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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판의 장벽을 넘어서기 (느 4:1-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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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의 장벽을 넘어서기 (느 4:1-6, 15-20)


비판과 비난은 사람을 외롭게 만듭니다

최근 한국 연예계의 유명스타들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박용하, 최진실 남매, 안재환, 이은주, 그밖에도 여러 연예인들이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깜짝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사람, 심지어는 국가의 최고 권력을 누렸던 사람까지 자살하는 모습을 보면서 국민 모두가 가슴 아파했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수만 명의 인구 중 21.5명꼴로, OECD 가입국들의 평균 자살률(11.1명)보다 2배가량 많습니다. 지난 2009년 한해에 자살한 사람의 숫자는 14,579명으로, 2008년보다 20%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하루에 매일 4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끊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았으면, 혹 얼마나 많은 육체적 고통을 느꼈으면 고귀한 생명까지 스스로 끊게 만들었을까요?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을 나 홀로 책임져야한다는 것이 큰 억눌림으로 다가옵니다. 슬픈 일과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함께 울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에 고독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것이 깊어지면 스스로를 몰아가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억울한 비난과 조롱을 받았는데 이것을 어디서도 해명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다른 이를 향해 분노를 하거나 세상을 향해 넋두리를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분노하며 자살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세상의 비판과 조롱은 나를 외롭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무섭게 만듭니다. 이 시대는 점점 비판과 비난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위험한 사조가 이 시대를 휩쓸고 있습니다. 세상은 남을 쉽게 인정하고 칭찬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함께 높이 올라가기보다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라고 부추깁니다. 이렇게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선동가적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고도 말합니다. 

다니엘 골만이 쓴 「감성의 리더십」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분란과 분열을 만들어내는 선동가의 특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감정에서 부정적인 미움을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때로는 두려움을 부추기면서 비겁함 속으로 몰아가기도 합니다. 그의 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두려움과 분노로 점철된 부정적 감정만 끄집어낸다. 공동의 적이 우리에게 어떤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혹은 우리의 것을 빼앗을지 모른다는 식의 두려움과 같은 것을 조장하고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은 사람들이 대의명분을 위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끊임없이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시킨다.” 

부정적인 감정이 확대되어 다른 사람에게까지 전염되면, 그것이 우리 안에 싹터 있는 희망을 뭉개기 시작합니다. 낙관주의적인 태도를 짓밟습니다. 변화와 성숙을 위한 창조적인 상상력마저도 홍수에 쓸려가듯이 다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비판과 비난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비판과 비난 없이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어느 누구도 면제받을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비판과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위대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아픔의 과정을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어느 고등학생의 고백입니다.

나는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으로부터 꾸중을 자주 받았습니다. 어느 날 공부 좀 해보려고 책상머리에 앉았더니 이를 보신 부모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게 웬일이야? 내일 아침에는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어떻게 보면 나를 격려하는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비웃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누나가 옆에서 또한 거들었습니다. “하루 이틀 가겠어요? 저렇게 공부해도 쉽게 성적이 안 오를걸?”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의 결심, 나의 열망은 싹뚝 잘라져 나갔습니다. 나는 그 후에 포기하기를 열망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한 학생만의 고백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꿈들이 있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비전들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너는 못해! 어제도 했잖아! 넌 능력이 없잖아!”라고 지나가듯이 한 그 한마디 말 때문에 내 꿈을 소진해버렸고 내가 가지고 있던 비전과 결단을 뒷전으로 집어치웠던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이러한 비난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변화와 성숙의 기회로 삼았던 모습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여기까지 온 데에는 후자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경우에도 어려운 것입니다. 젊을 때도 어려웠고, 40~50대가 되어도 어렵고, 70~80대가 되어서도 남에게 비판 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패배주의적인 사고와 냉소주의적인 비난이 우리의 꿈을 가로막습니다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고향 땅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유대사람들을 독려하여 성벽을 지었습니다. 성문을 새로 만들어서 끼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요,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새롭게 환기시켜주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마음이 뿌듯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참여했고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적대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을 고소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느헤미야의 계획을 뿌리 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산발랏과 도비야라는 사람이었는데, 이스라엘이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산발랏은 당시 사마리아의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함께 성벽을 쌓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들이 강성해지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옆에는 도비야가 있었습니다. 그는 암몬 사람으로 산발랏의 참모 역할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정보망을 가지고 스파이 노릇을 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산발랏은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이 쌓여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향해 비난의 소리를 높였습니다.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일러 말하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느헤미야 4:2)

“너희들이 그렇게 한다고 특별한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가? 헛수고하지 마라!” 산발랏은 그들을 비판하고 비난했습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듣던 도비야도 여기에 조롱과 비웃음을 더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시하고 멸시했습니다.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있다가 이르되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느헤미야 4:3)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꿈과 비전을 이루려고 할 때 제일 먼저 부딪히는 두 가지 악조건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내부에서 나를 겁나게 만드는 패배주의적인 사고입니다. ‘너 해봤잖아? 그래서 안됐잖아! 넌 능력이 없잖아? 네가 결단한다고 되겠어? 그거 하지 마! 그냥 그렇게 살아!’ 내 속에서 나를 억누르는 패배주의적인 사고가 끊임없이 나의 비전과 꿈들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넘어서려고 노력합니다. 무언가를 해보려고 시도하니까 내 모습이 달라지고 내 행동과 언어가 달라집니다.

