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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리더십 (느 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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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주의를 극복하는 리더십 (느 2:11-20)

 
인생은 성공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 스포츠 면에 아주 흥미 있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사가 하나 실렸습니다. 일본 축구 대표팀의 미드필더였던 고마노 유이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마노 유이치는 남아공 월드컵 16강전 파라과이와의 승부차기에서 실축을 했던 인물입니다. 고마노는 승부차기에서 일본의 세 번째 키커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찬 공이 그만 크로스바를 때리고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의 실축으로 인해 일본은 승부차기에서 3:5로 졌고, 결국 일본은 8강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문 기사는 그가 자신의 고향에서 공로 메달을 받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에게 꿈과 감동을 준 것에 대한 답례라는 것입니다. 

보통은 실수를 해서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선수에게는 비난과 조롱, 때로는 협박이 쏟아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본인도 이것 때문에 귀국하기가 무섭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위로를 받으면서 그가 한 말이 있습니다. “실패는 실패이다. 그렇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대로 차보고 싶다.” 
우리는 인생에서 성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성공했을 때 자신감을 얻고, 실패했을 때 쓰라린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뒤집어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 큰 축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공했을 때, 과거에 실패했던 경험을 떠올리고 겸손히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실패했을 때,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도전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 사람도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마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공하고 이기고 나면 우쭐댑니다. 반대로 실패하고 지게 되면 낙담하고 어깨가 축 늘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패배주의에 빠졌습니다

어떤 사람의 됨됨이는 그가 성공했을 때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람의 참된 됨됨이가 나타날 때는 그가 실패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에 달려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공을 하기까지 실패의 아픔과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에게도 이러한 실패의 문제, 고통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참패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당했고, 성벽은 맥없이 무너졌습니다. 성문은 불에 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마저 상실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1~2년만 지속되었던 것이 아니라 100년 이상 지속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이미 패배주의적인 사고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내 할아버지, 할머니도 이렇게 참담하게 살았고, 내 어머니, 아버지도 이렇게 고통 속에서 살았는데 우리가 과연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구나.’ 이러한 패배주의적 사고가 그들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패배의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실패 또한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될 때, 우리는 패배주의의 깊은 수렁에 빠져 들게 됩니다. 그런데 이 패배주의는 결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탄이 만들어 내는 생각이고, 사탄의 가치관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패배주의가 왜 위험합니까? 첫째로 패배주의는 사람을 적당주의자로 만듭니다. ‘이만하면 됐지! 내가 새로운 일을 할 필요가 없어! 다른 사람들도 대충 사는데 나만 특별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이러한 생각과 과거에 실패했던 경험들이 우리의 발목을 끊임없이 붙잡으면서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미 수없이 해봤는데 안 되더라고 되 뇌이면서 나중에는 도전도 해보지 않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두 번째로 패배주의는 사람에게서 기대심을 빼앗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특별히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그 실망감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면 기피합니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습니다. 먼저 불평하고 그 사람 탓을 하기 시작합니다. 속으로는 분노합니다. 이 분노는 언제 터져 나올지 자기도 모르고 남도 모릅니다. 끊임없이 남의 탓을 해야 자신이 생존할 수가 있습니다. 패배주의에 빠지면 나도 상처를 입고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어 인간관계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세 번째로 패배주의 속에 들어가게 되면 생각 없이 살아가게 되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현실에 이끌려 억지로 살아갑니다. 거기에는 감사한 마음도 없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내 모든 것을 헌신할 열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삶이 지겹고 짜증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가 없습니다. 인생이 지루하고 실증나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생각을 못합니다. 그냥 이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하루하루 보냅니다. 이것이 패배주의가 갖고 있는 태도입니다. 

패배주의에서 벗어나려면 현실을 직시하며 정체성을 확인해야합니다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는 2~3개월의 여정을 거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무런 기대감이 없었습니다. 소원도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것이 운명이라고 여기고 체념하면서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때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패배주의적인 사고에 젖어든 자신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비전과 희망을 줄 수 있었을까요?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느헤미야 2:11)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사흘 동안 침묵했습니다. 아마 잠깐 쉬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계속 읽어 보면 그가 쉼만 가진 것이 아니라 이 민족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아뢰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현실 속에 닥쳐온 문제를 현실 그 자체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자기가 봐도 낙심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소원을 깨달았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내가 탄 짐승 외에는 다른 짐승이 없더라” (느헤미야 2:12)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느헤미야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두세 명의 수행원만 데리고 밤에 시찰을 나갔습니다. 소문으로 듣던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소문보다 더 처참했습니다. 그는 이 고통을 피부로 함께 느끼기 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패배주의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가 지금 패배했다는 것, 무너졌다는 것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나는 여기에 머물 수 없다! 내가 패배했지만, 내가 문제가 있지만, 내가 고통 속에 있지만, 내가 비참한 자리에 있지만, 이것은 나의 자리가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패배주의에서부터 일어설 수 있습니다. 17절에는 느헤미야가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느헤미야 2:17) 

