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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롬 7: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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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롬 7:14-8:2)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주 잘 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죽겠다'라는 말입니다.
툭하면 '장사가 안 돼서 죽겠다', '매일 술 먹고 들어오는 남편 때문에 죽겠다', '자식이 속을 썩여서 죽겠다.'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힘들어 죽겠다', '피곤해서 죽겠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심심해서 죽겠다'고까지 하니, 아마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이 '죽겠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하루를 넘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처럼 '나쁜 경우'뿐 아니라 '좋은 경우'에도 이 '죽겠다'는 말이 따라오는데, 예를 들면 '배불러 죽겠다,' '재미있어 죽겠다' 등등 복에 겨운 것까지도 '죽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서 '죽겠다'는 말은 '아주, 대단히'라는 뜻을 과장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겠지만, 하여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말을 좀 헤프게(?) 쓰는 경향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사실 사람이 스스로 '이래서는 못 살겠다, 이러다가는 죽을 수밖에 없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심각하고도 극단적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을 너무나 흔히, 쉽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 '죽겠다'는 말을 정말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그리고 실제로 무척 괴롭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쓰고 있습니다.
  
바로 본문 7장 24절의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애절한 장탄식입니다.
이 '곤고한'이라는 말은 '많은 고통을 당하는, 비참한' 혹은 '파산 상태에 빠진'이라는 뜻의 단어이며, '사망의 몸'이란 바로 '죽음의 저주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을 가리킵니다.
즉 이것은 문자 그대로 '꼼짝없이 죽게 된' 절망의 밑바닥에서 '아이고, 죽겠다.'라고 땅이 꺼질 듯이 애곡을 하면서 '사람 살려!'라고 비명을 지르는 소리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도대체 왜 자기 자신을 두고 이처럼 오장이 뒤집히는 고통의 탄식을 내뱉게 된 것이겠습니까?
또한 그런 극단적인 좌절감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가서는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도 고질적인 고통과 절망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죄에 속박된 '완전타락' 상태에 빠지게 됨으로써 사망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본문 14절부터 17절에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라는 말씀은 율법의 기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있는 까닭에 그 율법 자체는 전적으로 영적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으로 인하여 사람이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을 받게 되는 길이 활짝 열리기는 했지만, '죄를 죄라고 정죄하는' 율법의 신령한 기능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곧 이어서 "나는"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문제는 '바울을 정죄하는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의하여 정죄당할 수밖에 없는 바울' 자신에게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비친 바울은 과연 어떤 존재였습니까?
그 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스스로 인정하기를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했습니다.
원래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창조된 '영적 존재'였던 사람이 이제는 철저하게 '육신에 속한 존재'로 전락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 상태를 두고 '죄 아래 팔렸다'라고 아주 노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노예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장면을 떠올리는 말입니다.
'자기 육신이 돈에 팔리게 된' 노예는 자기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산 주인의 것이 됩니다.
그 결과 노예는 모든 것을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바로 이처럼 '죄에 팔린'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사람은 자기 육신의 상전이 된 '죄'가 이끄는 대로만 따라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덴동산에서의 타락 이후에 모든 사람이 예외가 없이 빠지게 된 현실입니다.

그처럼 '죄 아래 팔린 육신'이 된 처지를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15절 이하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는 말은 '내가 무의식중에 죄를 짓는다.'라고 사도 바울이 변명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도대체 왜 이렇게 내가 원치 아니하는 죄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라고 자신의 괴로운 갈등과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은 하게 되는 것은 곧 율법 자체는 선한 것임을 내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선하고 옳은 것인 까닭에 그 율법이 금하는 것을 저지르게 될 때에도 적어도 그것을 원치는 않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신령한 율법'을 기준으로 삼고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해 본 결과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며 율법에는 아무 책임을 전가할 수 없었습니다.
즉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율법을 어긴 '나' 자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속에 거하는 죄'가 모든 문제의 원인임을 바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의 수제자로서 율법에 통달한 바울이었지만 그 율법이 금하고 정죄하는 죄를 자기 속에서 제거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죄에 팔린 몸'이 되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것이 바울로서는 실로 '곤고한' 상태, 그야말로 괴롭고도 비참한 현실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돈 없어서 못 살겠다'가 아니라 '죄 때문에 못 살게 된' 처지임을 자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못난 남편'이나 '속 썩이는 자식' 때문에 '죽겠다'가 아니라, '바로 내 속에서 나를 주장하고 있는 죄' 때문에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지 못해서, 예쁘게 태어나지 못해서 인생에 문제가 생긴 것이 결코 아니라, 원래부터 '완전타락한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 모든 사람의 고질적인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할 뿐인 존재'로 태어났으니 그야말로 '죽을 노릇'이 아닐 수 없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 본질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영적 파산 상태이며 최악의 인생 고통임을 똑바로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은 자신의 의지나 힘만 가지고서는 죄를 이길 수 없는 '전적무능력'으로 인하여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18절부터 20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 속"은 "내 육신"과 동격으로서 바로 그 '타락한 본성'과 '죄의 성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릇과 같습니다.
