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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판의 날 (말 2: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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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의 날 (말 2:17-3:6)


어느 주일날, 주일학교의 한 교사가 어린이들에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해주고 난 뒤 선생님은 어린이들에게 “여러분은 부자가 되고 싶어요, 아니면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 중의 한 명이 손을 번쩍 들더니 대답하기를 “선생님, 죽기 전에는 부자가 되고 싶고, 죽은 다음에는 거지 나사로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어린이와 같은 생각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싶고 예수님도 사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가지를 다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죄악된 세상을 미워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가룟 유다는 비열하고 간사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갈림길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했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의 수단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고, 한 사람은 예수님을 치부의 수단이거나 민족 해방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천국을 선택했고, 한 사람은 지옥을 선택한 것입니다.
예전에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우리 또한 기다립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오심이 반드시 모두에게 다 반가운 일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똑같은 메시야이건만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의 메시야로 오시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의 메시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고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베드로입니까 아니면 가룟 유다입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해드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온 세상을 다 만드신 다음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으실 때 유독 사람들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말과 생각으로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말씀으로 지으셨고 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들에게 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앞으로 모든 짐승을 지나가게 하시고 아담이 부르는 대로 그 짐승의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말에 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구주라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만큼 우리의 말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능력의 도구를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말끝마다 “아이 힘들어, 너무 어려워, 죽고 싶어, 피곤해 죽겠어, 정말 미치고 펄쩍 뛰겠네, 아파서 아무 것도 못하겠어, 신경질 나서 못 견디겠네, 왕 짜증” 등등 얼마나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한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요즘에는 온갖 욕설로 가득한 말들을 조금도 서슴지 않고 내뱉지를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죽겠다고 하니 죽을 일밖에 더 생기겠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느 집을 가든지 먼저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그 집이 복을 받기에 합당하면 너희가 축복한 대로 그 집에 복이 임할 것이요 복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 축복한 복이 너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할 일은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되 나 자신을 향해서도 마치 야베스처럼 날마다 축복하는 축복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절망으로 가득한 말을 한다는 것은 곧 그 절망의 말이 내게로 임하게 되는 마치 스스로를 저주하는 것과 같은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온 세상에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마련해 놓으신 다음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위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모든 필요를 따라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요 채우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이요 동시에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떠한 곤고함이나 역겨움이 닥친다고 해도 어떤 마음의 불편이나 삶의 고통이 닥친다고 해도 우리가 낙망할 이유가 하나도 없고 낙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옵소서.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얼마나 멋진 내일을 준비하실지 기대가 됩니다. 그래서 더욱 감사합니다. 간구하옵기는 내가 교만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어 주시고 위로가 되어 주옵소서, 나는 오직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된 것처럼 하나님께서 또한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믿사옵고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형통한 자가 되게 만드시는 줄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영광 받으옵소서.” 

이것이 바로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서 복의 근원 삼으셨듯이 우리를 또한 부르시어 아브라함의 복을 함께 받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복의 근원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는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악한 자가 더 잘 삽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며 탄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여호와를 괴롭게 하는 말이라고 지금 말씀하십니다. 아니 죽겠다니 힘들다니 못한다느니 하는 말부터가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부르실 때 또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셨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렸을 때 요셉이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저 아버지의 귀여움만 받으며 자란 저가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하지만 그래 봤자 노예입니다. 

그런 가운데 조금 잘 나가게 됩니다. 가정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가정 총무 노예 대장이 됩니다. 하지만 주인 마님의 유혹을 물리친 결과 칭찬은커녕 오히려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하지만 여전히 감옥 안에서도 실망스러운 일은 계속됐습니다. 보디발의 명을 따라 감옥에 갇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을 수발들다가 그들의 꿈 풀이를 해주었고 그 풀이대로 되었건만 돌아온 것은 무관심뿐이었습니다. 