느헤미야는 자신도 고통 속에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고통 속에서 아파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확인시킵니다. “우리는 지금 실패 가운데 있다.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하고” (느헤미야 2:17)

“그러나 예루살렘이 무너진 대로 그대로 있는 것이 수치이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 성전은 하나님의 성전이고, 이 성벽은 하나님의 성벽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그대로 놔두는 것은 우리의 부끄러움이요 수치다. 우리는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이 패배주의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을 붙잡을 때 패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패배주의는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만들어준 생각입니다. 사탄은 패배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얘야, 그냥 살아. 그냥 주저앉아 살아. 그것이 네 인생이야. 뭘 바꿔보려고 해? 여태까지 패배했잖아. 너는 못해. 잘할 수가 없어. 여기까지가 너의 한계야. 그러니 그냥 그대로 살아.” 이 말에 속아 그대로 주저앉아 살게 하는 것이 바로 사탄의 계략입니다. 

여러분, 내가 얼마나 큰 어려움 속에 있는가를 깨닫는 것은 현실적인 감각이고 분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을 붙잡게 됩니다. 현실의 분석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우선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꿈과 비전을 현실 위에 덧붙일 때 우리는 패배주의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도 사람들을 이끌 때 정신적인 가치관을 먼저 선포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제품을 팔고 있는 기업가들도 상품을 팔기 전에 먼저 그 속에 있는 정신을 팔려고 합니다. 

카마인 갈로가 쓴 「스티브 잡스 프레젠테이션의 비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자기가 직접 제품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 상품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의 메시지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잡스가 애플의 제품을 설명할 때 그가 실제로 사람들에게 판 것은 애플의 제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제품을 통해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꿈을 먼저 판다는 것입니다. 그 제품을 통해서 얻게 되는 혜택을 사람들에게 먼저 팔았다는 것입니다. 애플의 마니아들이 제품에 환호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제품 자체에 담겨 있는 정신적인 꿈에 환호하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펩시콜라의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영입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존 스컬리는 애플로 오라는 잡스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때 잡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에게 도전을 주었습니다. 스컬리는 그 도전이 마치 망치로 얻어맞은 충격과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그 도전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계속 설탕물을 팔면서 남은 삶을 지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애플에 와서 세상을 바꿀 기회를 잡고 싶으십니까?” 그때 그는 애플을 수렁에서 일으키는 동역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여러분, 세상의 물건 하나를 만드는 사람도 그 속에 담긴 정신을 팔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세계는 어둠과 미움 속에 있었습니다.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빛과 생명과 진리의 세계가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왔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세상을 바꾸라고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꿈과 비전은 이 세상의 꿈과 비전보다도 크고 강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꿈과 비전을 느헤미야에게 주셨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중요했던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것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가지고 그 일을 시행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꿈과 비전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주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신 일과 왕이 내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더니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느헤미야 2:18) 

예수를 믿는 사람은 무작정 달려드는 무리한 모험가가 아닙니다. 긍정적인 사고만 가지고서 긍정적인 말만 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우리 삶의 한계에 부딪힐 때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선한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꿈을 주셨다!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실 것이다. 페르시아 왕도 감동했다.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래도 우리가 이대로 무너져있을 것인가? 이대로 주저앉아서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인가? 다시 일어나자! 다시 집을 짓자!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자!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의존하자!” 느헤미야가 이렇게 그들을 초청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 하신다는 기대를 가지고 역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의 성공과 성취 뒤에는 실패와 절망스런 현실을 극복했던 과정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내게 가정을 왜 허락해 주셨는지, 직장을 왜 허락해 주셨는지 이유가 있고,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낙심하고 그 속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나의 성공스토리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사랑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나를 통한 생명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축복의 통로로서 어떻게 내 삶이 변화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얻게 되었는가를 써내려가는 이야기가 신앙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요,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과 비전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키십시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삶의 현장이 너무 치열하여 그 속에서 우리는 낙담하고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힘든 현실 속에서 패배주의적인 사고로 낙담하고 무너지면 안 됩니다. 그것은 사탄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야합니다.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 내가 왜 여기 있습니까? 내게 무엇을 하려고 하십니까?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을 이루시려고 하십니까? 하나님 가르쳐주세요!’ 이렇게 다시 일어서는 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모습입니다.
 
패배주의로 만연한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축복의 통로로 세상에 나가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소망교회에 대한 큰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서 세상의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만이 소망이요, 생명이요, 자유이심을 이 세상에 마음껏 선포하는 일당백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꿈을 지녔던 느헤미야 한 사람을 통해서 낙심하고 좌절하며 패배주의에 빠졌던 사람들이 변화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과 행복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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