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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품신앙 (행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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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신앙’.com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2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9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10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 5:1-11) 
 
오늘은 행전 5장 1-11절의 말씀을 통해서 “거품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감동과 은혜가 더욱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배경이 되는 사도행전을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사도행전의 핵심 장은 2장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는 2장이 사도행전의 시작이요 또한 전부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예루살렘에서의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증거가 7장까지 기록이 되어있고, 이후 8장부터 12장까지는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성령님의 증거가 나옵니다. 13장부터는 땅 끝까지 나타나는 성령님의 증거를 보여주면서 바울이 로마에 가서 증거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인물중심으로 보면 초반 예루살렘에서의 전도는 12사도, 특히 수제자인 베드로를 중심으로 전개가 되고... 유대와 사마리아에서의 증거는 8장에 7집사중의 하나인 빌립의 전도가, 9장부터는 핍박자 사울이 전도자 바울이 되는 다메셋 도상의 변화 이야기 후에 땅 끝까지 펼쳐지는 증거의 기록이 바울을 중심으로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도행전을 다른 말로는 바울행전 이라고도 부릅니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사도들도 아니요, 바울도 아니라 성령님이 주인공이십니다.  우리는 이 책을 ‘성령행전’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초기 예루살렘증거에서 오순절 성령세례의 사건이후로 초대교회가 강하게 부흥하고 있는 시점에서 교회 안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기록을 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헌금(獻金)과 관련된 사건인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본문의 한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4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나아갈 진리의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로, ‘거품을 제거하는 신앙인이 되라’  하십니다.
둘째로,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라 하십니다. 
셋째로, 정직한 신앙을 최고 중요한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순수성과 엄격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거품을 제거하는 신앙인이 되라’  하십니다.

콜라나 사이다, 맥주를 컵에 넘치도록 따릅니다. 그리고 나서 잠시 다른 일을 하고 컵을 쳐다보면 2/3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틀림없이 가득 따랐는데 누가 먹었나? 하지만.. 사실은 거품이 제거된 것 아닙니까? 거품은 사람을 착각하게 만듭니다. 경제용어 중에 ‘거품경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매우 문제가 많고 허약한 상황을 빗댄 말입니다. 어떤 재화가 실제적인 가치보다 과대평가되어, 실제와는 달리 겉으로 나타나 보여지는 과대 팽창된 ‘허상(虛想)의 경제(經濟)’가 바로 ‘거품경제’입니다.  그런데 거품이라는 것은 한없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품은 일어났다가 사그라 드는 것이 거품입니다.  거품은 반드시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세계적인 현상이 바로 이 거품이 모든 면에서 제거되고 있고 거품이 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회사마다 거품을 없애고 실체를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국회에서 하는 청문회는 부정적인 면도 있고, 왜 하느냐 하는 사람도 있지만 주요 인물을 덮고 있는 거품을 빼는 기회라는 점에서는 대단히 좋은 제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도 거품교회가 있고, 부흥도 거품부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거품이 제거되면 남은 게 별로 없는 교회, 거품이 사라지면 남은 게 없는 그런 부흥이 거품교회이며 거품부흥인 것입니다. 이런 모양으로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지못합니다. 오히려 유해무익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품 없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신앙이 거품신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이 시간이 내 안의 거품을 제거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이든, 경제든, 지식이든, 정서적인 것이든, 그것이 무엇이든지 거품을 제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거품이 좋지 않은 것이고, 실체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문제가 많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거품이 일어나고, 사실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인간의 기대심리와 욕심 때문입니다. 인간의 기대심리와 욕심이 재화의 가치에 자꾸 거품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고,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 안일에 빠진 신앙이 거품신앙입니다.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어느 정신병원에서 한 환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하더랍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는 정신병자가 말하기를 "내가 언제 너에게 계시를 주더냐"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는 과대망상병 환자들이 많습니다. 또 거짓선지자들, 거짓능력자들이 곳곳에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만 ‘재림 예수’가 50명이 넘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50명이 넘는 사람들 주위에 따라다니는 사람까지 치면 수천 명, 수만 명이 거품에 푹 빠져 있는 것입니다.  재림 예수 주위에서 확실히 한자리 하려는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꼭 이단들만이 아닙니다. 교인들 가운데도, 심지어 때로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실제로는 고양이 같은데 호랑이인척 흉내만 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또 교회의 크기가 신앙의 크기인줄 착각하면서 대형교회를 다니는 것을 믿음도 큰 사람인 것인 양 착각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 거품이 많이도 끼었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왜곡된 신앙, 왜곡된 직분, 왜곡된 진리 이런 것들은 모두 거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뜨겁고 화려하고,  입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은혜"하고 "믿습니다"를 연발하지만 교회 문만 나서면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는 신앙, 아무 부담 없이 거짓말을 하고, 아무 가책 없이 남을 비난하는 신앙이 거품신앙입니다.  ‘하나님, 하나님’하는데, 실지로는 자기중심적인 삶을 고집하는 거품신앙을 가진 신자들을 주위 불신자들은 비웃습니다. 많은 직분자들과 많은 교인들이 풍성하고 좋은 신앙인들 같아 보이지만 실재도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겉보기에는 자유인 같지만 실상은 죄의 포로가 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게 있는 거품을 제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라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거품신앙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아니라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였습니다.  이 부부는 죄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직접 죽인 부부입니다. 문제가 무엇인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을 믿지 않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있었던 교인이었으며 성도였습니다.  