그런 세월들 속에서 좌절할 만도 하건만 요셉은 한 번도 절망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에게 주신대로 항상 마음속에 꿈을 간직한 채 주님만 바라봅니다. 그 결과 이윽고 때가 되니 놀랍게도 감옥의 죄수였던 요셉이 하루아침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지를 않습니까? 룻은 어떻습니까? 한 때는 잘 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불행 속에 시아버님과 시아주버님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까지 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삶의 아무런 희망도 없는 가운데 시어머니는 자기 나라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며느리들을 보고는 자기 고향에 남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타향도 아닌 다른 나라에 그것도 무언가 비빌 언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시어머니와 함께 남편의 나라로 간다고 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룻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고백하며 어머니의 뒤를 따릅니다. 

그리고는 남편의 고향 베들레헴 낯선 땅에서 보리밭에서 나락을 줍는 밑바닥일로부터 시작해서 어머니를 공양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축복해주는 밭의 주인 보아스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기를 마지않으면서 어머니를 봉양하고 어머니의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그 결과 아무 소망도 없을 것 같았던 이방 여인 그것도 여호와의 총회에 결코 들어올 수 없으리라던 모압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저가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는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됩니다. 저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 이런 놀라운 복으로 저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과 실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립보 거리를 지나다닐 때 그 뒤를 따라다니던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귀신 들려 점치는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 노예로 인해서 쏠쏠 괜찮은 수입을 얻고 있던 참입니다. 그런데 그 귀신 들린 자가 계속해서 뒤를 따라 다니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외쳐대니 바울과 실라가 견디다 못해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갔습니다. 

그러니 그 여인이 더 이상 점을 칠 수가 없게 되니 그 주인이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고 했습니다. 

아니 이처럼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차라리 제대로 된 재판이나 받고 이런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면 억울하지나 않겠죠.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분해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몹시도 아프고 힘들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집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놀라서 일어나 보니 옥문들이 열려있습니다. 

그래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는데 바울이 크게 소리 지릅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그래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합니다. 그 결과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화를 잔뜩 내며 난리를 쳐댔다면 이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었겠습니까? 원망하기보다는 기도하고 찬송했더니 이런 좋은 날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런 날 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의 말을 바꾸십시오. 안 된다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고백하십시오. 못 한다가 아니라 주님이 이루신다고 고백하십시오. 죽겠다가 아니라 주님이 살리신다고 고백하십시오. 원수라도 사랑하고 나를 핍박하는 자를 오히려 축복하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그리고 우리가 축복하는 대로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축복의 통로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메시야의 날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메시야의 날이 올 것인가 사람들은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셨을 때 메시야를 영접했던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말씀에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메시야를 영접했으며 동시에 예수를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dn리는 먼저 믿음의 자손들에게 임하는 메시야를 생각해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먼저 우리가 사모하는 주께서 갑자기 임하실 것입니다. 그날과 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보라 내가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라고 하신 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마지막 때의 징조를 알려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세상에 오실 때도 약속대로 세례 요한을 보내셔서 그 길을 준비했지만 이를 깨달은 사람은 아주 극소수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이 아주 가깝다고 말들을 합니다. 사실 성경에 주님이 오시게 될 때에 징조 가운데 거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진짜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코앞입니다. 

하지만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처럼 하도 주님이 곧 오실 것이라는 말들을 들어오다 보니 이제는 다 만성이 돼 버렸습니다. 하지만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메시야의 오심이 결코 멸망과 좌절의 오심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예수님을 우리 구주로 마음에 믿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다 깨끗이 씻음을 받았습니다. 

비록 우리 가운데 죄의 쓴 뿌리가 남아 있기는 하나 우리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감람나무가 되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열매를 맺게 되었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걸 깨닫기에 우리는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는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결코 잃을 수 없는 영생이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우리를 위하여 준비되었습니다. 어찌 감사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이 오시는 그 날 그 때에 우리는 하늘로 들림 받아 주님 앞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다시 오시는 메시야가 구원의 메시야가 아닌 심판의 주로 임하게 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임하시는 날은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망각하고 살았던 사람들,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다고는 하나 믿음에서 떠나 세상을 친구 삼아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님은 심판주로 오십니다. 그들에게는 자기의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고 불 못에 던져지는 형벌이 따를 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렇듯 심판을 받게 될 사람들입니까?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점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우상 숭배자들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들을 하나님이라고 하며 섬기고 그들에게 앞길을 물으며 인생의 해답을 구하는 사람들, 맹세를 해 놓고도 결코 지키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도 소위 우리가 시험에 드는 것도 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대신에 내 생각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내 생각대로 판단하고 모든 것을 내 생각에 맞춰서 하려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고 싶어도 결코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이런 모습들이 있지를 않습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죽으신 것처럼 그렇게 내 멋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대체 누가 하나님입니까?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귀를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과 내가 채널이 맞지를 않을 때입니다. 그러면 들려지는 소리는 온갖 잡음뿐입니다. 또한 잘못된 채널을 맞추면 어떻게 됩니까? 엉뚱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잘못된 채널인지조차 알지 못할 때입니다. 