이 때 부딪히는 두 번째 악조건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다가오는 냉소주의적인 비난입니다. 이것은 내 결단을 우습게 만듭니다. 너는 할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나를 겁나고 두려운 자리로 인도합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이 두 가지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 일이 옳은 일이면 옳은 일일수록 더 부딪히게 되어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꿈과 비전과 사명이라면 더 큰 어려움에 부딪힐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비판과 비난으로 마음이 상했을 때 먼저 하나님께 토로하십시오

이때 느헤미야는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이겨나갔을까요? 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슴에 품으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판과 비난을 받으면 가장 먼저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나빠집니다. 억울한 심정이 들고 미움의 분노가 발산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것을 산발랏에게 터뜨린 것이 아니라 먼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하건대 그들이 욕하는 것을 자기들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 앞에서 그들의 악을 덮어 두지 마시며 그들의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를 노하시게 하였음이니이다 하고” (느헤미야 4:4~5) 

어떻게 보면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개인적인 복수를 하려는 것 같고, 저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아픈 감정을 하나님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도 업신여김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생기는 분노로 인해 하나님께서도 분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이 기도는 결코 개인적인 복수를 위한 이기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것에 대해 통분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는 칼과 창을 들고 산발랏을 향해 달려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시간을 주관하시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내 삶과 공동체의 삶, 이스라엘 백성의 삶을 드렸습니다. 갚으실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감당할 뿐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억한 심정을 사람들에게 말하면 불평과 원망이 됩니다. 심지어는 저주가 될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 앞에 먼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토로해보십시오. 그것은 탄식이지만 기도입니다. 슬픔이지만 간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뢰면 우리의 근심이 하나님 앞에서 사라집니다. 내 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가 물러가면서 가슴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시편을 읽으셨습니까? 시편기자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 뭐하고 계십니까? 왜 침묵하고 계십니까? 세상의 악한 자들이 저렇게 잘 사는 것을 왜 그대로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토해내고 하나님께 맡길 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게 은총을 주신 하나님께 노래를 부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나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말과 사람에 초점을 두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내게 꿈과 비전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내 언어와 삶의 초점을 맞춰나가는 것입니다. 나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말을 잠깐 음미하고 나의 부족함과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사고의 중심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번 깊이 생각하고 모두 뒤로 돌려야 합니다. 내 사고와 생각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하나님을 내 삶으로 초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초청하지 않고, 비판과 비난과 조롱의 생각들이 내 사고의 중심에 들어오게 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기 연민 속에 빠지게 되고 나는 못한다는 패배주의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깊은 우울증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버려야합니다. 내 능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 내가 동굴 속에 피하고 싶을 때, 기도하면서 사고의 중심부에 예수님을 내 구주로 모시고 그분께 모든 것을 토해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안에서 나의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바꾸십시오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느니라” (느헤미야 4:14)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끄셨던 역사를 기억하게 되어 말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과 사람이 두렵고, 세상의 비판과 비난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먼저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두면 내 삶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느헤미야는 9절에서 우리가 기도로 준비하고 방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능력을 쏟게 하는 축복의 능력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고백하면서 이렇게 백성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 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느니라” (느헤미야 4:20) 

느헤미야는 말합니다. “이제 내가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생각한 것이요, 내 손과 발이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것이요, 내가 열심을 갖는 것은 하나님이 열심을 갖는 것이요, 내가 싸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싸우시는 것이다!” 느헤미야는 이 놀라운 사실을 고백하면서 이스라엘백성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 안에서 나의 사건을 하나님의 사건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 비판과 비난을 받지 않게 하옵소서.” 이러한 기도는 소극적인 기도입니다.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비판과 비난을 받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그것에 대항하게 하시고 도전하게 하옵소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이루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서 부딪힐 때 나를 위해서 친히 싸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삶 속에서 비판과 비난의 역사는 끊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나의 감정과 억울한 심정, 내 마음 속에 상처들을 하나님 앞에 다 쏟아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된 말씀을 가지고 주님과 더불어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싸우시는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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