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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항상 기뻐하라 (빌 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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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빌 4:4-13)


I. 기쁨과 건강

사람이 화를 내는 순간 신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가를 의학자들이 조사했습니다.

① 당분이 조직속으로 스며들어서 당뇨병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② 혈압이 정상적 수치보다 90까지 상승하고 심장의 박동이 급격히 빨라지기 때문에 뇌일혈이나 관상동맥중의 원인이 됩니다.
③ 근육이 긴장되고 팽창하기 때문에 원인 모를 근육질환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④ 얼굴을 찡그리면 위장이 위축되기 때문에 소화기관이 산성화되고 위장 발작증세 내지는 만성 위장질환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또한 의학자들이 최근에 뇌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뇌 속에도 모르핀이 나온다고 합니다. 사람의 기분이 좋아질 때 분명히 마약과 거의 똑같은 분자구조로 되어 있는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기분이 좋아지면 뇌 속에서 분비되는 이 모르핀 마약은 경찰에 붙잡히지도 않습니다.

밖에서 강제로 주입한 모르핀은 몸을 해치지만 우리 몸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모르핀은 암세포를 잡아 먹습니다. 각종 염증을 치료합니다. 우리 몸에 있는 모든 근육과 혈관과 신경조직과 피를 맑게 만들고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는 겁니다. 

반대로 우리가 화를 내거나 긴장을 하게 되면 뇌 속에서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나쁜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이 물질은 사람의 몸을 활성화하여 운동 능력을 높여 주지만, 너무 많이 나오면 면역력을 파괴하여 암 세포를 활성화시키게 되고 건강한 백혈구를 잡아먹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원한과 분을 품고 하루 이틀 지내다보면 우리 몸이 급격하게 쇠약해지고 이 불쾌한 감정이 지속되면 암 등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한의학에서도 질병의 절대적인 원인이 울화 즉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태생의 캐나다 생리학자이자 스트레스 학설의 권위자인 한스 셀리에는 억지로라도 웃기를 권했습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억지로 깔깔대고 웃거나, 하루에 몇 분씩 웃어 보면 우리 몸에 굉장히 건강한 호르몬들이 많아진다는 겁니다. 심지어 영화촬영을 하든지 연극을 할때 연기로 화를 낸 사람들의 몸을 조사해 보니까 그 몸 속에 잘못된 호르몬들이 많이 생성되어 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기로라도 화를 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기쁨과 웃음은 긴장과 피곤한 근육을 풀어 줄 뿐만 아니라 오장육부에 활력을 불어 넣어줍니다. 애기 엄마들이 기뻐하면서 젖을 먹이면 아이들이 건강해 집니다. 어린애가 젖을 먹을 때에 몸에서 좋은 영양소가 나오기 때문에 병균을 이기는 저항력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분을 품고 젖을 먹이면 이상할 정도로 아이가 설사를 하고 몸이 허약해 진다고 합니다.

이는 정신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잘 참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마음에 기쁨을 잃어버리고 나면 정신적으로도 매우 쇠약해 집니다. 그래서 조금만 어려움이 있어도 짜증을 내고 인내심이 없어지고 쉽게 낙심을 하는가 하면 노이로제에 걸리기도 합니다.

마음속에 기쁨이 있으면 무슨 일을 해도 잘되고 쉽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학생이 공부를 하면 공부가 잘되고 실력이 향상됩니다. 기쁜 마음으로 주부가 밥을 하면 밥이 맛있게 잘 됩니다. 기쁨이 없으면 죽밥, 된밥, 3층밥을 만들게 됩니다. 농부가 기쁨으로 씨를 뿌리면 곡식이 잘 자랍니다. 그러나 짜증스럽게 씨를 뿌리면 싹이 고르게 나지 않고 열매가 알차지 못합니다. 

