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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미 부어드린 제물입니다 (딤후 4:6-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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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부어드린 제물입니다 (딤후 4:6-8, 16-18)
   
   
지난 주간에 “눈 속에 피는 장미”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그 책은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년 1월 29일~1552년 12월 20일)의 생애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카타리나 폰 보라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부인입니다. 카타리나 폰 보라는 1499. 1. 29일,  독일의 립펜도르프에서 태어나 10살이 되었을 때,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브레나에 위치한 수도원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외가 친척 아주머니가 원장 수녀로 있고, 고모가 수녀로 있는 님쉔의 마리엔트론 시토회 수녀원에 들어가 16살에 서원하고 수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1517년 비텐베르그 대학의 마르틴 루터 교수가 95개 조문의 토론의제를 내걸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카타리나(캐테)의 나이 18살이었습니다.  카타리나를 부를 때, 축약하여 캐테라고 불렀습니다.  수녀원에 있으면서 캐테도 루터의 가르침에 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캐테를 비롯한 9명의 수녀들도 루터의 가르침이야말로, 성경적임을 확신하고 수녀원을 함께 떠날 것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평생 수녀로 서원하였고, 굳게 닫힌 수녀원을 나온다는 것을 연약한 여자로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높은 담을 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굳게 닫힌 정문을 열고서 나오는 것은 생각 할 수가 없었습니다.   

루터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카타리나 폰 보라라는 수녀한테서 온 편지였습니다.   “존경하는 루터 선생님, 저희들은 수녀원의 수녀들입니다. 저희들은 일생 동안 이곳에 묶여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지 오랫동안 번민해 왔습니다. 일찍이 선생님께서도 믿음의 근원은 성경이며, 신부나 수녀도 결혼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들은 이곳을 탈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는 수녀원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하나님의 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습니다. 제발 저희들의 탈출을 도와주소서. 아멘.”  

1523. 4 4 부활절 전야에 수녀원에 물고기를 대주는 장사꾼 레온하르트 코페(Kopp)라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물고기를 담는 통에 들어가 숨어서 9명의 수녀들이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토르가우르로 향하였고, 며칠 후 종교개혁의 중심지 비텐베르그에 도착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수녀들에게 살 길을 마련해주었고 남자를 소개하여 결혼시켜주었습니다.  이 캐테는 뉘른베르그 출신인 히에로니무스 바움게르트너와 결혼을 약속하였지만, 소식조차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그에게 편지를 보내 결혼하지 않는 연유를 물었지만, 그는 부잣집 여자와 결혼하고 말았습니다.   

카타리나는 몹시 낙심하였습니다.  루터는 카타리나를 자기 친구와 맺어 주려 했습니다.  카타리나는 거절하면서, 루터라면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망설였습니다. 그 역시 카타리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성직자의 결혼을 지지해왔지만, 막상 자신의 결혼은 선뜻 결정하기 어려웠습니다.  

1525년 6월, 카타리나가 수녀원에서 나온 지 2년, 루터는 42세, 카타리나의 27세 때였습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려야 정식 부부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파문당한 성직자 루터와 도망친 수녀 카타리나는 교회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형식보다 양심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 때문이었습니다.  

