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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체험, 역사, 계승 (수 2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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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역사, 계승 (수 24:31)


모세의 뒤를 이어 광야교회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의 고별설교를 임종을 당해보지 아니한 저와 여러분이 무심코 지나치는 것은 교만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상을 유산으로 남기고 싶은 불타는 여호수아의 단심(丹心)을 생의 마지막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자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오늘도 우리에게 '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고 분명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신앙선택이 중요합니다. 수많은 신앙고백 중에 내가 선택한 신앙고백! 내가 선택한 신학노선! 내가 선택한 신앙노선! 내가 선택한 지도자! 그것은 곧, 또 다른 나(나의 ID)를 창조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적 선택은 처음부터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여호수아의 절절한 호소는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이방신을 버리고 정녕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약속케 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너희들 스스로가 증인이 되었으니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을 제하여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아니하고,

본문 24장 26-27절에 『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취하여 거기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라 그런즉 너희로 너희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하고 』라고 했습니다. 

이 돌들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돌을 의인화 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치 않게 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돌을 의인화시킨 일은 성경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했습니다(눅 19:40).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는다고 했습니다(욥 5:23). 돌의 기력이라고 했습니다(욥 6:12).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다고 했습니다(슥 3:9).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다짐을 받고 증거를 세웠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의 나그네 세월 110세를 마감하고 경내에 있는 딤낫세라에 장사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떠난 다음에 이스라엘에 두 가지 양상이 표면화 되었습니다. 

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들을 직접 체험한 자들에게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본문 24장 31절에 『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고 했습니다.
사사기 2장 7절에 『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호수아와 여호수아 당시의 장로들이 모두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참모로서 활동했고 특별히 회막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습니다.
아모리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태양을 머물게 하고, 달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하게 했습니다(수 10:12-14).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습니다(출 17:8-16). 가나안 정탐의 선봉에 나섰습니다(민 13:1-25).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호수아를 안수하여 모세의 후계자가 되게 했습니다(민 27:18-23). 요단강 도하 작전, 여리고성 점령, 아이성 점령, 가나안 일곱 족속을 정벌한 후 12지파에게 분배했습니다. 도피성을 설치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통한 하나님의 기적적 구원을 목도한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여호와를 잘 섬겼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지도력이 탁월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Ⅱ.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들이 현장 체험이 아닌 역사인 자들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병행 구절인 사사기 2장 10절에 『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큰 일들을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의 안중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시되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참혹한 말입니다. 

체험세대와 역사세대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세대는 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삿 2:11-12). ② 하나님이 보내신 사사의 말을 순종치 아니했습니다(삿 2:17). ③ 열조들이 행하신 길을 속히 떠났다고 했습니다(삿 2:17). ④ 열조와 세운 언약을 저버리고 말씀을 순종치 않았습니다(삿 2:20). ⑤ 이방인들과 경계를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삿 3:5). ⑥ 마침내 이방인들과의 혼인이 휭횡했습니다(삿 3:6). 
이 말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경계가 무너지고 가치관이 다르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불신자들과 가치관이 비슷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타락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첫째,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효과적인 증거와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그 원인입니다. 

둘째, 부존효과(賦存效果), 소유효과(所有效果)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이른바 남의 밥에 있는 콩이 더 크게 보이고 상대적 빈곤감에 허덕이다 보니 자신이 소유하고 부존(賦存)한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에스겔 16장 17절에 『 네가 또 나의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영적 음행입니다.
에스겔 20장 30절에 『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열조의 풍속을 따라 스스로 더럽히며 그 모든 가증한 것을 좇아 행음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의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에 붙잡혔다고 했습니다(행 18:5).
하나님을 떠나면 반드시 속화(俗化)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을 떠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허용적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절대 주권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로 하셨습니다. 

Ⅲ.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계승해야 합니다.

본문 24장 32절에 『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고 했습니다. 
요셉의 그 자손들을 향한 요구는 전통계승의 차원에서 수용해야 합니다. 전통계승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하십니다. 전통계승은 교육을 통해서 그 대과업이 성취됩니다. 교육이 안되면 체험도 무너집니다. 
사사기 8장 33절에 『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생전에는 이상이 없었는데 여호수아와 그 사실을 아는 장로들이 죽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떠났습니다. 기드온이 죽고 난 후에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했습니다. 

1) 전통계승은 지도자의 지도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와 또 하나님의 기적적 구원을 목도한 지도자(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여호와를 잘 섬겼습니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지도자들의 영향력이 공동체 안에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영향력이란 것이 인간적인 어떤 힘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영적 운동은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적 능력도 인간이란 매개를 통하여 실시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위하라 기도온을 위하라고 했습니다(삿 7:18). 로마서 10장 17절에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세우신 기관은 역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도하시며 다스리심에 있어서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사용하시지 않고 천사들을 통하여 각 개인을 지도하신다면 더욱 더 효과적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특별히 세워서 자기 백성을 위해 영적으로 더욱 유력하게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모본으로 세워주셔서 그들의 신앙생활이 구체화되도록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연약한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 받는 것을 볼 때에 자기들도 그렇게 되고자 하는 용기를 얻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기도의 용기를 주기 위하여 말씀하기를, 『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고 하였습니다(약 5:17-18). 
목사의 눈물이 성도들의 눈물을 발생시키고, 지도자의 사랑의 수고가 지도를 받는 자들의 마음 속 깊이에 아름다운 덕행의 동기를 발생시킵니다. 이것은 오직 인간인 지도자를 통로(通路)로 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고난당하는 일도 없고 눈물도 없습니다.