즉 사람의 내면에는 "선한 것"이라고는 아예 "거하지 않게" 되었으며, 사람의 육신은 오직 "죄"와 "악"만 상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완전타락'의 상태는 필연적으로 또 하나의 절망적인 상태와 직결됩니다.
그것이 바로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이 없노라"라는 '완전무능력'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완전타락으로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원하는바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근본적으로 가로막아 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처럼 일방적으로 '악만 행하려 하는 본성'에 이끌리면서도 스스로 통제할 길이 없는 무력에 빠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 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변명하는 말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내가 아니요 죄니라'는 표현은 '죄'는 '나'라는 한 인격과 대조될 정도로 뚜렷하면서도 강력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바로 그 '죄'가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고 자유자재로 조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나'라는 자신은 스스로 선을 행할 의지도 없어지고 선을 행할 능력도 전무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나'는 '내 속에 거하는 죄'에게 완전히 KO패, 그것도 백전백패를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 열성으로도 바리새인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울조차 죄를 스스로 상대하거나 해결할 길은 없었습니다.
분명히 '선을 원하는 마음'은 그에게 있었지만 실제로 나타나는 '행함'은 오직 '악'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 아니었겠습니까?
적어도 죄에 대해서만큼 사도 바울은 실로 '전적 무능력' 상태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남다른 의지로써 자신의 나쁜 습관을 고치거나,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으로써 자기 인생을 향상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심삼일에 끝나는 대부분의 골초들과는 달리 과감하게 담배를 완전히 끊고 마는 사람들도 있고,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밤잠을 줄이면서까지 책과 씨름하여 끝내 진학과 취업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힘' 앞에서는 아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죄의 조종과 유혹을 거스려서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필적할 수 없는 상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이 '죄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자신의 의지'를 과신할 수 없습니다.
죄는 사람의 양심의 힘, 선을 추구하는 마음, 윤리적인 정신, 도덕관념 혹은 '새해의 각오' 따위로 극복할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즉 그 죄의 힘이란 세상의 그 어떤 성인이나 현자나 군자라 하는 사람도 자신의 의지나 결단력만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천하무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곧 '죽을 맛'이 됩니다.
죄에 대해서는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전적 무능력'은 정말 '환장할 정도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의 종이 됨으로 인하여 우리 '속'에는 원래 하나님을 찾으려는 '의지'도 없었으며 찾을 수 있는 '능력'도 전무했다는 이 비참하고도 엄연한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솔직히 인정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사람은 신자가 된 후에도 자기 속에 있는 죄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육신적 연약' 때문에 곤고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21절 이하 23절까지에서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원칙' 혹은 '철칙'이라는 뜻으로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이 '깨달았던 한 법' 즉 '자기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던 사실'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을 그저 속박이나 제재로 보지 않고 그 대신에 그 법이 가르치는 선을 기뻐하며 그것을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지체 속"에서는 그처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의 법"과 "한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날마다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치열한 내적 투쟁이기는 했지만 그 결과는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싸움에서는 '죄의 지배를 받는 철칙'이 '하나님을 순종하고자 하는 원칙'을 항상 압도적으로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실을 두고 '죄의 법'이 '마음의 법'과 싸워서 "나를 사로잡아 온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사로잡다'는 말은 군사 용어로서 '포로로 삼다'는 뜻입니다.
즉 '죄의 법'이 그야말로 바울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가두어 버린 것이며, 다른 말로 하자면 스스로 율법을 순종하는 데에 실패함으로써 죄의 법 안에 꼼짝 못하고 갇히게 된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는 이런 '내적 투쟁' 자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속에는 오로지 '죄의 법'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은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중생 받은 신자는 율법이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을 즐거워하며 지키려는 '마음의 법'을 소유하게 됩니다.