캐테는 얼마나 성실하였든지, 일 년이 지난 후 루터는 친구에게 캐티에 대하여 자기에게 과분할 정도로 기쁨이 되었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녀는 책임성이 강하여 가난한 학생들을 먹이고 입히며 루터를 내조하였습니다.  남편 루터가 종교개혁에 전념할 수 있도록 6명의 자녀를 돌아보며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남은 고아들 12명을 양육하고 수십 명의 대학생들을 먹이면서 독일 가정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루터가 건강이 악화되어 힘들어할 때에도 캐티는 정성어린 간호로 루터에게 위안이 되고, 회복할 수 있게 했습니다.  캐티는 남편 루터가 죽은 후 6년 동안 자녀들과 고아들을 돌보면 교회를 봉사하다가 주님 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흑사병이 여러 차례 발병하면서 비텐베르그를 떠나 토르가우로 가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고, 그 길로 회복되지 못하고 1552. 12. 20일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카타리나 폰 보라는 기독교 최초의 목회자 부인으로 기록된 인물이요, 독일이 자랑하는 사모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정성스럽게 살고, 생명을 다하면서 신앙을 지켜가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마르틴 루터가 수년 출신인 카타리나와 결혼하는 것은 전 유럽 사회를 경악시킨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고, 불가능해보였던 사랑의 결실이었습니다.  카타리나는 복음에 충실한 신앙인이었고, 루터를 진심으로 사랑한 여인이었고, 억센 생활력으로 가정을 이끌어갔으며, 교회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봉사한 헌신하신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 1차 투옥되었다가 나와 복음을 전하던 중에 다시 잡혀 들어가 이제는 바울 자신도 다시 풀려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면서 마지막으로 쓰신 서신이 디모데 후서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지금까지 전해진 바울 서신의 마지막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서신은 목회서신으로 구분하는데, 선배 목회자로서 후배 목회자에게 주시는 목회자로서의 사명과 헌신, 영적 무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 죽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를 꼭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에배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옥중서신이라고 하는데, 그들 편지에서 자신이 석방될 것을 기대하면서 출옥한 후의 사역에 대하여 말씀하였지만, 목회서신인 디모데전서와 디모데 후서, 디도서에서는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것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예감하면서 유언적인 부탁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투옥은 연금 상태였는데, 두 번째 투옥은 전혀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도 아무런 힘이 되지 않았고, 로마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어지럽힌 죄인으로 죽음을 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미 부어드린 제물입니다.”라는 제목을 정해보았습니다.  어떤  설교는 제목을 잘 정하는 것으로 설교가 잘 정리될 때도 많은데 오늘의 본문은 드릴 말씀도 많고, 주시고자하는 교훈도 사실 무궁무진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6절 말씀에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했습니다.  새번역에서는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다”는 말씀은 “전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롬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과 오늘 본문의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라는 말씀은 상통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당신이 살아온 것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 제물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과거에는 제물을 드릴 때에 죽여서 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산 제물이 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전제라는 제사는 희생제사를 드릴 때에 마지막으로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부어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는 포도주만 부어드리는 것으로 전제라는 제사를 드리지 않고, 번제, 속죄제와 같은 희생제사를 마치면서 가장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부어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온 생을 복음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며, 마지막 자신의 피를 흘려 전제로 부어드리겠다는 정신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이제 임박한 것으로 알고 자신의 남은 생명을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산 제물로 바치겠다고 결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떠날 시각이 가깝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선착장에서 배를 출항시키기 위해서 그동안 정박을 위해 매어놓은 로프를 푼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군인들이 다른 곳으로 진영을 옮기기 위하여 장막을 거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정박해놓았던 닻을 걷어 올리고, 로프를 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던 장막을 걷어 올려야 합니다.   이런 말은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밥숟가락을 내려놓는다.”는 말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1) 산 제물의 사람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입니다. 

7절 말씀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운다는 것은 전장에서 병사들이 싸우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레슬링이나 권투, 이종격투기와 같은 싸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의 싸움이란 레슬링과 권투와 같은 격한 경기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선한 싸움이란 결국은 자신과의 싸움이요, 영적인 싸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선한 싸움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고전9:27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구원한다고 하다가 정작 자신은 주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일하자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도 저질스러운 싸움이 있습니다.  작은 명예, 자리싸움, 지역갈등, 무슨 장 자리 싸움은 저질스러운 싸움입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할 수 없이 맡아야 하는 자리라면 봉사의 기회로 알고 맡아야겠지요.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올라가면 더 잘 할 수도 있는데, 굳이 내가 올라가야 하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맡으려 하니,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정말 승자입니다. 

잠언16:32 말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 인생을 성공하고 신앙인으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우리 주님이 영광 받으시는 일이라고 하면 나는 이름 없어도 좋고, 2등하면 어떻고 3등하면 어떻습니까?  

