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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은 책임입니다 (마 25: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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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책임입니다 (마 25:14-30)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어렸을 때 그의 집에는 매우 좋은 도자기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도자기를 좋아했고 아끼며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여동생이 그 도자기들 중에서도 가장 예쁜 것을 달라고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졸랐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끼는 도자기를 딸에게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 톨스토이의 여동생은 또다시 아버지에게 눈물까지 흘리면서 강력히 졸라대기 시작했습니다. 

이쯤 되자 아버지가 딸에게 도자기를 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에게 도자기를 받은 여동생은 그 도자기를 손에 꼭 움켜쥐고 오빠에게 보여주고 자랑도 하다가 약을 올려주려고 오빠 방으로 뛰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문턱에 걸려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그 도자기는 바닥에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으로 박살이 났습니다. 그때 깨져 조각난 도자기를 바라보면서 여동생이 울면서 하는 이야기가 “누가 우리 집을 지었느냐, 집을 지은 사람이 내가 넘어지도록 집을 짓는 바람에 도자기가 깨어졌다.”고 대성통곡을 하더랍니다. 

자기잘못, 제 실수는 탓하지 않고 집을 지은 건축자를 탓하고 원망하는 이 여동생을 기억하며 후일 [톨스토이]는 <집 지은 사람의 잘못일까?>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가고 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혹은 지연 공동체로, 혹은 학연 공동체로, 혈연 공동체로, 한편으로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문제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각각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생각이 다르고, 성장과정이 다르고, 그리고 처한 현실이 다르다 보니까 당연히 발생하는 문제들이겠습니다만 하여간 그런 문제가 생길 때 보면 대략 세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먼저는 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뭐 우리에게 익숙한 속담이 하나있지요. “못 되면 조상 탓, 잘 되면 내 탓”이라는 속담입니다만 문제는 매사에 다른 사람 탓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탓하면서 자신은 모든 일의 희생자라고 떠듭니다. 한 마디로 책임회피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사회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두 번째는 변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는 않지만 모든 일에 변명하기를 즐겨합니다. 그 변명 하나로 어떤 실패나 실수도, 어떤 무책임도 정당화시키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라는 모든 환경과 조건이 변명거리입니다. 이걸 즐기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밴자민 프랭클린]은 말하기를 “변명에 능숙한 사람은 성공적인 다른 어떤 것에도 능숙하지 못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죠지 워싱톤]은 “모든 실패의 99%는 완벽하게 변명하는 사람들에게서 온다.”고 말했습니다. 변명하는 것은 정말 나쁜 습관입니다. 남을 탓하고, 매사를 변명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이런 사람들이 많은 공동체일수록 발전하기가 힘듭니다. 아마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는 달리 세 번째는 늘 책임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성공도 실패도 늘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성공하기 위해서 자기가 감당해야할 책임을 먼저 생각하며 살고, 실패했을 때는 그 원인을 찾으면서 먼저 자기의 책임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물론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성공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잘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많아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 것인가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책임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냐는 것과 어디까지가 내 책임인가에 대한 문제를 한 번 쯤은 생각하면서 살아야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부분과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은 내가 마땅히 감당해야할 것이지만 피치 못하게 내가 감당하지 못 할 부분은 내가 할 수 있는 부분만큼을 찾아내는 것이 지혜입니다. 

가령,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난 안 돼. 난 할 수 없어. 전에도 나는 안됐으니까 지금도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자기책임의 한계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까지도 부인하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놓고 한편으로 하나님을 잘 안다고 고백한다면 이건 큰 잘못입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내 책임의 한계를 하나님에게까지 넘기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불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외국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다른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한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 주인이 돌아왔고 맡겨둔 달란트에 대한 결산을 가졌습니다. 그 때에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과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장사를 해서 각각 두 배를 남겨서 칭찬을 들었던 반면에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이익을 남긴 것 없이 주인에게 내보였다가 책망을 받은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어떻게 관리할 수 있느냐를 말씀하십니다. 즉 책임에 대한 문제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와는 다르게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책망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게 아니라 맡겨진 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봅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그랬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꽤 오래인 듯합니다. 그러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충분히 하면서 시행착오도 겪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여겨집니다. 

자, 그런데 이러한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아마도 한 달란트 맡았던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있습니다. 주인이 떠나간 지 일 년이 지나고 이년, 오 년....그리고도 그 후에 오랜 동안 돌아오지 않으니까 ‘어쩌면 주인은 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주인이 맡긴 것에 관해서 전혀 책임 의식마저도 상실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뭐 받은 것도 남들만큼 많이 받은 것도 아니고 그리 대단하지도 안잖아요. 그리고 만약에 주인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많이 준 사람이나 기억하지 겨우 한 달란트 준 자기의 것을 기억이나 하겠느냐는 생각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추측입니다만 정말 이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그랬다면 이 종이 굉장히 크게 실수한 것입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 되어 있는 마25장 전체의 내용이 무슨 내용입니까?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주님의 재림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두뇌로 고백하는 것과 마음으로 믿고 그렇게 사는 것은 다릅니다. 

정말 주님이 오실 것을 믿고, 다시 역사와 시간 속에 그 분이 돌아오신다는 이 사실을 여러분 믿으십니까?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사십니까? 그 분이 다시 돌아오실 것이고 따라서 내가 살아왔던 삶, 또 인류의 모든 역사는 그 분 앞에서 반드시 심판되고 결산 될 그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그 사실을 참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좀 더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섯 달란트를 받았으면 거기에 해당하는 만큼 최선을 다하고, 두 달란트를 받았으면 거기에 대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 달란트를 받은 자에게 다섯 달란트를 남겨 오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최선을 다하는 책임 있는 삶을 원하셨습니다. 

오늘 한 달란트를 받은 자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악한 생각에다가 게으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누구든지 책임을 다하지 않고 어떤 대가를 받으려 한다면 그것이 곧 불한당이요, 도적입니다. 

반면에 칭찬을 듣는 종은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자, 애초에 많이 받은 것을 생각한다면 주인의 적은 일에 충성했다는 평가는 모순인 듯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도 ‘처음부터 큰 것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도 ‘나도 처음부터 그만큼 받았다면 열심히 충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처음부터 큰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큰 것을 이루려면 작은 것부터 이루어야 되는 것이 순서입니다. 말하자면 오늘 주인의 칭찬은 근본적인 마음과 태도가 성실했다는 것입니다. 큰 일, 작은 일을 구별하지 않고 책임지려고 하는 근본이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큰일에는 큰 책임이 따르고, 작은 일에는 책임감도 작아진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입장입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이 판단기준일지 모르지만 신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맡겨진 일이 크면 부지런하고 맡겨진 일이 작으면 게으르고 한다면 거기에 무슨 책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 소리 하지 아니하고 주인을 신뢰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주시는 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고 차근차근 하나씩 이루어나가다 보니까 충성의 열매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씨가 얼마나 순수하고 착합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십니까? 혹시 마음으로 ‘큰 것을 받았느냐? 작은 것이냐?’를 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의 마음을 가졌습니까? 하나님께서 결산하실 날이 멀지 않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 받고 후회하지 말고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 칭찬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또 다른 이름은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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