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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행 9: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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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행 9:26-31)


사울에 의해 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틴 지역이 신학적인 문제로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성장해갔습니다.
그 당시 로마황제 칼리굴라(Caligula : A.D. 37-41)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났고 41년 1월 24일에 황제가 피살되었습니다. 이로써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멈추는 듯 했습니다.

'교회가 든든히 서 가고'라는 말은 교회를 건물로 생각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연합하여 이어져 갔다는 말입니다(엡 2:21).
교회 성장은 영적 대각성운동의 결과입니다. 곧, 바른 교회 운동의 결과 성장이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혁은 축소가 아니라 확장입니다. 개혁은 나눔이 아니라 부흥입니다. 개혁은 소요가 아니라 평안입니다. 개혁은 파괴가 아니라 건설입니다.
오늘은 칼빈 탄생 501주년 및 종교개혁 493주년을 기념하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Ⅰ. 종교개혁의 필요성입니다.

종교개혁을 로마카톨릭적 관점에서 본다면 종교개혁은 이단행위입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학자 마리안 메케나는 종교개혁을 '교회에 대한 반란'이라고 불렀습니다.
천주교 학자들은 당시 루터의 개혁운동을 독일 민족주의에 그 원인을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루터의 신앙이나 신학적 동기는 완전히 무시되고 민족주의 운동으로 왜곡되는 웃지 못할 사건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개신교 역사가들은 종교개혁운동을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쇄신하기 위해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과 같은 개혁자들을 세워서 교회개혁을 시작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개신교 역사가들의 한결같은 입장은 '교회는 항상 개혁을 필요로 한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배후에는 필연적인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개혁주의라고 할 때 쯔빙글리와 칼빈의 개혁운동은 루터의 개혁운동과 구별하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라고 하면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연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칼빈주의 5대 교리는 화란의 개혁자들에 의해서 만든 교리적 체계로서 개혁주의 구원관을 설명하는 것이지 칼빈주의 5대 교리가 곧 개혁주의는 아닙니다.

개혁주의를 칼빈주의라고 하는 것은 칼빈이 성경적 가르침을 분명히 하고 이 신학을 체계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곧 성경주의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곧 하나님 절대주권주의입니다. 이것이 행동화될 때 신행일치주의로 나타나게 되고 곧 순교적 신앙으로 성화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교리적 탈선(Doctrinal deviation)의 결과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세속화와 교황의 타락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성스러운 교직을 서로 사고 팔고 하는 교직매매 행위가 일어났고 성직자들의 부도덕은 교회를 혼탁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교회는 호색과 방자함으로 부도덕의 광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른바 교황 축첩으로 야기되는 음행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고 하급 성직자들은 축첩을 묵인 방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성스러워야 할 교회는 호색과 방탕으로 가득찬 부도덕의 산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다루는데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는 당시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15세기의 유럽은 6천 5백만 내지 8천만의 인구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60명 이상의 왕들과 왕자들, 그리고 대주교들을 포함한 기타 통치자들에 의해서 주요한 권력들이 장악되고 있었습니다.
산업혁명의 물결 속에 자본주의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른바 새로운 부르조아 집단이 태동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봉건제도의 행정체제에 익숙해 있던 교회는 봉건 영주와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교황들은 부의 축적을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고, 그로 인하여 교회는 탐욕의 화신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교황들의 도덕적 영향력은 땅에 떨어졌고 인문주의자들을 포함한 개혁가들은 분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직접적인 원인은 그 무엇보다도 교황 레오 10세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루터의 봉기였습니다.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은 막대한 비용으로 벌써 100년 이상이나 공사를 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했습니다. 레오 10세는 성당 완공 조달비를 위하여 10여 년 전부터 면죄부(Indulgence)를 팔기 시작했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량은 날로 증가해 갔습니다. 처음에는 성당 건축이나 터어키인에 대항하기 위한 십자군원정 자금의 조달 명목으로 판매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황이 자기 것으로 치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전 유럽 토지의 3분의 1은 하나님의 이름 아래 등기되어 소유권이 교회에 속해 있었고 또한 교회 행정 조직을 통해 독일 내 총수입의 5분의 2가 로마로 유출된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성직을 가진 자가 로마에서 사망할 경우에 공석 중인 성직에 지명될 경우 그 대가로 금품을 수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해 첫 수입을 교황에게 바치는 것 등을 제도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성직 매매의 기회는 점차 증가해갔습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형식만 남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한 중세 로마카톨릭은 계급주의적인 제도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을 통하여 종교행위를 강요해 왔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과 비슷해졌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Ⅱ. 종교개혁의 목표입니다.

1) 원시 기독교를 회복함에 있습니다.
지극히 성경적인 본래의 신앙과 생활에서 이탈해 버린 중세 로마카톨릭의 형식화된 의식적 생활에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진 나머지 형식적인 제도(Sacramental system)와 교회적 율법주의(Ecclesiastical legalism)와 같은 비복음적인 전통에서 벗어나서 사도적 교회로의 환원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은 어떤 새로운(New) 운동이 아니며 새로운 신학운동(a new Theology)도 아닙니다.
종교개혁을 통한 신학은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이미 있어 왔으나 오랜 세월 동안 로마카톨릭의 교권과 비복음적인 인본주의적 전통에서 가려져 있었던 것을 다시 찾아내는 지극히 소박한 운동입니다.