기쁨은 인생의 바퀴로 보존하는 기름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우수한 기계라도 늘 닦고 기름을 치지 않으면 곧 마모되어 못 쓰게 됩니다. 기름을 치지 않고 계속 사용하면 과열되어 망가지고 말 듯이 우리 육체도, 우리의 정서도, 우리의 영혼도 기쁨의 기름을 치지 않으면, 행복의 기름을 치지 않으면 금방 마모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II. 기쁨의 복음 - 빌립보서

오늘의 본문 빌립보서를 살펴보십시다.

많은 성도들이 빌립보서를 참 좋아합니다. 저도 제일 좋아하는 성경 몇 권 가운데 하나가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서는 늘 긍정적이고 희망적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안에는 고난을 뛰어 넘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과 빌립보서 내용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바울이 고난 가운데 유럽의 첫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됩니다. 또 설립자 바울에게 기쁨을 많이 주었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중 어느날 밤 환상을 봅니다. 유럽으로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절규를 듣게 됩니다(행16:9). 그래서 바울은 아시아 전도여행계획을 유럽여행으로 바꾸게 됩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는 중 귀신 들린 아이 하나를 고쳐주었다가 큰 곤혹을 치루게 됩니다. 호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지요. 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중 옥문이 열리고 이 일로 간수장이 회개하고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이 사건과 함께 세워진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고난 가운데 억울하다고 하소연하거나 불평 원망한 것이 아니라 기뻐 찬송하다 얻은 교회가 빌립보 교회란 말입니다.

빌립보서는 감옥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감옥과 함께 세워진 교회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쓴 편지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이라 부릅니다. 내일의 생명을 보장받지 못하는 위기의 상황속에서 매맞아 피터진 몸으로 기록한 복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헌금을 합니다. 추운 겨울 옷가지도 필요하고 사식도 필요하고 선교헌금도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젊은 목회자 에바브로 디도를 보내 헌금을 전달하고 바울 곁에서 시중을 들도록 합니다. 시중을 들던 에바브로 디도가 오히려 중병에 걸려 눕게 되고 이 일로 바울과 빌립보 교회가 함께 안타까이 기도를 하지요. 건강을 회복한 에바브로 디도편에 편지를 써서 빌립보로 보냅니다. 이 서신이 빌립보서입니다.

보내준 선물에 대한 감사와 함께 빌립보 교회가 직면한 교회적 문제들에 대한 복음적 대답을 적어 보냅니다. 그 중심에 흐르는 내용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이 “기쁨의 복음”입니다.
빌립보서는 넉 장 104절로 구성된 짧은 서신입니다. 이 네 장안에 기쁨과 관련된 단어가 제가 읽으며 점검해 보니 스무번 이상 나옵니다.
우리가 노래를 부를 때에 소위 ‘후렴’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노래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계속 반복해서 부르는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빌립보서에는 후렴이 있는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III. 성경이 말하는 기쁨

기쁨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한국교회가 말하던 기쁨이란 것이 쾌락은 아니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쁨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범사가 잘되고 건강해지는 것이 예수믿는 이유요 예수 믿고 받는 복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기쁨의 이유가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 내 환경이 달라지는 것만이 복음이 아니라 환경은 그대로 있으나 내가 달라지는 복음 말입니다. 고난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 말입니다. 

신약 성경에 “기뻐하라”라는 동사형 카이레인(καὶρειν)이 72번, 명사형 “기쁨” 카라(καρα)가 60번 정도 나옵니다. 여기 헬라어 “카라”는 세상엔 여전히 모순이 존재하고 악이 존재하고 내 삶속에 고통이 남아 있지만 구세주가 오신다는 기대에서 오는 기쁨을 말합니다. 소위 종말론적인 기쁨입니다.

