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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고 없는 삶(4) (룻 1: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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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 없는 삶(4) (룻 1:11-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심은대로 거둔다”는 진리입니다. 땅은 아주 정직합니다. 땅은 심은대로 심은 만큼 되돌려줍니다. 더 고생한 사람에게는 고생한 만큼 더 보상해 줍니다. 땅은 놀고 잠을 많이 잔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줍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그동안 나오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오미가 모압 땅에 가서 살면서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빈 몸으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작은 며느리 룻도 함께 돌아옵니다. 룻은 희망이라고는 전무한 시어머니를 좇아서 죽은 남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룻의 동행은 단순한 도리나 윤리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동행이었습니다. 룻이 시어머니를 좇아서 베들레헴에 온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동행이었습니다. 룻은 앞 길에 고난도, 배고픔도, 언제 전환이 주어질지 기대도 없는 고난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룻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와 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룻의 인생은 해피앤딩으로 끝맺음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말씀의 초점을 시어머니를 떠난 큰 며느리 오르바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미나 룻의 이름은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오르바의 이름은 4절과 14절에 딱 한 번씩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첫째 며느리 오르바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나오미나 룻에 대해서 설교는 많이 했지만 이 오르바에 대해서는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냥 오르바는 스쳐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룻은 효부였습니다. 어렵지만 가장 인간적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룻은 결정적인 시간에 신의 섭리를 발견한 여인입니다. 그 결과 아주 소중한 순간에 어려운 길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큰 복을 받았고 마지막에는 해피앤딩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며느리 오르바는 그에 대해서 성경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오르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오르바가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르바의 계산 

오르바는 룻처럼 모압 여인입니다. 어느 날 한가정이 베들레헴에서 모압지방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이사 온 집안에는 준수하게 생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압지방에 화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모압지방에 사는 처녀들은 흥분했을 것입니다. 그 엘리멜렉의 집안의 두 아들이 잘 생겼다면 더욱 화제꺼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침내 모압 여인들 중에서 오르바라는 여인이 큰 며느리로 뽑혔습니다. 오르바는 결혼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한동안 행복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행복은 길지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시아버지가 죽었습니다. 또 어느 날 남편이 죽었고 또 어느 날 시동생이 죽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죽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행복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행복도 기대도 미래도 희망도 공기가 증발하듯이 한순간에 다 증발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다 늙은 시모와 과부된 동서와 셋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기댈 곳이 없는 허물어져 가는 집안만 눈에 보였습니다. 

사람은 이때 고민하게 됩니다. 갈등이 발생하게 됩니다. 미래가 더 암담하게 느껴집니다. 욥의 아내가 그래서 욥을 저주하고 집을 나간 것입니다. 다 잃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오늘 가정을 버리고 도망가는 주부들이 가끔 있는데 그들의 심정이 이랬을 것입니다. 희망의 여지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희망은 싹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리고 남편은 무능하고 시부모는 늙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과 시부모를 놔두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 심정을 이해합니다. 희망 없는 현실을 인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오르바가 고민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집안이 소리 없이 망해가고 있습니다. 남은 시어머니를 보면 기댈 곳이 없습니다. 희망이라고는 싹도 보이지 않습니다. 고민이 컸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내 미래, 내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왜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오르바가 그때 계산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오르바의 선택 