그러니 그는 자기가 잘못 들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합니다. 그리고는 우겨댑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했노라고.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게 만듭니까? 우리의 환경입니다. 우리가 환경에 매이다보면 쉽게 말해서 삶에 매여 살아가노라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튜브를 타고 놀다보면 자칫 파도에 튜브가 밀려서 점점 깊은 곳으로 가는 것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뜩 정신이 들어서 보면 이건 아무리 밖으로 나가려고 몸부림을 쳐서 쉽지를 않게 되죠.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해야 하며 언제든지 나의 목자가 되신 주님의 음성을 바로 듣기 위해서 깨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떤 이유로 인해서도 기도하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어떤 이유로 인해서이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마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십시오.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자들”은 결국 사람들에 대해 죄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마땅히 베풀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도 베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품꾼은 품삯을 받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품삯에 대해 억울하게 해요? 그거 얼마나 피눈물 나는 일입니까? 과부와 고아 돕지는 못할망정 그들을 압제해요? 정말 천벌을 받을 놈들이라는 말이 합당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나그네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쉴 곳이 없다는 뜻도 됩니다. 해가 저물어도 갈 곳이 없는 나그네 그것만큼 서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예수님의 부모가 만삭의 몸을 부둥켜안고 짐승 우리를 찾아들어갔겠습니까? 그 만삭의 여인이 내 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여관의 주인이 그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이 모든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어찌 보면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러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은 곧 주께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있을 것은 심판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우리가 바로 서십시오. 그리고 능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람들 앞에서 베풀며 섬기는 자로서 살아가십시오. 그래서 주 예수님이 심판의 메시야가 아닌 은혜와 감사로 가득한 언약의 사자로서 우리들 가운데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미국의 한 대도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대단한 속도로 달리고 있던 큰 트럭에 치여서 죽을 뻔한 청년을 자기의 목숨을 생각지 않고 밀쳐서 구원해 준 신사가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청년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던 놀라움에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며 자기를 구해준 그 신사에게 그냥 “감사합니다.” 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군중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본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생각지 않고 자기를 살려준 그 신사에게 그냥 고맙다는 말 한 마디만 하고 가버린 청년에 대하여 그럴 수가 있는가 하며 모두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꼭 2주일 째였습니다.
그 도시의 법정에서 한 청년이 살인 혐의로 재판의 언도를 받으려고 서 있었습니다. 판사는 그 청년에게 “범죄에 대한 언도를 받기 전에 무슨 할 말이 없는가?”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네, 판사님, 판사님은 저를 아시지요!” 
법정 안은 갑자기 조용해지며 긴장했습니다. 판사는 “미안하네만, 나는 자네를 기억하지 못하겠는데…….”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판사님! 바로 2주일 전이 아니었습니까? 메인 스트리트 7가 코너에서 제가 교통사고로 죽을 뻔한 것을 판사님이 살려주시지 않았습니까? 판사님, 오늘도 저를 좀 구해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법정은 아주 더욱 조용한 가운데 모든 사람의 눈이 둥그레졌습니다. 드디어 판사는 입을 열었습니다.
“젊은이! 이제야 내가 기억을 하겠군! 그러나 그 날에는 내가 청년의 구세주였지만, 오늘은 내가 청년의 심판주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구원해 주시려고 한없는 희생을 치르신 주님을 마땅히 사랑하고 섬기며 사십시오!
“감사합니다” 한 마디만 해놓고 다시 세상을 따라 살다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심판주께서 나를 보고 “내가 너를 모르노라!” 라고 하시면 그때에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다시 오실 주님이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언약의 메시야입니까? 아니면 심판의 메시야입니까? 아무쪼록 언약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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