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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것은 그것입니다 (행 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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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것입니다 (행 2:14-21) 


화장실에 앉아서 벽을 물끄러미 쳐다보노라면 별의 별 것이 다 보입니다. 벽 타일에 무규칙적인 패턴이 그려져 있지 않습니까. 대리석이라든가 자연석에 무규칙 적으로 그려져 있는 그 패턴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면 사람의 얼굴도 보이는 것 같고 짐승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고 재미있는 패턴이 그 안에 나타납니다. 물론 그런 그림이 진짜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눈이 그런 비슷한 무늬를 잡아내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하늘의 뭉게구름을 쳐다보면 토끼얼굴도 나타나고 뭐도 나타나고 이런 그림이 보이는 것처럼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대리석 타일을 잘 쳐다보면 거기서 아마 재미있는 캐릭터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스스로 개발할 수 없는 재미있는 그런 그림의 아이디어들이 벽에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아무런 의도적인 메시지가 없는 상황에서 마치 타일 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자기가 원하는 메시지를 상상하는, 그리고 그것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아무개는 벽에서 하나님을 보고 아무개는 성모마리아를 보고 아무개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종교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연구해야 될 문제이겠지만 적어도 성경책은 벽에 그려진 패턴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벽을 바라보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것은 무의미하게 또 우연히 나열된 무늬와는 다른 의도성에 의해서 하나님의 의도와 사람의 순종에 따라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 예컨대 선불교의 차이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선불교는 문자 그대로 벽을 바라보고 자기의 마음을 비우고 명상에 잠깁니다. 어떤 상상도 가능한 판국이지요.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무를 명상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마음에 무엇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기록된 성경말씀을 토대로 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우연한 생각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기록된 말씀을 읽고 그것을 묵상하고 거기에서 깨우침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미신이나 종교적인 착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늘의 뭉게구름을 쳐다본다면 사람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달라요. 마치 심리테스트용 그림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심리학자들이 심리 테스트용으로 사용하는 데칼코마니 식의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 눈에 무엇이 보입니까. 사람에 따라서 나비가 보일수도 있고 곤충이 보일수도 있고 사람이 보이고 이런 식으로. 이것은 거기에 어떤 그림이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심리 상태에 있는가를 보기 위한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말씀은 우리가 어떤 심리상태에 있든지 내가 누구든지 어느 시대에 사는 사람이든지 남자든 여자든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어떤 사람이든 간에 성경말씀을 읽고 이 성경말씀에 감동을 받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규칙적인, 의도적인 결과가 나타납니다. 

어느 시대든 마찬가지에요. 이 성경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경험을 연구해보면 거기에 몇 가지 공통적인 성격이 나타나는 것을 엿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의도된 것이고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회심이든 찰스 웨슬리의 회심이든 D. L 무디의 성령체험이든 간에 믿음의 경험을 한 사람들의 경험담을 연구해 보면 거기에 나타나는 몇 가지 공통적인 핵심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라는 것입니다. 회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면 제일먼저 자기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고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게 됩니다. 만일 사람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은혜를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믿음에 이르는 것이 힘든 이유는 회개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최초에 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 말씀이에요. 회개는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신비함을 깨닫는 순간에 사람은 상대적으로 자신이 추하다는 사실, 자신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것이 깨달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하시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하나님에게 회개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 남들을 통솔하고 남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만 하던 사람, 남들을 가르치던 입장에만 있던 사람이 자기의 연약함과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기대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사람은 어린이든 어른이든 간에 남자든 여자든 간에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누가 내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싫어하는데 누가 스스로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사람은 회개합니다. 회개가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건 모순적으로 보일 수 있어요. 회개는 힘들고 부담되고 두려운 경험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기쁜 경험입니다. 어떻게 이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게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랍다는 경험입니다. 내 죄를 깨닫지만 이것이 죄를 깨닫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래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비인격적인 힘이라든가 기라든가 어떤 진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인격체이시고 사랑이십니다. 성경말씀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God is love’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만났다고 주장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난 게 아니에요. 내가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데에서 우리는 사랑의 능력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고 내 상처가 치유되고 이전에는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한 것, 나에게 상처를 준 것, 섭섭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내 자신이 아프고 사람들이 원망스럽고 사람 만나기가 두렵고 남의 이목을 의식했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고 이제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생각하기 보다는 내가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왜 그리스도인이 사랑을 실천한다고 가르치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첫째는 회개하고 둘째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은혜 체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성령이든 은사든 방언이든 예언이든 병 고침이든 환상이든 꿈이든 간에 그것이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성령의 역할은 우리를 감동해서 예수 믿게 만드는 것이고 성령의 역할은 우리에게 권능을 주어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임하시면 그가 나를 증거하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성령의 역할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고 더 가까이 하게 합니다. 요한1서 말씀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수록 우리는 더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공통적인 속성입니다. 