2) 전통 계승은 교육을 통하여 일반화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올바른 영적 교육을 받아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신자의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라고 하여 그들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거나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된 자들이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착실히 실시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 부모들이 떠난 뒤에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불신앙과 세속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엄격한 신앙교육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신 6:6-7; 시 78:5-8). 이 일에 대해서 원천적으로 지도할 곳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자기 시대만 책임진 것이 아니고 장래 세대에 대해서도 책임져야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절에 『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시편 78편 3-8절에 『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3) 전통 계승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역사의식은 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계승 역시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인식작용은 가능할 수 있으나 후손에게 계승하는 데는 충분하지 못 합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역사하는 가운데 자신의 존재적 필요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역사계승에 사활의식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역사의식이 있어야 역사주권에 대한 필요의식이 생깁니다. 그것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체험만 강조하다보면 계승이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세대가 끝나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없어지면 공동체가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선중기 실학자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말을 썼습니다. 이것은 논어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보다 더 역동적인 말입니다. 옛 것을 바탕으로 새 것을 창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창조라는 그 자체가 어색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성된 계시 곧 성경을 통하여 모든 규례와 법규를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 빈곤감, 상대적 열등감이 교회 안에 파고 들어오므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주의입니다.

잃어버린 본래의 것을 다시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 아비에게 물으라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신 32:7)고 했던 것입니다. 최소한 어거스틴 신학의 부흥과 바울 신앙의 계승은 되어야 합니다. 
성경만을 주장한다고 해서 모두 다 개혁주의, 칼빈주의가 아닙니다. 개혁주의와 비개혁주의는 신학의 원리와 신앙전통에서 나누어집니다. 따라서 평이한 성경구절이라도 교리적 틀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반고소 운동은 하 목사가 원조라는 말이 잠깐 동안 떠돌아다닌데 대해 심히 유감입니다. 그가 처음 얼마간 반고소 운동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의 공식 문서는 1975년 4월이고 석원태 목사의 공식 문서는 1973년 9월 18일입니다. 
그는 서울제일교회 당시 왕십리제일교회(서울 성동구 왕십리 소재)에 1973년 9월 15일에 부임해서 1975년 7월 5일에 사임하고 곧바로 도미한 것이 끝입니다(서울제일교회 당회록).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반고소운동의 무대는커녕 교회도 맡기지 아니했습니다.

최근에 고신의 모 교수가 고려신학교 정통성에 대해 운운하면서 내용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매우 고개를 끄덕일만한 글을 썼습니다. 예컨대 연세대는 연희전문학교의 전통을 다 가져왔고 보성전문학교의 전통은 고려대가 다 가져갔듯이 고려신학교의 전통은 고신대가 다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려신학교는 명분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고려신학교를 하나님이 세우신 것입니다. 
고신은 성경을 빼 놓고 갔습니다. 그래서 창원 극동방송국 이사장 박윤섭 장로는 고신 임원들에게 서울 고려신학교에 가서 석원태 목사님에게서 고린도전서 6장 1-11절을 찾아와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7절에 『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철학의 창으로 보면 변하는 것이 없지만 역사의 창으로 보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라고 합니다(E. H. Carr).
50년 동안 써먹었습니다. 여기에 모순이 있는데 '무엇과의 대화인가?'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이제는 역사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합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어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일어나는 일체의 사건이라고 정의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역사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전파되는 가운데 일어나는 일체의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상반되는 두 가지 사실의 가치를 모두 인정하는 것은 가치 있는 것이 없다는 것과 같으며 몰가치적 역사인식은 씨 없는 열매와 같습니다. 몰가치적 문화 바탕에서 고소측의 긍정론에 반대할 이유가 없어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 기독교계에 복고주의, 상대주의, 상황주의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옳고 그른 것의 판단이 흐려지는 일종의 몰가치적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옛것이면 모두 좋다는 복고주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대주의, 그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상황윤리주의에 빠지면 역사의 실패는 되풀이됩니다.
역사는 우회할 수는 있어도 결국 가야할 방향으로 가야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동서양의 역사관의 차이는 본질상 없습니다. 그러나 민족적 사유에 의해서 우리나라 역사관은 솔직한 면이 있습니다. 
정사와 야사에 대해 오해가 없어야 될 것은 '정사는 믿을 만하고 야사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역사관입니다.
정사와 야사의 구분은 정사는 관찬이고, 야사는 사찬이란 점입니다. 관이 아닌 민간에서 쓴 것은 모두가 야사입니다. 그러나 정사보다 야사가 진실을 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벼슬이나 출세는 역사주권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주기철, 손양원, 한상동, 석원태 목사로 이어지는 역사주권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될 몫이 있습니다. 그것 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고려신학교 운동과 갈보리교회 운동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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