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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라!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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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라! (눅 17:11-19)


지난 한 주간은 칠레 산호세 광산에서 69일 동안 사투를 벌이다 구조된 33명에 대한 생명의 드라마로 전세계에 희망과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깊은 죽음의 구덩이에서 빠져 나온 한 광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땅 밑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악마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싸웠고, 하나님이 이겼다.  나는 하나님의 손을 잡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의도하든 하지 않든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 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절망적인 상황에 넘어지고 실망하기로 결정하거나, 아니면 쓰라린 상처를 부여잡고 일어나 꿋꿋이 전진하면서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일어나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 언제나 자유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입을 여는 사람들 앞에서 자유하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과 그런 절망적인 선언을 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의 능력입니다.  이 믿음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고난의 때야 말로 내 믿음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어려운 때야 말로 하나님이 나를 증인으로 세우시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전해 줄 믿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무슨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 앞에 홍해가 펼쳐진 것은 하나님께서 더 위대한 역사를 보여주시기 위해서라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주님을 붙들고 맞서십시오.  믿음으로 맞서 싸우십시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두려움을 극복하는 능력입니다.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기에 나는 이 두려움 속에서도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있음을 믿기에 나는 이 흑암의 고통 속에서도 찬송할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에 대해서 단 한 점의 의심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것은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시편 103편 2절에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것은 기억하지 말고 잊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컨대, 이사야 43장 18절에 보면 우리가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혼란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고 사는가 하면, 반대로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경험했던 열 명의 나병환자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열 명이 함께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로 달려와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함께 호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주님으로부터 처방을 받았습니다.  그 처방은 이것입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들을 몸을 보여라 그러면 나을 것이다.

당시에 나병이 나아서 이제는 사람들과 접촉을 해도 좋다는 판단을 제사장들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같은 길에서 함께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열 명 중에서 오직 한 명만이 주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하신 유명한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그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오직 한 명만이 주님께 돌아와 감사를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바로 이 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가 감사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할 이유를 함께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가 과거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사를 잊어버리는 것은 과거를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열 명의 나병환자들, 그들이 과거에 나병환자로 살 때 받았던 수모와 불행했던 과거를 기억한다면 그들이 지금 치유를 받고 새로워졌다는 사실 앞에서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 오직 한 명만이 주님께 나아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다면 이 한 명만이 감사를 잊지 않을 수 있었던 어떤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18절이 그것을 우리들에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해 보십시오.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돌아온 그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셨습니다.  당시에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굉장한 핸디캡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선민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사람들을 사람 취급도 안 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편견과 불평등한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방인이 그의 핸디캡이었지만 그러나 그가 치유를 경험했을 때 이 사람은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더 큰 감사와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입니다.  "아, 나 같은 차별을 받던 사람에게도 주님은 차별 없이 은혜를 주셨구나."  이것이 바로 그가 주님께 돌아와 주 앞에 엎드려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자기 평생에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았던 대표적인 사람 가운데 다윗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감사로 평생을 살아온 좋은 본보기의 인생이었습니다.  시편을 보면 찬양이 가득한 감사의 시 대부분이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과거의 모습을 잊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7장 18절의 말씀을 다같이 찾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가난한 목동의 시절을 잊지 않았습니다.  "주님, 내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나는 가난한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에 이르게 하셨습니까?"  그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겸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를 생각할수록 감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도 조용히 우리가 살아온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떠올려 본다면 우리의 인생 속에도 감사의 노래가 저절로 떠올라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감사의 교훈을 많이 가르쳤던 대표적이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보다 근본적으로, 보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감사를 드려야 할 이유를 에베소서 2장 11절과 12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생각하라."  한 마디로 말해서 잊지 말아라는 겁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너희도 과거에는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선택된 백성이라는 표시였는데, 너희는 할례도 받지 않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약속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고, 따라서 내 인생에 궁극적인 소망도 없었고, 하나님도 모르고 살았던 그것이 나의 과거의 정체성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던 내가 어느 날 인생의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녀로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현재의 감동을 붙들고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감사의 영성으로 한 평생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의 과거를 기억하는 것 못지 않게 지금 현재의 감동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동을 붙들고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행복감을 느낍니다.  "나는 행복하다."  이런 행복의 느낌이라는 것은 순간 순간의 감동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를 경험한 것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다가"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몸을 보이러 가다가 깨끗함을 얻었습니다.  '가다가'라는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현재 부정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진행형과 비슷한 표현이라고 이해를 하면 되겠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that, as they went"라고 해서 과거형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도 있고, "And as they were going"이라고 현재 진행형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번역은 'going'입니다.  그들은 제사장을 만나러 가는 도상에서 갑자기 치유가 임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어, 내 몸이 달라졌네!"
 
