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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존귀한 사람들 (빌 2: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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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사람들 (빌 2:19-30)


가끔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로마가 정말 대단한 나라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가 세운 나라 중 가장 위대한 나라>라는 칭찬이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전차를 몰고 적진으로 달리는 장군들의 멋진 모습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백미입니다. 

그러나 그 로마 장군들이 영화에서처럼 멋있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생각보다 잔인했습니다. 한 로마 장군이 보낸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그는 아내가 임신 중일 때 전선에 나갔습니다. 얼마 후 아내로부터 <아들을 낳았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그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편지는 <아기를 낳는다고 수고했습니다. 산후 조리를 잘 하세요. 아기가 보고 싶습니다>는 식의 편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편지는 비정했습니다. <아기는 건강한가? 건강하지 않다면 내가 도착하기 전에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기가 건강하다면 남겨두고, 건강하지 않다면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의 분위기였습니다. 강한 것이 선이었습니다. 지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는 나라입니다. 강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강한 사람만이 존귀하게 대접받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강해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런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아주 특이한 말씀이 나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지금 누군가가 오는데, 그를 환영하고 존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을 읽은 사람들은 빨리 나가서 환영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풍선을 불어서 매달고, 현수막을 달고, 꽃다발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연도에 도열하여 박수를 보내고, 아이들이 나와서 환영의 키스를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대한 파티를 열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오길래 이처럼 환영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로마 황제라도 옵니까? 지방 총독이라도 옵니까? 아닙니다. 너무 뜻밖의 사람이 옵니다. 

그의 이름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는 본래 빌립보교회의 교인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감옥에 갇힌 바울을 사랑했고, 에바브로디도를 뽑아서 바울을 돕도록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 곳에서 병이 들어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오히려 바울에게 짐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25-27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는 자신의 몸 하나를 돌보지 못한 일종의 실패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뭘 그렇게 대단하게 환영하고 존귀하게 여기라는 것일까요? 국가대표 선수들도 우승을 하면 환영을 받으면서 돌아오지만, 예선 탈락하면 뒷문으로 조용히 나옵니다. 그런데 병들어 임무 완수도 못한 사람을  이렇게 환영해 주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째로, 하나님 나라는 약한 사람들도 존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세상 나라의 원리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삽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강한 사람만이 존귀한 대접을 받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약자들도 존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게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성경은 약하고 흠이 많았지만 얼마든지 존귀하게 된 많은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은 성경에서 존귀한 사람으로 서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요셉은 많은 약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비행청소년이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일찍 잃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라헬은 그의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하여 일찍 죽었습니다. 그 후 그는 아버지 아래서 컸습니다. 아버지의 끔찍한 사랑은 오히려 그를 자기 중심으로 만들었습니다. 요셉 혼자 채색옷을 입고 거들먹거렸습니다. 그러면서 형님들에게 미움과 견제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애굽에 팔렸고, 노예가 되었고, 감옥에까지 갔습니다. 나중에는 그 곳에서 성적 유혹까지 노출되었습니다. 이게 그가 살아온 길입니다. 이쯤 되면 그는 망가질 위험성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그 깊은 상처들 때문에 벌써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나중의 요셉의 모습은 그가 과연 이런 힘든 삶을 살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그는 아름답습니다. 그는 전혀 상처를 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님들을 위로하고, 부양합니다. 자신을 노예로 부리고 감옥에까지 보낸 애굽 사람들을 먹여 살립니다. 그는 진정한 리더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다름 아닌 하나님의 손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는 많은 상처를 다 극복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그 약함을 극복하게 하시고 존귀하게 만드십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이 은혜를 얻길 원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약할 뿐 아니라, 추한 사람들까지도 존귀하게 만듭니다. 그 극적인 이야기는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서 발견됩니다. 거기 <다말>이란 여자가 나오는데, 다말은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시아버지의 아이를 낳은 추한 여자였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룻>은 이스라엘 사람이 용납하기 힘든 이방 여인었습니다. <밧세바>는 외간 남자와 정분이 났던 여자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더러운 여자들, 수치스런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여인들이 예수님의 족보 안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이는 선언적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모든 약함과 추함도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바뀐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수치는 더 이상 그들의 미래를 지배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과거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수치와 어둠의 이야기를 덮으시고, 새로운 미래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이 세상의 많은 약자들에게 희소식입니다. 약자들도 <비록 우리가 연약하지만, 우리가 추하지만, 우리도 존귀하게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약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모두에게 이 복이 임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이런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기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결과보다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과 보다 임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과정이 아름다우면 비록 결과가 신통치 못해도 칭찬하십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그랬습니다. 본문 30절을 보세요.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에바브로디도는 병이 들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바울을 도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바로 이 태도가 소중한 것입니다. 비록 병들었지만,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그의 진지하고 충직한 태도가 중요합니다. 