오르바가 그렇게 고민하고 계산하다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너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돌아가서 “개가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오르바는 심각하게 고민 중인데 시어머니가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시어머니는 너무 완강하게 그리고 아주 완곡하게 돌아가라고 강권했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역시 시어머니 나오미는 현명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때 또 하나의 다행한 조건이 주어졌습니다. 작은 동서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작은 동서가 어리석게 보였지만 참 다행이었습니다. 작은 동서가 시어머니를 지켜준다면 한결 마음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 작은 동서는 시어머니를 따라가면 미래가 없는데도 함께 가겠다고 우깁니다. 오르바는 작은 동서 때문에 결단 내리는데 마음은 한결 편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동서들이 없습니다. 모두 자기이익 챙기기에 급급합니다. 특히 시댁문제, 시부모문제, 시동생문제는 심각합니다. 늙은 시부모, 무능하고 유산이 없으면 고려가 없습니다. 여기 오르바의 마음속에는 신의 섭리의식이나 인륜이나 천륜같은 의식은 전무합니다. 오로지 현재적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이 부분이 본문에 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르바는 결국 편한 길을 가기로 작정합니다. 집으로 돌아가 개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오르바가 결국 쉬운 길을 택하여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결국 룻은 어려운 길을 택하여 모험의 길을 택하였고 오르바는 너무 쉬운 길을 택하여 오늘 현재 이익이 되는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바로 이점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쉽게 살려고 합니다. 쉬운 길을 가려고 합니다. 가능하면 무거운 짐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조금만 부담이 되면 피하려고 합니다. 시부모가 무능하고 늙으면 다 회피하려고 합니다. 남편이 무능하면 헤어질 것부터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노부모들이 거리를 방황대고 부부들 사이가 자꾸만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르바는 오늘 현대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이 약삭빠른 여인 오르바는 현실적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쉽게 살려고 하였습니다. 수고하지 않으려고 쉬운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  

그것은 곧 잊어짐입니다. 쉬운 길을 선택한 오르바는 이제 룻기서에서 곧 잊어졌습니다. 쉽게 살려고 하면 쉽게 잊어집니다. 본문은 책의 타이틀이 룻기서 입니다. 본문 내용 전체가 룻에 대한 이야기로 장황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룻이 살아간 고난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고 그가 복을 받는 모습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르바의 이야기는 4절과 14절에서 이름만 나오고 돌아갔다는 짤막한 이야기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이 룻에 대해서는 많은 설교를 하지만 오르바에 대해서 설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잊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쉬운 삶에는 이력도 없습니다. 세상을 쉽게 살면 이력도 이야기꺼리도 없어집니다. 자서전을 쓸 내용이 없습니다. 할 말도 없고 말할 내용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룻기서에서 룻이 주연입니다. 

그런데 오르바는 엑스트라급 조연입니다. 저는 군에 가서 참 험악한 곳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저는 나 혼자서 최전방으로 배치되었을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32명이 같이 훈련을 마쳤는데 왜 나 혼자만 가장 어려운 곳으로 배치되었을까를 많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원망도 많이 했고 내가 무슨 죄가 그리 많은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어려운 곳에 오게 됨으로 후에 할 말이 많아서 좋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대한 후에 나는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이 많아서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자들끼리 모여 군대 이야기만 하면 저는 신나서 이야기 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눌 때 옆에 조용히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은 왜 조용히 앉아 있는가를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쉽고 편하게 쉬운 길을 선택하였던 사람들은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쉽게 가는 길에는 쉬운 만큼 쉽게 잊어집니다. 이력도 할 말도 없어집니다. 

또한 상도 없습니다. 쉬운 길에는 얻을 것도 없지만 상도 없습니다. 쉬운 길을 가면 오늘은 편한 대신 나중에 주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오늘 심는 사람은 온갖 수고를 다 해야 합니다. 땀도 수고도 희생도 해야 하고 오늘 먹을 것도 없는데 투자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후에 얻는 복이 엄청나게 큽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오르바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메시지입니다. 교회에서 모두들 쉬운 일을 하려고 합니다. 조금 어려운 직책을 주면 불만스러워 합니다. 

어떤 분은 노골적으로 불평을 하고 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중직자들 부인들도 구역장을 그만두고 싶다고 안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안하면 평안하고 쉽습니다. 매이지 않아서 좋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름이 없어져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서 이름이 없어진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추천한 길이 좁은 길이고 좁은 문입니다. 수고와 땀과 희생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주님은 쉽게 전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습니다. 귀신을 내쫒고 병을 고치는 능력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전도하면 잘 하실 것인데 굳이 우리들에게 어려운 방법을 통해서 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도 쉬운 방법이 있었을 것인데 가장 처절하게 지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쉽게 살면 편하기는 하지만 상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뿐 아니고 하늘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기 오르바는 후에 주어진 복이 없습니다. 쉽게 잊어졌습니다.  