그 순간 아홉 명도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요?  "어, 내가 나았네!  그분 말이 진짜네.  내가 언젠가 그분을 만나서 감사해야지."  분명히 그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감사하는 것보다도 다른 그 무엇이 먼저였습니다.  아홉 명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만나서 감사하는 것은 지금 당장이 아닌 그 다음의 순서일 뿐이었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감사해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은 지금 자신에게 치유와 감동이 임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감동을 붙들고 바로 예수님 앞으로 뛰어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는 현재의 감동을 현재의 감사로 주님 앞에 드리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한 순간 순간을 감동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감사를 뒤로 미루면 안됩니다.  감사는 감동이 있는 바로 그 순간에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성령이 어느 한 순간 우리를 감동할 때 그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놓치면 그 감동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란 존재의 소멸이 아닙니다.  감동의 소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성령의 감동이 임하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바로 이 순간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우리가 보다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 민감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얼마 안 되는 믿음의 여정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기도하다가 어떤 사람이 생각이 나고, 기도하다가 누구에게 연락을 해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면 그대로 했을 때 그것은 언제나 기쁨이었습니다.  언제나 행복이었습니다.  언제나 경이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그냥 놔두었습니다.  뒤로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그러면 언제나 후회였고 아픔이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에 민감하지 못한 그 사실 앞에서 안타까워해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의 영성으로 한 평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 한 순간 순간을 감사의 영성으로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순간 내게 임하신 성령님의 감동에 민감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성령님께서 나에게 찬양하라고 감동을 주시면 찬양하십시오.  성령님께서 고백하라고 명령하시면 고백하십시오.  성령님께서 감사하라고 명령하시면 감사하십시오.  길을 걸어가다가 지금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 주저하지 말고 전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성령이 감화하고 감동하는 대로 하십시오.  결코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오늘도 감동이고, 내일도 감동일 것입니다.  당신의 인생은 언제나 감동일 것입니다.

옛날에 사막에서 수도를 하던 수도사들을 보면 그들이 추구했던 행복 가운데 "현존의 행복을 추구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들이 살았던 사막이라는 환경은 얼마나 열악한 환경입니까?  그런데 그들이 사막 속에도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현존의 행복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이 순간 성령님께 순종하는 행복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성령님을 따르는 기쁨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성령님 앞에 내 마음으로 반응하는 기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존의 행복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이런 감동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평생 감사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무엇보다 성령님께 민감한 매 순간 순간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감사를 잊지 말고 살아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우리가 미래의 여정을 기대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감사가 있습니다.  오늘 현재에도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가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살아야 할 미래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사람이 남아 있는 내 인생의 길을 행복하게 걸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오늘을 인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내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현재를 인해서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미래가 준비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위대한 설교자이셨던 스펄전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촛불을 인해 감사하면 하나님은 달빛을 주시고, 내가 달빛을 인해 감사하면 하나님은 햇빛을 주신다.  내가 햇빛을 인해서 감사하면 햇빛도 필요 없는 천국을 선물로 주신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경험한 행복이 바로 그런 행복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가 육체의 치료를 받자마자 곧장 돌아와서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리자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1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그가 육체의 치유를 인하여 감사했더니 주님께서는 그의 영혼의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여기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이 그가 믿음으로 육체가 치유 받은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아홉 명은 믿음을 갖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그들도 믿음으로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에게만 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선포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육체의 치유로 인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돌아와 주님 앞에 엎드린 순간 그분은 내 육체의 치료를 위해서만 필요한 분이 아니라 내가 평생을 의탁할 수 있는 분으로 믿어졌을 것입니다.  그의 이 엎드림은 그가 남은 인생 길을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런 믿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육체의 치유를 감사했더니 주님께서는 그에게 영혼의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감사는 또 다른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감사는 축복의 미래를 여는 열쇠입니다.  무엇보다 본문 1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감사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그렇게 볼 때 감사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현실이 답답하십니까?  감사해 보십시오.  오늘의 현실이 짜증이 나십니까?  감사해 보십시오.  멋진 감사의 제단을 쌓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저는 참으로 감동적인 한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닉 부이치치의 허그"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닉 부이치치라는 한 젊은이가 자신의 한계를 껴안고 승리한 감동적인 이야기의 책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1982년 12월에 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기형적인 아이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난 이 아이를 보고 절망해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의 암담한 앞날 때문에 절망에 빠져 있었고, 자식이 정상적인 삶을 살기는 틀렸다고 생각해서 절망했습니다.

닉 부이치치도 어렸을 때는 자신의 삶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 살 때 바다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모두 세 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열세 살 때 자살 시도를 멈췄다고 했습니다.  그가 희망을 발견한 것은 열다섯 살 때 성경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하는 성경 말씀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하나님이 나를 향해 계획을 갖고 있다고 믿자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이후에 그는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팔다리 없이 발가락 두 개만 있는 몸이지만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서핑을 하고, 스쿠버다이빙을 합니다.  노래를 작곡한 음악가이자 뮤직비디오를 찍은 가수이고, 영화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야기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주고, 낙심된 자를 다시 일으켜 세워줍니다.

