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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Rest) (창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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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Rest) (창 2:1-3)


집에서 공부할 생각은 안하고 방에서 놀고만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애원을 합니다. 
“제발 공부 좀 하라”고. 
“공부해서 무엇 하게요?” 
“그래야 좋은 직장잡고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아들은 다시 묻습니다. 
“일해서 무엇 하게요?” 
“그래야 돈을 벌수 있지 않겠니?” 

아들은 다시 반문합니다.
“돈 벌어서 무엇 하게요?” 
“그래야 장가도 들고 집도 사지 않겠니?” 

아들은 또 묻습니다. 
“집사서 무엇 하게요?” 
“그래야 편히 놀면서 여생을 살지 않겠니?” 

그러자 아들이 대답합니다. 
“그럼 지금이나 마찬가지네요” 

안식 곧 <쉼>은 이 땅을 사는 모든 인간의 갈망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는 창조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인간을 복 주신 일이라고 기록합니다. 무슨 복을 먼저 주셨을까요? ‘안식의 축복’입니다. 인간은 창조의 제6일 제일 마지막에 창조됩니다. 이렇게 창조된 인간이 맞이한 첫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첫날을 쉼으로 맞이하게 하신 것입니다. 먼저 푹 쉬고, 이 쉼을 통해 얻어진 충만한 에너지로 인생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의 우리는 안식이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요?
성경은 그것을 인생이 죄를 범하고 타락한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신학에서는 그것을 원죄(original sin)라고 합니다. 성경은 원죄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을 두 가지로 증언합니다.

첫째는, 인생은 목적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본문 2:1은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은 모든 만물이 창조주의 의도와 설계를 따라 지어졌다는 말입니다. 이제 모든 만물은 목적을 따라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지어진 인간이 방황해야 한단 말입니까? 

창3장에 보면 그것은 인간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원죄요 타락의 의미인 것입니다. <죄>는 본래 “목표를 빗나갔다”(missing the mark)는 뜻을 갖습니다. 죄가 인생에게서 안식을 빼앗고 우리에게 방황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안식>을 영어로는 ‘Rest’라고 합니다. 

그런데 ‘안식이 없음’을 표현하는 단어를 ‘restless’ 혹은 명사형으로 ‘restless-ness’라고 합니다. <방황>이란 뜻입니다. 안식이 없으면 우리는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단어는 아마도 속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날마다 빠르게 그리고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지만 방향을 상실한 채 달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오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시대의 한국인을 상징하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뉴욕으로 출장을 간 한 회사원이 공항에서 택시를 잡았습니다. 첫 마디가 무엇이었을까요? “빨리 갑시다” 그런데 한참 가다가 보니까 자기가 의도한 방향으로 안가고 있습니다. 정중하게 다시 묻습니다. “기사님, 어디로 가십니까?” 기사도 정중하게 대답합니다. “손님, 손님은 저에게 빨리 가자고만 하셨지 어디로 가자고 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요? 우리는 빨리 빨리 움직이고 살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닙니다. 방향입니다.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방향을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 멈춤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문화는 속도를 부채질할 뿐 속도를 멈추고 방향을 모색할 여백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 시대의 속도 문화를 상징하는 기호식품이 라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라면은 일본 사람들이 먼저 만들었다고 하지만 체질적으로 한국인들에게 더 맞습니다. 물만 끓이고 수프를 집어넣으면 됩니다. 그래서 라면의 종류에 관한 한 오늘날 우리는 숫자마다 라면을 만들어 냈습니다. 1-번지 라면, 2-백량 라면, 3-양라면, 4-발면, 5-향면, 6-개장 라면, 7-보면, 8도 라면, 9-은면, 10-열라면/오죽하면 한국 기독교인들은 라면을 가지고 <라면 신경>이라는 신앙 고백문을 다 만들었을까요. “전능하사 안성 탕면을 만드신/농심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그 외아들 신라면을 믿사오니/이는 분말 수프로 잉태하사 건더기 수프를 낳으시고/불위에 끓는 물에 고난을 받으사 상위에 오르시고/죽은지 삼분이면 졸깃한 면으로 다시 살아나사/배고픈 자의 배를 부르게 하옵시며/젓 가락으로 맛과 영양을 심판하러 오시리라/거룩한 새우탕 컵 라면과 서로 교통하는 것과 국물을 베푸시사/몸이 다시 사는 것과 먹은 김치와 더불어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라~면” 그러나 이런 조급한 삶의 속도 때문에 오히려 오늘의 한국인들은 삶의 향방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한 것을 자랑하면서도 행복지수는 한없이 추락해 버린 불행한 사람들, OECD국가 자살률 제1위 국가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인생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둘째로, 인생은 주인을 상실한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의 목적을 상실한 방황의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생의 인도자를 상실한 까닭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성경의 주어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의 첫 구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기록합니다. 그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삶의 주인이십니다. 

수년전 세상을 떠난 스위스 라브리 운동을 펼치신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쉐이퍼(Francis Schaffer)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멋진 말이지만 가장 무서운 반 성경적인 말을 한 사람이 영국의 시인 윌리암 어니스트 헨리(William Ernest Henry)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한 말은 여러분은 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I am the master of my fate) 내 영혼의 선장이다(I am the captain of my soul)" 

이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에 의하면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섭리하시는 하나님-그분만이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내 영혼의 선장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에서 자살을 죄로 간주하는 원인이 거기에 있습니다. 나는 내 생명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 묻습니다. 그렇게 내 맘대로 살아온 여러분의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과연 의미와 가치, 보람과 기쁨으로 가득 찬 여정이었습니까? 행여나 뭔지 모를 허무와 좌절, 고독과 방황의 인생은 아니었습니까? 왜 그럴까요? 당신은 당신의 삶의 진정한 주인을 잃어버리고 살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사1:3) 

이렇게 주인 되신 하나님을 마음에서 거부하고 사는 것성경은 그것이 가장 무서운 범죄라고 증거합니다. 그것은 자식이 부모를 부인하는 것보다, 제자가 스승을 부인하는 것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창1:3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나서 제7일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신 날>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은 특별하게 구별해 놓으신 날이란 의미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안식일은 그냥 안식만 하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가 우리 인생의 주인 되심을 기억하는 날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를 진지하게 예배하는 사람마다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오셨다구요? 그러면 이제 그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길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잊고 살아온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계시하고 그 하나님께로 우리 인생을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그는 또 이렇게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11:28) 아니 그는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제공하시고자 우리의 짐,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우리가 우리의 죄로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죄 값을 지불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분에게 나아오면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의 참된 안식과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그의 나이 55세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어려서 떠났던 교회로 돌아오며 그의 책 <신앙론>에서 이런 글을 남깁니다. “나는 나의 55년의 인생동안 최초의 15년의 소년기를 제외하곤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 나이 18세 되던 해 나의 친구가 내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라고 한 말에 나는 설득되어 어릴적의 나의 신앙을 떠났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나에게 있어 종교는 속박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 나이 55세 나는 내가 스스로 버린 어머니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단순히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의 구주인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것이다. 그안에서 처음으로 나는 안식을 발견했다”

당신에게도 이런 쉼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그러면 당신은 무엇보다 먼저 인생의 구주요 주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오셔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의 쉼을 누리며 즐겁게 한 세상 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그 날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고백하며 눈을 감으시게 될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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