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죄는 **헌금을 드리는 것을 거부한 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과분한 헌금을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죄는 ***일부를 드리면서 전부를 드리는 체하였던 ‘거품 죄’였습니다. 그것은 ‘위선(僞善)의 죄’로서  아닌 것을 마치 정말인 것처럼, 하지 않은 것을 마치 다 한 것처럼  나타내려는 태도였습니다. 이들의 신앙에는 거품이 끼여 있었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중에 누구 하나라도 서로에게 이러한 것을 충고하는 지혜를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망하려면 부부가 똑같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좀 허황되면 아내라도 그러지 말아야 하고, 아내가 불신실하면 남편이라도 신실하면 화를 면할 수가 있을텐데 망하려면 같이 눈이 머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부부가 왜 이런 일을 하였느냐. 이들은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더 큰 것으로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는 베드로의 질문에도 ‘예 이것뿐이라’ 라고 대답을 합니다. 아니 베드로가 이렇게 물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교회앞에서 소문을 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왜냐면... 선(善)의 모양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교인들이 쉽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다른 교인들 앞에서 자기 신앙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괜찮은 신앙인으로 보여지기 위해서 얼마든지 적당한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시고, 사람들이 다 압니다. 거짓말의 대가를 치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람을 더 의식하고,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으려는 유혹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그러지 맙시다.  하나님을 더 의식하고 하나님의 칭찬에 목을 매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정직한 신앙을 최고 중요한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런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 부부를 바로 직접 죽이시는가?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안 한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를 위해서 일부러 땅을 팔아서 헌금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금액 조금 부풀렸다고, 그것이 이토록이나 엄청난 죄라는 말입니까? 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죄 맞습니다. 거품 죄는 당장 죽을 만큼의 죄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방인이요, 무신론자요, 침략자를 대표하는 로마인들이 아닙니다. 로마를 대표하는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한 사람 아닙니까?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은 경건한체 하는 위선적인 신앙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제사장들..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예수님을 앞장서서 죽인 살인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회칠한 무덤”입니다. 속은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경건하나 속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불신 세상과의 싸움도 있지만, 오히려 위선과 율법주의와의 싸움이 더욱 본질적인 싸움입니다. 성도여러분, 경건한 체하는 사람들을 우리 주님이 얼마나 혹독하게 비판을 하셨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혹독한 그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거품을 거두어낸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거품 속에서 안주하고 안일하게 사는 사람들이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죽이고 자기도 멸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을 피상적으로 생각을 해서 하나님이 너무하시지 않았느냐하는 사람들도 있을까 걱정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거품의 위험성이 얼마나 큰 가를 보여주시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행위는 신앙이 아니라 선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전(宣傳)용 신앙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신앙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아나니아는 ‘여호와의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좋은 뜻이어서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삽비라의 원래 발음은 ‘사파르’입니다. 보석 이름입니다. 청옥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삽비라는 ‘아름답다’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름의 뜻은 ‘아름답다’ 인데 아름답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부부에게서 받을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 봅니다.   

①봉헌(奉獻)은 온전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봉헌은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소유를 팔아 얼마를 감추고 얼마만 가져다가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입술로는 ‘이것이 전부입니다’하면서 바쳤습니다. 온전한 봉헌이 아니었고 순수하지도 못했습니다. 명예와 존경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한 헌금입니다. 다른 성도들이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둘 때 사람들이 그들을 칭찬하고 존경했을 것입니다. 자기들도 그런 칭찬과 존경을 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봉헌은 순수한 봉헌이 아니었습니다. 명예와 존경은 진실 된 행동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② 정직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아나니아도 정직하지 못했고 삽비라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예 이것뿐이라”했습니다. 그들은 거짓말하는 것을 가볍게, 쉽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헌금만 하면 되지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무시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돈이 부족한 분이 아니십니다. 헌금이 우선이 아니라 정직이 우선입니다. 정직하지 못했기에 죽임을 당합니다.      