약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십시오. 남들처럼 잘 하지 못해도, 많이 이루지 못해도 지레 겁먹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얼마 전 국민일보에는 정연아씨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분은 우리나라 최고의 여류 강사 중 한 분이고, 베스트셀러 작가입니다. <이미지테크연구소> 소장이자 <이미지컨설턴트협회> 이사장으로 활기찬 인생을 살고 있는 분입니다. 신문에는 그녀의 활짝 웃는 사진이 실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지금 웃을 상황이 아닙니다. 병원으로부터 혈액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림프암 4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사진 속의 얼굴도 병으로 부석부석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웃고 있습니다. 그 분은 얼마 전에 자살한 어떤 분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자살한 그 분 역시 우리나라의 최고 강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행복전도사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질병으로 고통받다가 결국 자살했습니다. 자신의 약함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연아씨는 자살한 분과 달랐습니다. 그녀는 무서운 병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기자에게 <웃으면서 살다가 웃으면서 죽자>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또 남은 시간에 밤이면 마약 등 환각의 바다로 변하는 홍익대 문화를 바로 잡는 데 헌신하겠다는 목표를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분이 얼마나 오래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이 많이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조금 밖에  못하고 하나님께로 간다고 해도 그녀는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왜입니까? 비록 약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애쓰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항암치료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림프암 4기를 앓으면서, 언제 악화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의욕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유일한 이유는 그 분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2008년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그녀를 지탱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주님께서는 비록 약해도 최선을 다할 때 존귀하게 여기시는 분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존귀한 삶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죄인이 의인되고, 약자도 존귀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약하지만, 존귀한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바울이 아들처럼 여기는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도 핸디캡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출신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를 만난 곳은  루스드라였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절을 보면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젊은이였습니다. 그 다음절을 보면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출생이 문제였습니다. 1절 후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그의 어머니는 유대 여자였고, 그의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혐오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6장 3절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을 보게 됩니다. 비록 혼혈아로 태어났지만, 그의 믿음만은 철저히 유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거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또 그는 몸도 약했습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을 보면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약품이 발전하지 못했던 고대 시대에는 포도주가 약품 대용으로 쓰였는데, 이 구절을 통해서 디모데가 몸이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게다가 그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에베소 교회의 목사가 되었는데, 그는 큰 일을 하기에는 아직 너무 연소했습니다. 경험이 부족한 그에게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12절을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출생에도 약점이 있고, 몸도 약하고, 나이 어려 경험도 없다, 이게 디모데의 약점이었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렇게 약한 사람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 약점 때문에 인생을 포기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한없는 신뢰를 받고 있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했고, 22절을 보면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디모데도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약함에도 불구하고 매사에 지극한 정성을 다했습니다. 바울에게도 최선을 다했고, 교우들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한계를 극복한 리더십을 보여줍니다. 

저는 우리가 출생을 탓하지 않길 원합니다. 몸이 약하다고, 가진 게 없다고, 환경이 좋지 않다고 원망하지 않길 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약해도 존귀하게 될 수 있습니다. 과거가 추해도 존귀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삶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사명자는 죽지 않는다>고 말해 왔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아직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 두시는 것입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면서 살게 하시는 이유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 할 수 없어도 해야 합니다. 많이 할 수 없어도 해야 합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그가 많이 했다>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했다>는 것입니다. 많이 하든 적게 하든 하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또 <그가 했다>는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록 그가 하지는 못했지만, 정말 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없이, 진정으로 하려고 애썼다는 사실이, 그 태도가,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위해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쓴다면, 적게 하든 많이 하든지 상관없이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주님은 변두리에 있는 약자들을 한 복판에 세우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한 쪽 손이 말라 사용하지 못하는 한 장애인을 보셨습니다. 그는 한 구석에 자신 없는 모습으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당시 장애인은 성전에 갈 수 없었고, 일할 수 없어서 가난했습니다. 그는 변두리를 배회하는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보자마자 말씀했습니다,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초청이자 명령이었습니다. <더 이상 구석에 쪼그리고 있지 말라. 더 이상 변두리 주변인이 되지 말라, 중심에 서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끄러워 일어서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장애인입니다. 전 여기가 딱 좋아요>라고 말하면서 일어서길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말라붙은 손이 부끄러워 내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손을 내밀려고 애를 썼고, 그 순간 말랐던 그의 손이 쭉 펴지면서 새 힘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한 가운데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해 굳어버린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약함을 탓하지 말고 떨치고 일어서서 존귀한 삶에 도전해야 합니다. 

잘 못해도 합시다. 힘들어도 최선을 다합시다. 출신 성분이나 탓하고, 환경이나 탓하고 앉아 있지 맙시다. 우리 모두 존귀하게 되길 원합니다. 조금 밖에 못해도, 최선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날 것입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겸손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믿음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당신의 그 충성이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주님이 기억하시면 족하리 
예수님 사랑으로 가득한 모습 
천사도 흠모하는 아름다운 그 모습 
천국에서 해 같이 빛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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