2) 영적 부흥에 있습니다.
적어도 종교개혁은 영적 갱신운동(Spiritual renewal movement), 혹은 영적 부흥운동(Spiritual revival movement)으로서의 개혁운동입니다.
종교개혁을 교리적 개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종교개혁은 영적 부흥운동에 있으며 오랫동안 경직된 제도 아래서 해방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영적인 부흥에 대한 갈급함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부흥의 측면보다 교리적인 요소가 더욱 분명하게 부각된 것은 당시 부패한 로마카톨릭의 신학적 입장이 성경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리적 개혁이 시급한 와중에 상대적으로 영적 부흥에 대한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뿐입니다.

3) 만인 사제직의 쟁취에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목표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의 재발견과 함께 만인 사제직의 재발견에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카톨릭의 교권자체를 부인한 것이며 사제주의를 극복한 것입니다.
'신부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신자의 영혼을 책임지고, 신자에게 대하여는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한다.'는 사제주의의 그릇된 가르침을 극복한 것입니다.
개혁자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Ⅲ. 종교개혁의 성과입니다.

1) 종교개혁은 성경의 근본사상으로 환원이라는 대업적을 남겼습니다.

2) 우상화와 의식화한 예배를 성경 중심으로 환원했다는 것입니다.
일반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를 사용치 않고 그 나라 대중어로 설교를 했다는 것은 예배의 큰 혁신이었습니다.

3) 전체주의 신앙에서 개인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개인 각자가 직접 하나님과 자유로운 신앙의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종교개혁이 경제계에 미친 영향은 봉건주의의 몰락으로 중산계급이 부흥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또한 학문 장려와 인문주의 개혁으로 일반적 지식이 발달하여 새로운 문화의 발달을 가져 오게 되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개인주의의 발달로 자본주의를 형성하였고, 각종 공업이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5) 칼빈은 구원의 서정, 즉 회개, 회심, 칭의, 성화, 용서와 중생은 반드시 함께 일어나야 하고 또한 강조되어야 하는 참 신앙의 덕목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칭의와 성화는 어떤 시간적인 연대기적 순서나 인과적 관계, 혹은 목적론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동시에 성화시키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칭의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칼빈의 구원의 기초가 되는 예정 교리를 구원론의 시작이 아닌 오히려 구원론의 마지막에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학적, 혹은 목회학적으로 매우 특이한 것입니다.

6) 경건생활의 회복입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경건이란 '오히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주(主)로서 두려워하고 경외할 뿐 아니라 그분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거역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무서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경건이야말로 기독교인의 삶의 시작이요 과정일 뿐만 아니라 목적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 삶과 신앙의 영혼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칼빈의 사상 속에 경건의 목적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7) 가시적 성도개념과 영적 각성에 대한 공헌입니다.
성도의 자격은 가시적(可視的, 겉으로 나타나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고 듣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 인(人)자 네 개를 써놓고, '사람이면(人) 다 사람이냐(人), 사람이라야(人), 사람이지(人)'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다워야 하고 교회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살렘교회의 언약에 따르면 청교도 교회의 정회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① 목사와 장로들이 지망자들에게 기독교 교리의 기초에 대한 지식과 적절한 행동에 대하여 회견을 하는 신중한 절차
② 치리 장로 중의 한 명이 지망자의 신앙, 삶, 행동 등에 관한 질문을 함으로 점검
③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동에 대한 설명이나 회개 요구(회개는 개인적, 혹은 공개적일 수 있었다). 
④ 지망자의 삶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역사와 자신의 믿음에 대한 진술(약 15분 동안)
⑤ 교인들의 투표에 의한 인준으로 받아들여지면, 교회의 언약을 받아들이고 교회의 완전한 회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절차를 통해 완전한 교회의 회원이 되어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은 바로 교회의 순결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예배와 삶을 지속시켜 나가고자 하는 청교도들의 집요한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들은 청교도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행하신 구원사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현재 영적전투에 임하는 것에 더 큰 관심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주교 정진석 추기경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오천여명의 군중들이 각자의 점심을 싸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부정하는 이단입니다.
천주교를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라고 하는 보수교단 지도자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천주교는 구교, 신교 차원이 아니라 우리와는 전혀 다른 종교집단입니다.
중세 천년의 로마카톨릭의 암흑의 터널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탈출한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이 개혁주의 교회를 낳은 것은 아닙니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개혁주의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고 연합하는 것은 아름다운 덕목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믿든지, 어떻게 믿든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W.C.C. 운동을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종교일치주의, 종교다원주의는 철저히 배격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신앙고백은 하나이지 둘일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 이상의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두 절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절대만이 존재합니다. 우리에게는 한 절대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정한 선포, 성례의 정당한 집행, 권징의 신실한 시행이 가시적이 되어야 합니다.

개혁주의 교회는 전세계적으로 많지 아니합니다. 미국, 한국, 남아공, 영국, 프랑스, 유럽에 걸쳐 간혹 보이는 정도입니다.
종교개혁을 통해 종교전쟁과 교파분립이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교파분립은 주님께서 이미 하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진리문제 때문에 야기되는 분파나 분열은 언제나 옹호되어야 하고 여기에 대한 평가가 왜곡되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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