즉 '악을 미워하며 선을 사랑하는' 속사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신자는 불신자 시절에는 겪지 못했던 큰 고통의 딜레마를 겪게 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은 얻게 되었지만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본성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그 죄의 영향력은 신자의 마음과 행동에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신자들도 예전처럼 상습적이거나 의도적으로 행하지는 않지만 부지중에 연약에 빠지고 실족하는 자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는 그런 죄를 범해도 아무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낄 줄 몰랐으니 당연히 무슨 괴로울 일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전과는 달리 '죄의식'이 생겼기 때문에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스스로 엄청난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에게는 그야말로 '곤고한' 갈등과 고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신 사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져 있는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막 14:38)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제자들조차 육신의 연약성에 사로잡혀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죄의 법'은 얼마나 끈질기고도 강력한지 그 영향력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신자가 된 후에도 여전히 계속됩니다.
즉 아무리 신실한 신자라 해도 이 세상에서 성화과정에 있는 동안에 그 육신이 죄의 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죄의식'이 분명해진 까닭에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자신이 신자라 하면서도 '죄의 법'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갈등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또 하나의 엄연한 현실, 즉 우리가 기독신자가 된 후에도 평생토록 사라지지 않는 이 괴로운 딜레마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식'은 생겼지만 '죄 척결'은 여전히 완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줄 아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우리의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법' 앞에 자주 연약과 실족에 빠지고 있는 것이 자신의 솔직한 현실인 것을 자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적 타락'과 '전적 무능력'의 본성 때문에, 그리고 성화과정에서도 여전히 남아 있는 '육신적 연약' 때문에 정말 '죽을 지경'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이고, 나는 죄로 인하여 비참하게 파산한 인생이다. 이 절망적인 사망의 저주에서 누가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라고 실로 처절한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신앙 약한 사람'의 소리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진단이며 가장 솔직한 고백인 동시에, 그 절망적인 부르짖음은 즉시 놀라운 구원의 약속으로 응답받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 '죄와 사망의 딜레마'에 대한 너무나도 은혜로운 해결책이 바로 로마서 7장 25절부터 8장 2절까지의 말씀에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조금 전에 '죽을 지경'에 빠져 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실로 감격과 기쁨이 터질 듯한 어조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비롯한 모든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이고도 고질적인 절망과 고통을 안겨 주었던 '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즉 예수님을 영접한 신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완전하고도 영원한 구원이 확실히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전히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연약한 현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우리 기독신자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준 상태에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세상의 그 누구도 다시는 정죄할 수 없다.' - 이 얼마나 속 시원한, 그야말로 가슴이 뻥 뚫리는 선포입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죄의 종으로 팔려 '죽겠다'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구세주 예수님 안에 들어오게 되자 당장 '이제 살았구나!'라고 환희에 찬 소리를 외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예수'만으로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선함과 공로'에 의지해서 구원을 얻겠다는 사람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하는 처지를 평생을 가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반면에 '예수 안에서' 구원을 확신하게 된 신자는 비록 완벽하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그럴 때마다 '빈손 들고 앞에 가서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고서' '아무도 구속하지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에 더욱 뜨겁게 감격하면서 이런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찬양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두어 달 전에 칠레의 산호세에서 매몰된 갱도에 갇히게 되었던 광부 33명이 약 열흘 전에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지하 650미터의 땅속에 파묻혀 무려 69일을 지내면서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동안에 서로 싸우기도 했고 인육을 먹을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음의 절망'에 빠지게 되면 오직 '죄의 법'만이 더욱 판을 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구조대가 뚫어 준 구멍을 통하여 지상의 밝은 빛을 보게 된 순간에는 어떠했겠습니까?
그야말로 '이제 살았구나!'라는 희열과 감동만이 그 33명의 광부들의 마음속에 똑같이 가득 차게 되었으며, 동시에 그 갱도 안에서 저질렀던 일들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들을 살려내고자 하는 '생명의 법'이 바깥에서 작동됨으로써 결국 그런 기적의 구출을 성공시키게 된 것이었습니다.

'죄 아래 팔리고' '죄의 법에 사로잡혔던' 저와 여러분은 아무리 자신의 구원을 위해 '쉬임없이 힘써도' 오직 '나는 이제 죽었구나!'라는 탄식과 함께 '눈물 근심만 더 많아질'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그 '죄와 사망의 무덤'에 꼼짝 못하고 갇혀 있는 우리를 '해방'시켜 줌으로써 그 절망적인 탄식은 한순간에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환희의 고백과 감사의 찬미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 살려!'라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던 우리로 하여금 '이제 살았구나!'라고 안도의 감동을 외치게 해 주는 이 놀랍고도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정으로 감사하며 더욱 자랑스럽게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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