제가 열일곱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는데 그 이전에는 교회를 안 다녔느냐. 그 이전에도 교회에 다녔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다가 큰 예배당이 있는 것을 보면 그 교회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저 교회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도 수련회도 가보고 부흥회도 가보고 병 고치는 집회에도 가 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에는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어떤 느낌을 가졌느냐면 남의 집에 구경하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남들이 식사하는데 손님으로서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뭔지 내 것이 아니고 내 하나님이 아니고 뭔가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고 적어도 내 안에 그것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만약 여러분 중에 교회를 나오셔도 그런 느낌을 벗어버리기 힘든 분이 계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아직 제대로 회심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회심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더 이상 여러분이 손님이 아니고 구경꾼이 아니고 방관자가 아니에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한 달에 한 번씩 어린이 회의가 열렸는데 어린이 회의는 임원들이 나와서 회의도 하고 표결도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어린이 회의에도 방청석이 있었어요. 국회처럼 방청석이 있는데 방청석은 누구든지 와서 앉을 수 있지만 표결에 참여할 수 없어요. 만약 표결할 때 ‘가하면 손드십시오.’ 하는데 방청석에서 손을 들면 그건 무효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여러분이 나는 교회를 나오는데 나는 방청석에 앉아있다, 그건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나의 하나님이 아니고 김 집사의 하나님, 우리 아내가 믿는 하나님, 우리 애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지 내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임하시고 내가 거듭나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성령이 나의 영과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바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아바 라는 말은 아빠라는 말과 같아요.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입니다. 이것은 애정 ․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믿어요.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신은 두려움의 대상이에요. 멀리 계시는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그 멀리 계셨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목자요 아버지가 되어주셨다는 얘기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두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아무리 야단을 쳐도 그렇다고 해서 부모의 눈치를 보고 냉장고를 열지 못한다든가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든가 그런 자식은 없어요. 아무리 야단을 쳐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냉장고를 열고 밥 달라고 하고 돈 달라고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좀 뻔뻔하지요. 그건 자식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이기 때문에 그런 자식을 다시 품어주는 것입니다. 달라는 대로 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은 주고 싶은 것입니다.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 이런 광고도 있는 것처럼 부모의 마음은 주고 싶은 거예요.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너희 중에 아비 된 자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인간은 악한 존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악한 인간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천부 라는 말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에요. 남이 아니에요. 구경꾼이 아니고 방청객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자녀로서의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지만 이 두 가지가 다 가능한 것입니다. 

권리만 강조할 없고 의무만 강조할 수 없어요. 기복신앙은 권리를 강조하는 주의이고 율법주의는 의무를 강조합니다. 둘 다 병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로서의 권리도 있고 의무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의무를 소홀히 할 때도 있지만 권리를 믿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두 가지가 병행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받아주는 것은 아들의 권리이고 그 아들이 돌아온 후에 자기 아버지의 일을 따라서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의 의무가 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가 병행되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에 다닐 때 남의 집에 하숙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일 년 정도 하숙을 했는데 그 집에 큰 정원이 있는데 식목일이라고 나무를 심어요. 그런데 그 집의 아들인 형과 그 친구는 나무를 심는 일을 하는데 저한테는 안 시키더라구요. 그러니까 저로서는 일을 시키는 게 오히려 특권이지 손님이라고 일을 안 시키는 것은 차별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저에게 같이 일을 시키면 식구라는 느낌이 들 텐데 손님이기 때문에 일을 안 시키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차별당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은 권리를 갖는 것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고 오히려 기쁨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남으로 여기지 않고 손님으로 여기지 않고 자식이기 때문에 나에게 이 일을 맡기시는구나,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일을 맡기신다는 것은 특권이에요. 그게 아니고 ‘나는 네가 필요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더 이상 네게 맡길 일이 없다.’ 얼마나 고독한 것입니까. 그건 나는 이제 하나님 나라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얘기인데 그것은 불행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나를 찾으시고 나를 부르시고 쓰시고 여기에 우리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 은혜를 받은 자의 특권이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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