룻의 고난 길 

그런데 룻은 오르바와 대조적으로 살았습니다. 룻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오르바가 넓은 길을 선택하였다면 룻은 좁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룻은 아무 희망이 없는 곳에서 그는 희망의 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오르바는 오늘 현대인의 모형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오늘의 고난이나 수고나 땀 흘림이 미래에 큰 행복을 보장한다 해도 선뜻 선택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현재는 어렵지만 미래에 희망을 보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려고도 않습니다. 오늘의 풍조는 이미 다 익은 열매를 선호합니다, 그래서 오늘 젊은이들이 조건이 성숙해진 연상의 여인들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군에 가서 2년 동안만 수고하면 제대한 후에는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는데도 그 2년 동안의 수고를 온갖 방법으로 회피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당장의 고난이나 수고를 다 회피하려고 합니다. 오늘 직장이 없다고들 아우성이지만 명분이 그럴듯하고 폼 나는 직장을 찾다 보니까 일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좀 더 수고하고 땀 흘리는 일터가 왜 없겠습니까.  오늘은 다 쉽게 편하게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르바는 오늘 현대인들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룻에게서 깊은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좀 더 깊은 의미를 얻는 삶은 한결같이 힘들고 땀 흘리고 수고가 필요한 삶입니다. 때로는 희생이 필요하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용기도 필요한 삶입니다. 그런 삶은 아무나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엊그제 칠레에서 광부들이 구출되는 장면을 보니까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지하 700미터 밑에서 700톤의 암석에 깔려 69일 동안 생존해 있다가 구출되었습니다. 오늘 칠레라는 나라에서 광부들이 매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모두가 불행한 사건이라고 말해왔는데 이 사건은 결론으로 말하자면 칠레를 구원한 사건이고 이 사건이 없었던 것 보다 훨씬 더 온 세계에 유익을 주고 감동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대목 중에서도 더 감동적인 장면은 서로가 맨 나중에 나가겠다고 말한 대목입니다. 젊은이는 내가 젊으니까, 나이 많은 분은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건강한 사람은 내가 건강하니까 나중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모두 먼저 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결단이 나오게 된 것은 깊은 삶, 깊은 생각, 깊은 의미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더 희생하고 더 고민하고 더 고생하려는 것입니다. 

만일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주장했더라면 불상사도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대다수로 생각 없이 살아가는 층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을 꾸려나가는데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그냥 따라가는 부류입니다. 또 하나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비하고 방해하는 층입니다. 아무리 성숙한 사회라 할지라도 이런 부류는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도 또 극소수층은 그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층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지금 광부들이 갱이 무너지면서 69일 동안 700미터나 되는 깊은 땅속에 묻혀 있었으면서도 서로 나중에 구출되겠다고 나서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이 세상에 감동을 주고 그런 이치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새로운 기억들을 되살려 주는 것입니다.    

오르바는 너무 쉬운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 결과 그의 모습에서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룻은 그 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모습으로는 참 미련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외모에 나타나지 않는 그의 속마음에는 일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깊은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 늙은 시어머니의 모습에서 룻은 자기희생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 의지할 것 없는 무일푼의 시어머니를 포기하는 것은 장래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저 깊은 의무를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시아버지와 두 형제의 의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때 룻은 그 죽음의 모습들을 보면서 뭔가 두려움과 신의 섭리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은 이 모험의 길을 회피한다면 나에게도 또한 그 신적 노여움이 엄습하리라는 그 뭔가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사코 돌아가라는 시어머니의 강권을 뿌리치고 고집스럽게 흔들림 없는 중심으로 시어머니의 백성이 되겠다고 작정하였을 것입니다. 이 뭔가를 보는 눈이 지혜의 눈입니다. 이 지혜가 올바른 판단을 하고 결단하고 은총의 길을 가게 만듭니다. 룻이라고 자신의 행복을 염려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룻이 오르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룻에게는 뭔가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남들이 가지 않는 이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길을 고집하는 것도 이 깊은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길을 떠나지 못하고 오늘도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오르바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일날이면 산으로 강으로 오락을 위해서 동분서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다 뿌리치고 이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쉽게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에는 상이 없습니다. 쉽게 잊어집니다. 또 한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현재는 가기가 힘든 길이지만 그 길이 생명의 길입니다. 후에 상이 주어지는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좁은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좁은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룻이 가는 길을 가고 있는가? 아니면 오르바가 가는 길을 가고 있는가?” 여러분들이 가는 길 위에 주님의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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