에 의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 풀 수 없는 문제이면 시간을 두고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풀 수 있는 문제이면 자신의 조건과 상대의 조건, 환경조건을 잘 조화하여야 서로가 충분히 수용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욕구를 조절하고 가치관을 맞추고 감정을 일치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르치고 있는 야고보의 치료책은 무엇입니까? 이 다툼의 문제는 사람 끼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3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인간이 무엇인가 얻기를 위해 다투는데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문제의 답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해결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평안해 집니다. 은혜를 받으면 다툼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다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치관이나 욕구, 감정의 문제로 인한 모든 다툼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서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다툼을 잠재우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손을 깨끗이 하라.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애통하며 울지어다.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어라, 주 앞에서 낮추라.” 등 8개가 나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의미적으로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다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1)겸손해야 합니다(10,6).

다툼은 서로 잘났다고 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너보다 내가 잘났다는 것입니다. 너보다 내가 많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보다 내가 많이 가졌다는 것입니다. 너보다 내가 오래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살려면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까? 겸손한 자입니다. 교만한 자는 물리칩니다. 그릇도 비워야 채워집니다. 교만한 자들은 가는 곳마다 다툼을 일으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인간끼리 보면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앞에 있기 때문에 낮추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얼마까지 낮아졌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2-8)”

그러면 손해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 주십니다. 사람은 높여주지 않아도 우리 주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더욱 큰 은혜시고 높여 주십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9-11)”

2) 하나님께 복종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7)

다툴 때 사람들은 서로 자기 말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자신의 힘 앞에 굴복하라고 합니다. 자신의 논리 앞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지배욕의 확장이 다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자기주장이 옳다고 우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려야 합니다. 자기 정당성이라는 것은 항상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준이 되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툽니다. 

하나님께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식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장로님도 목사님도 권사님도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합니다. 모든 가치관을, 모든 욕구를,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말씀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하면 멈추는 복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복종하려고 하면 사탄이 방해합니다.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렸듯이 오늘날도 사탄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사탄을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말을 우리 인간에게 시행하면 높아지고 승리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사탄은 갖은 방법으로 우리를 다투게 하여 우리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틈만 나면 끼어들어 교회를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사랑의 대상이지 적이 아닙니다. 아군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남편이 원수가 아닙니다. 자식이, 아내가, 시어머니가, 시아버지가, 나에게 잘못해주는 그 어떤 사람도 원수가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의 싸움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누구이겠습니까? 야곱과 에서의 싸움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누구이겠습니까? 믿음의 사람이 다투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누구이겠습니까? 

양 두 마리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는 늑대 한마리가 살고 있었는데 양의 고기 맛을 결코 잊지 못하는 교활한 놈이었습니다. 그러나 늑대 혼자서 양 둘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숨어서 기회만 엿보고 있었습니다. 어느 몹시도 무더운 여름날이었습니다. 양 둘이 물을 마시러 옹달샘 터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두 양은 `누가 먼저 물을 마실 것인가'라는 지극히 사소하고도 가벼운 문제로 말다툼을 하다가 한판 격투까지 벌이게 되었습니다.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습니다. 코피가 터지고 귀는 찢어졌습니다. 마침내 둘은 눈썹조차 까닥할 수 없을 만큼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때 늑대란 놈이 나타나 여유 있게 양의 목을 차례차례 물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가 우리를 피합니다.

3)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회개하여야 합니다(8,9). 

사람들은 싸우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교회에도 나가기 싫습니다. 기도하기도 싫습니다. 교인도 교인으로 보이지 않고 원수로 보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와야 넘치는 축복을 받는데 법원에 나아갑니다. 고소 고발을 합니다. 그래서 다투는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을 보면 교회 일에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교회일 중심에 들어가면 머리만 아프고 상처만 받는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교회에 대한 소속 의식이 없어집니다. 교회에 대한 애착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다툼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편을 가까이 합니다. 패거리를 만드는 것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을 총 동원하여 자기편을 만들어 상대를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 받고 싶어 하고, 힘을 확장시켜 더 큰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 더 큰 무력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는데 우리가 조금 억울한 점이 있으면 뭐 그것이 큰일이겠습니까? 어떤 억울함을 당하고 어떤 고난을 당해도 우리 하나님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과 다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한나를 보십시오. 브닌나와 얼마든지 다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다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술 취한 여인처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무엘을 얻어 민족 지도자로 만들었습니다. 다툼의 문제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내가 보입니다. 내 잘 못이 보이고, 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주십니다. 회개할 때 갖가지 은사를 받고 회개할 때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부흥시킵니다. 

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신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행위로는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다 실수 할 수 있습니다. “누가 의롭냐? 누가 바르냐?”냐를 놓고 서로 독설을 하며 상대를 죽임으로 자신의 의를 증명하려는 의의 다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도토리 키 제기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롬 3:10-15)” 

우리 스스로 우리의 행동을 살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언행은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지만 어떤 문제가 생기면 두 마음이 늘 싸우고 있습니다.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원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라고 말씀합니다. 죄에 대하여 철저히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누구의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서로 자복하고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잘못은 시인하고 죄를 고백하며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다툼이 일어나면 회개를 모릅니다. 서로 의로움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로 의를 주장하는 것은 바리새인같은 자기 교만입니다.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신분적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행위로는 죄인입니다. 상대를 이겼다고 우쭐 대며 웃는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고 상대를 제압했다고 즐거워하는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넘어 질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사랑한 사람이지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합니다. 그리고 그의 남편을 죽였습니다. 간음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때 나난 선지자라 와서 잘 못을 지적합니다. 이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멀리하며 나단 선지자와 다투며 죽이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깨끗이 회개하였습니다.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이 가까이 해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빌크린턴이 성추행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3년간 3주일에 한 번 3시간씩 상담하고 치유해 주신 분이 고든 맥도날드 목사입니다. 그도 과거 간음죄를 범한 사람이었습니다. 

1987년 그레이스 채플을 담임하며, 기독학생회(IVF) 총재를 하고 있던 소위 잘나가던 고든 맥도날드 목사는 간음의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회개하였습니다. 

빌 하이벨스, 찰스 스윈돌 등 고든을 아끼던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어 그와 그의 가족을 도왔습니다. 1년의 기간이 지난 후 그의 회복을 확인한 동료들은 회복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죄의 자백에서 회개, 그리고 회복까지 3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레이스 채플 교인들은 고든을 찾아가 그를 다시 교회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는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을 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범죄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를 외면하지 않고 찾아가 용서해 주시고 사명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디도서 3장9절)”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7:1)”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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