닉 부이치치는 이 책에서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고민했던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 또한 내 몫으로 주어진 환경에 한없이 절망했던 시간이 있었다.  수영이나 스케이트보드 타기처럼 남들이 하는 활동들을 해보려고 애를 쓸수록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깨달음 역시 커졌다.  나는 땅을 치며 슬퍼했고 끝없이 우울했다.  늘 마음이 아팠고 항상 부정적인 생각에 짓눌렸다.  물론 주위에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들끓었지만 정작 나는 늘 외로웠다.  사랑하는 이들에게 죽는 날까지 짐이나 되지나 않을까 두려웠고 걱정스러웠다.  낙심천만이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닉 부이치치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 축복 받은 사람이다.  지금 나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인생을 즐기고 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
그는 솔직하게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겁나고 두려운 시기가 없었더라면 믿음과 목적의식이 지금처럼 단단히 여물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한 번 도전해 보려는 의욕과 열정이 있다면 반드시 목표를 이루게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 역시 일년 내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이 원리를 신뢰하는 것은 아니다.  화면에 보이는 그 빛나고 행복한 모습은 고단하고 긴 여정 끝에 얻은 결실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이 언제나 맑은 것만은 아닙니다.  일년 사시사철 내내 맑은 날만 계속된다면 세상은 온통 사막이 되고 말 것입니다.  땅이 기름지고 옥토가 될 수 있는 것은 맑은 태양과 바람과 구름과 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에 언제나 맑은 날만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온통 그 마음이 사막과 같아서 삭막해 질 것입니다.  사람이 겸손할 수 있는 것은 고난과 시련의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자신을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그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하나님이 내 인생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목자가 되심을 믿었더니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잔이 넘치는 풍성한 은혜를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사망의 음침한 그림자가 엄습해 올 때 우리는 절망하면서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의 변두리에 가면 '망쉬예트 나사르'라는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악명 높은 슬럼가가 있습니다.  그곳은 동네 전체를 감싸고 있는 지독한 악취 탓에 '쓰레기 특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5만명에 이르는 그곳의 사람들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빈민가에서 표현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끔찍한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1천 8백만명의 카이로 시민들이 쏟아내는 쓰레기를 긁어모아다가 쓸만한 것들을 골라내는 일로 하루 하루 목숨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쓰레기더미, 가축우리, 침출수가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흘러가는 도랑을 따라 뻗은 좁다란 길에 서면 누구라도 절망에 찌든 얼굴들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나없이 힘들게 사는 것은 맞지만 그들은 이웃을 배려할 줄 알고, 대단히 행복해 보였고, 어느 누구보다도 튼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절대 다수인 98퍼센트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이 땅이 아닌 영원한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생활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기적을 믿으며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에 감사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만 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면서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그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쓸모 없는 존재로 여기고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해 버리는 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꿈을 포기하는 것은 창조자를 상자 안에 가둬버리는 짓이나 다름없다.  그분은 특별한 뜻을 가지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삶을 작은 틀에 묶으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지금 몹시 고달픈 삶을 살고 있더라도, 형편이 나아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  분명히 말하지만 상상도 못했던 멋진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꿈에 초점을 맞추라.  최선을 다해 그 비전을 좇으라.  누구나 환경과 조건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다.  무엇이 됐든 기대하고 소망하는 일들을 추구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
이런 의문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올 때 나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으로부터 변함없이 사랑을 받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으로 당신을 지으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에 민감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만지심에 민감하십시오.  그리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는 조건들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으로 주님과 함께 내 앞에 펼쳐진 그 한계를 껴안고 일어나십시오.

닉 부이치치는 책에서 이런 말을 우리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에 당신이 숨을 거둔다면 누구를 안아주시겠어요?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말씀하시겠어요?  돈이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학위가 평화를 줄 수 없습니다.  행복과 평화는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시간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상처를 치유합니다."

그는 여러분이 저에 대해서 모르는 게 두 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제가 부자라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나의 내면에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넘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제가 욕심쟁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아흔 살 이상 살 겁니다.  아니 수억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명하고 솔직한 것은 저와 여러분은 닉 부이치치보다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복의 감동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를 감동 감화시켜 주셔서 온 몸으로 감사하는 사람, 범사에 감사를 최우선에 두고 생활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우리 주변에 있는 가족들과 교우들과 이웃들이 진정한 행복은 감사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는 추수감사절은 우리가 진정 감사함으로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질병이 치유 받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불평의 질병, 남을 탓하는 질병, 날마다 분노하는 질병이 모두 고침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정에 있는 모든 쓴 뿌리들이 치유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제대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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