빌립보서가 보여주는 사도 바울은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상황과 환경을 뛰어 넘어 기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고통 중에서도 내가 기뻐하니 너희도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때로 질병으로 고생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억울하게 오해받고 실직으로 온 가족이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에 지금까지 제 눈에 들어오지 않던 한 단어, 강조어가 들어왔습니다. 항상, 모든, 무엇에든지, 언제나 - 이런 단어가 아주 짧막한 본문 속에 상당히 여러 번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항상이라고 했을까? 왜 모든이라고 했을까? 왜 무엇에든지라고 했을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나도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이란 말 속에는 기뻐할 이유가 있을 때에 세상사람들이 기뻐할 때에 기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뻐할 수없는 상황속에서 도무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정말 기도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속에서 그래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라고 강조어 “항상”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착한 일 했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땅을 치고 분통을 터트릴 만한 일입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십니까? 불평하고 원망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땅을 치고 통곡하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사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무서운 핍박에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부딪쳐서 분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철없는 교인들입니다. “잘 놀아라. 너희들은 구제불능이다. 생각이 그렇게 밖에 안돼냐.” 하고 빌립보 교인을 향하여 호된 책망을 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감사했고 기뻐했고 또 내가 감옥에 갇혀서 기뻐하듯이 너희들도 그런 상황속에서 기뻐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참 억울한 일이 많습니다. 분통터질 만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정말 세상을 향하여 주먹을 휘둘러보고 싶은 그런 삶의 환경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때에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래도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의 존재입니다. 상황과 환경따라 좌우되는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존재 자체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전천후 행복인입니다. 

월요일엔 원래 행복한 날, 화요일엔 화가 나도 기쁜 날, 수요일은 수도 없이 웃는 날, 목요일엔 목청 높여 노래하고, 금요일엔 금새 좋고 또 좋은 날, 토요일엔 기쁨이 톡톡 튀는 날, 주일엔 주님과 함께 즐기는 날.
이게 우리들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종말론적 기쁨 이라고 합니다.

IV. 주 안에서

사도 바울은 성경적인 “기쁨”의 깊은 의미를 참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끝내버립니다. - “주 안에서 기뻐하라” 
본문 4장 4절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10절에서도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이라고 말합니다.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도 결국 주안에서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3장 1절에서도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기뻐할 조건이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주 안에서”입니다. 바울의 신학은 한 마디로 “주 안에서” - 엔 크리스토의 신학입니다. 바울 서신 중에 “주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이 말이 무려 132회나 나옵니다. 여기 “주 안에서의 기쁨”은 구원얻은 기쁨, 절대적인 기쁨입니다.

♪ 구원함을 얻은 기쁨 세상에서 제일이라
   영광의 길 허락하신 내 주예수 찬양하네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기쁨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기쁨입니다. 상실되지 않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확실한데 이까짓 문제가 뭐가 그리 대수입니까? 천당과 영생이 이토록 틀림이 없는데 영원하지 않는 이 땅의 고난과 슬픔이 어찌 나를 이길 수 있습니까?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할 수 있는 것도 예수 때문에 고난 받을 수 있는 것도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손해보는 것도 기쁨입니다.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요 기쁨입니다.

주 안에서의 기쁨! 이것은 「나는 상황의 주인」이라는 선언입니다. 환경은 언제나 바뀝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영원합니다. 환경은 일시적이요 순간적이요 모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의 나의 존재, 나의 신분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에 갇혀 울고 웃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에겐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V.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오늘 읽어 드린 본문 마지막절 - 빌립보서 4장 13절에 “기쁨”의 본질을 설명하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이 구절은 한국교회 성도님들이 대단히 좋아하는 구절이지요. 많은 한국교회 신자들이 여기 “모든”이란 말 대신 자신의 소원과 자신의 꿈을 넣어 기도합니다. 괜찮습니다. 참으로 좋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신앙은 처음 예수 믿는 어린 신자들이나 그렇게 적용하는 겁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성경 지식이 더해지다 보면 뜻밖에도 이 본문은 그런 배경 그런 약속을 깔고 쓰여진 성경이 아니라는 데에 우리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말씀드린대로, 바울 선생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들이 산 넘고 물을 건너 멀고 먼 로마까지 위문품을 싸들고 면회를 왔습니다. 감옥생활에서 필요한 모든 물건을 한 보따리 풀어 놓았더니 사도 바울이 그 위문품을 받아들고 답사를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바울 선생 고생한다고 찾아갔더니 엉뚱하게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가져온 위문품은 참으로 감사하다. 그러나 이 위문품이 주는 기쁨과 의미는 나에게 있다기 보다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거기에 있다. 나의 기쁨은 환경 여하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기 때문에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와 궁핍에도 그것을 감당할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있다. 그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즉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은 무슨 소원이든지 이룬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기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배부른 것이 배고픈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부른 것이 나를 교만하게 하거나 방종하게 하지 않듯이 배고픈 것도 나를 비굴하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거기서도 나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배짱이 나왔을까요? 그가 기뻐한 것은 교회가 보내준 넉넉한 사식이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의 인생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가 살아가는 이유도 그분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했고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때문에 죽어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가장 당황해 하고 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생각하다가 그 반대현상에 부딪힐 때 너무나 쉽게 낙심해 버리고 맙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렇게 묻습니다. 
“신앙이 현실 생활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성경 열심히 보면 장사가 금방 잘 되는가?”