이런 설교를 하는 저도 두렵습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너무나 성경과 달라서... 거짓말하는 것, 정직하지 못한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게 여깁니다. 남을 해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라고 그냥 넘어갑니다. 거짓이 몸에 익어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엡5;3) 사람만 보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은 정직하지 못한 것을 벌벌 떨면서 두려워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정직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순수성과 엄격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결론적으로 소중히 여겨야 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순수성과 엄격성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은 너무 하지 않은가?’  ‘땅을 팔아서 헌금까지 했는데 좀 과장했다고 부부가 생명을 잃어야 하나?’  ‘교회에서 추방해 버리면 그만이지 생명까지 잃게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은 다른 말로하면 ‘교회는 그런 곳이다. 교회 안에서 그래도 된다’라는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교회는 그런 곳입니까?  교회 안에서 그래도 됩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교회가 이럴 수 있습니다. 언제냐? 교회가 타락(墮落)을 했을 때입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고, 세상과 하등 구별이 안 되어서, 교회나 세상 단체나, 정통 교회나 이단이나 다 똑같을 때는 이래도 됩니다.  그러나 이때는 교회가 출발할 때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날 때입니다.  이럴 때 거짓의 영이 역사하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한 일을 용납한다면 교회의 기초가 아주 약해질 것이고, 성령이 소멸될 것입니다.   이 부부는 단순히 거짓말을 한번 한 것이 아니라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에 찬물을 끼엊은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까 불행한 것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정도 거짓말쯤은 쉽게 합니다. 별로 죄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도 목사이지만 우리 집사람에게 전에는 이런 식의 말을 가끔 하였습니다.  물건을 사고 돈이 좀 남았을 때, ‘하나도 안 남았다. 모자라서 내 돈 더 보탰다’ 라고 뻥칠 때도 있습니다. 좀 찌릿하지만.. ‘이렇게라도 용돈 좀 챙겨야지’ 하고 속으로 변명하고 넘어갑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바로 직접 죽이시지 않습니다. 이제 까지 살아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을 속이면 안 되겠구나!’ ‘주의 영을 시험하면 안 되겠구나!’ 가 아니라 ‘성령을 속여도 되네?’ ‘주의 영을 시험해도 괜찮네?’ 하는 시간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까 불행한 것입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교회의 엄격성과 순수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타락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냐 나쁜 것이냐 하는 질문입니다. 거짓말을 해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처럼 심판을 안 받으셔서 좋으신가요? 하는 질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왜 심판을 바로 안 받을까요? 말세지말(末世之末)이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늦춰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X2 (마12;36)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엄격성과 순수성을 회복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킬 때 아주 엄격하고 순수했습니다. 청교도들이 청교도운동을 할 때 역시 엄격하고 순수했습니다. 

웨슬리의 감리교운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집회에서 강사가 아주 감동적인 간증을 했습니다. 자기가 영국에서 유학 생활할 때, 자동차를 사는데 돈을 다 마련하지 못해서 일부만 갖다 주는데 주인이 그대로 차를 내주더랍니다. ‘언제까지  값을 다 갚겠습니다’ 하는 각서 같은 것 받지 않더랍니다. 이래도 되냐고 하니까 차 주인이 하는 말이 ’당신 감리교인 아니냐? 감리교인들은 정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랍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 기독교가 들어 올 때는 그랬습니다. 숫자는 전 국민의 1~2%였지만 그때 기독교인들은 애국자요, 정직한 사람으로 다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첩을 두는 것은 흔하게 있는 일이었는데 교회에서는 이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기간을 주고 내보내게 했고 내 보낼 때는 생계유지에 필요한 물질을 주어서 내보내게 했습니다. 그 무렵 교회의 회의록을 보면 ‘아무개가 첩을 내보내라는 권면을 듣지 아니하므로 기도하고 출교시키다’ 라는 기록이 자주 나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통해서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교회는 엄격하고 순수해야 한다’ 라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끝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립니다. 교회가 엄격하고 순수해야 하는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정죄는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베드로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는 베드로는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겠습니까?  ‘제발 아니라고 해라. 돈을 좀 숨겨두었다라고 대답해라. 너의 남편이 죽었다. 너라도 정직하게, 너라도 솔직하게 대답해라. 제발 제발’  하지 않았겠습니까?  “예 이것 뿐이라” 하는 대답에 얼마나 탄식하고, 얼마나 마음이 아팟을까요. 설마 잘 죽었다 하겠습니까? ‘내 죄다. 내 잘못이다. 내가 한 번 더 정직에 대해서 설교를 했더라면. 한 번 더 진실해야 한다고 강조를 했더라면...’ 하지 않았겠습니까?  교회를 맡은 사람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면 그 일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두려워하면서도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 사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사람, 공의를 선포한 사람... 다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 이스라엘의 죄를 자기의 죄처럼, 조상의 죄를 나의 죄처럼, 내가 회개할 것인 것 처럼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죄를 자기의 죄로 알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늘 이런 유혹을 받습니다. ‘덜 하고도 많이 한 것처럼 보일 수는 없을까? 적게 돈을 들이고도 많이 돈을 들인 것처럼 보이게 할 수는 없을까?’ 실재와는 다르게 부풀리려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그렇지만 거품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거품은 심판을 불러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피 흘리기까지 이런 거품의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싸우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은 거품신앙, 거품인격이 아니라 정직한 신앙, 솔직한 태도를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거품을 제거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지 말고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바라며,    ***정직한 신앙을 최고 중요한 것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순수성과 엄격성을 지켜나가는 교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더 의식하는 거짓과 거품을 제하여 버리기로 결심하시는 이 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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