2) 산 제물의 사람은 사명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고” 로마 시대의 달려갈 길이란 마라톤 경기의 정해진 코스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바울에게 맡기신 사명을 ‘달려갈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경기에서 승리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갔다는 말입니다.  

행20:24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달려가는 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명을 위하여,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3) 산 제물의 사람은 믿음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지켰으니”  이 말씀은 경주자로서 달리면서 경기 규칙을 잘 지켰다는 말도 되고, 군인이 상관에게 충성을 다하였다는 말도 되고, 청지기로서 우리 주님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도 됩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라고 하였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조그마한 자존심 하나 다스리지 못하여 교회를 옮겨다니고 적은 봉사 자리에서 사표를 쓰고, 고함치고 시끄러운 교회로 만드는 것을 보면, 그것이 어디 예수 믿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자존심을 살리셨나요?  이런 죽음이라면 그리스도직을 사표낸다고 하였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십자가에 달릴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이래 진리를 고수하다가 죽은 수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개신교회도 순교자가 무려 1천명이라는 통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일제치하에서, 공산치하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천주교회도 아주 많은 순교자를 내었습니다.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에 가보면 순교자 기념 성당이 있는데, 그 지역 개천가에다 끌어다 묻어 죽인 사람이 3천명이 넘는다고 하니, 우리 민족은 참으로 무지몽매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 날 끌려가서 생매장 당하게 되었다고 하면 참으로 인생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면 어쩌겠습니까?  우리의 꿈과 미래와 희망을 다 접어야 하고, 담담히 우리 주님만 바라보면서, 우리의 생애 중에 예수 믿게 되었고,  예수 믿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때문에 죽을 수 있어 감격입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난 세기 20세기의 살아 있는 순교자라는 루마니아의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은 예수 믿는 사람이요, 목사라는 것 때문에 공산 정권 아래서 14년간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계속되는 기아와 추위에 시달리고, 세뇌동작으로 겪어야 했던 정신적인 고통과 고뇌, 무려 14년간 감옥 생활에서 살아나온 목사님이십니다.  서방 세계가 끊임없이 목사님의 석방을 위해 기도하고 진정하고 추궁하는 것 때문에 죽이지 않고 고통만 주었습니다.  우리도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14년간 감옥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면 어찌하실 것입니까?  우리의 일생에 예수님 믿은 것으로 감사하면서 죽어도 천국, 살아도 천국이라는 생각으로 담담히 겪으면서 주님만 바라볼 것입니다.  

8절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스러운 면류관, 썩지 않는 면류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 끝에는 주님의 실실하신 평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 믿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무조건의 은혜이지만, 우리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힘쓰고 애쓰고, 여기에 혼을 불어넣고 이것은 소중한 일로 알고, 가장 값진 삶이라고 인정하면서 달려가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전도하라, 기도하라, 봉사하라, 헌금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중에 더 크고 힘들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였다면 하지 않을 것입니까?  우리가 감당할 정도 이상을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다 사도바울과 같이 다 내어놓고 헌신하라고 부르신다면 하지 않을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가 감당할 그 이상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16-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참으로 외로운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가 복음을 위해 여러 사도들과 유대교 교권자들 앞에서 변명하고 변증할 때에 바울과 함께 한 사람이 없었고, 다 그를 버렸습니다.  아직은 십자가의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에 대하여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원망하지도 않고, 허물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 곁에 서셔서 힘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알아주시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우리가 가는 길에 영광만 바랄 수가 있습니까?  

남아프리카 말라위공화국의 블랑뛰르에 가면 리빙스턴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 기념관에는 색유리창이 있는데 거기에는 리빙스턴이 남긴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내용은 편지에서 따온 것으로 비교적 생애 초기에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관계된 것이 아닌 한, 무엇을 소유하든 거기에 가치를 두지 않으며 소유하겠다는 기대도 않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사용하고 가리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목숨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이나 물질도 내 것이 아닙니다. 다 쓰고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바울이 산 제물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은 감격이 너무나 크기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주님으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종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일생 하루하루는 감격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는 순교자의 신앙을 가지고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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