성도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고 전도할 때 마술적으로 돈이 생긴다면, 기업에 매상이 오르고 파격적인 승진이 있는가 하면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한다면 전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 학원이 생기고 돈 내고 이곳 저곳 기도 배우러 다니느라 야단법석일 겝니다.

이런 세속주의적 사고방식이 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 모든 신앙인에게 만연되어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사도 바울과 같이 역설적으로 살고 역설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단 몇 사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의인 열 사람만이라도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를 보고 힘을 얻고 그를 바라보고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복음의 능력을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반드시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시련의 계곡을 건널 수 있습니다. 이 중간 다리를 견디지 못해 포기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만사형통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 속담에 “시합 중에는 점수를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간에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직면하는 상황들을 너무 조급하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길을 열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순간적인 전투에서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궁극적인 전쟁에서는 승리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어떤 환경속에서도 풍부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볼 때 바울의 생애는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매맞고 괴로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풍성한 삶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의 풍성한 삶 - 이것이 기쁨입니다.

VI. 온도계 ․ 온도조절기

저는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언젠가 우리교우들에게 온도계와 같은 인생과 온도조절기와 같은 인생이 있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온도계”와 같은 사람이 있고 “온도 조절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내려갑니다. 날씨가 더우면 올라갑니다. 이런 사람은 환경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신앙생활이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기쁨이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온도 조절기는 날씨가 추우면 조절기로 올립니다. 조절기에 따라 방안 온도가 오히려 달라집니다. 날씨가 더우면 조절기를 내리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안으로부터 오히려 온도를 조절합니다. 환경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의 삶이요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온도계를 살펴보면, 
어떤 사람들은 돈이 온도계, 어떤 사람은 주식이 온도계입니다. 주식이 올라가면 갑자기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주식이 뚝 떨어지면 코가 쑥 빠져 다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의 성적이 온도계입니다. 자녀들의 성적이 올라가면 세상 살 맛이 납니다. 그런데 성적이 뚝뚝 떨어지면 만사가 재미가 없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외국에 나가있는 아들이 온도계입니다. 아들이 웃으면서 전화하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고 우울한 전화 한통 받으면 일주일동안 기분이 나쁘답니다. 이것이 온도계 인생이지요. 

이런 온도계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온도계에 집중하여 살면 환경 때문에 울고 웃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 때문에 내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 이것은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들입니다. 환경이 어렵지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살림이 막다른 골목 같지만 믿음의 눈을 열고 보면 창조적으로 긍정적으로 능동적으로 그 사건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삶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온도조절기의 영역을 계속해서 키워 가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온도계의 영역이 커져 가면 온도조절기의 영역이 작아집니다. 온도조절기의 영역이 자꾸 커져 가면 온도계의 영역이 작아집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기뻐하며 삽니다.
고난과 고통중에서도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요.
당신은 환경의 노예가 아닙니다. 환경의 주인입니다. 
항상 기뻐합니다. 매일 행복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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