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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왜 전도해야합니까?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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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도해야합니까? (눅 16:19-31)


저는 요즘 제가 얼마나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는가를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2010. 터치 153 새생명 축제를 준비하며 새벽마다 찬바람을 가르며 주님 앞으로 나오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보면서 새삼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행복’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특새에서 누렸던 기쁨과 행복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경험하지 못하면 결코 표현할 수 없기에 세상은 우리의 영혼이 이른 새벽에 창조주와 대면하는 희열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복한 심정을 정말 그대로 표현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온 몸으로 경험하였기에 표현된 시인(詩人)의 행복한 영혼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이번 특새는 하나님을 사모함으로 이른 새벽에 달려왔던 그의 자녀들을 만족케 하고, 갈급함으로 주의 전에 엎드렸던 우리의 심령을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가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이제 다음 주면 교회는 저 들녘 마당에 벼를 베어서 타작마당에서 타작하는 농부의 기쁨처럼 우리 교회도 태신자를 초대해서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는 축제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찬양 팀이 와서 새로 나오신 분들과 함께 기쁨의 찬양을 부를 것입니다. 저는 이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이 이렇게 대단한 것이구나. 내가 예수 믿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구나.' 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면서 감사를 한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은 본문을 가지고 천국과 지옥을 가는 기준이 애매하다고 말합니다. 어디에 거지 나사로가 예수 믿었다고 기록되었느냐? 부자가 불신자라는 증거가 무엇이냐? 라고 따져 묻습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가는 근거를 다르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구원의 근거 또는 조건을 강조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고 난 이후에 가게 될 각기 다른 세계 즉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어떤 사회나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공존합니다. 미국에도 거지는 있고 일본에도 있습니다. 미국의 뒷골목 빈민굴에 가보면 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고 합니다. 사회보장 제도가 만들어지고 지켜지는 나라에도 거지는 존재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자가 다 나쁜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 있는 거지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 속의 이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을 대표하기보다는 너무 세상 살기가 좋아 하나님을 마음에 담아둘 수 없었던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많은 게 죄가 아닙니다. 부자는 자기가 소유한 재산을 인하여 더 중요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입니다. 그는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이 자색은 로마 황실에서 전용으로 입는 색깔입니다. 자색의 빛깔은 깊은 시내의 고동 끝에서 조금씩 나오는 자연 색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옷 한 벌을 자색으로 온전히 물들이려면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실은 자기의 권위를, 부자들은 자기의 부요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색 옷을 입었었습니다. 

거기다가 고운 베옷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운 베옷은 이집트에서 직조를 했습니다. 마에서 가장 가는 섬유로 천을 만들었기 때문에 한없이 부드럽고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 값을 칠 때에는 옷 무게와 금을 똑같이 달아서 금 값을 지불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당시에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그 고운 베옷을 입었는지 모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구두쇠가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모아놓고 자기 좋은 것을 원 없이 나누고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쯤 되면 팔자 중에도 상팔자고 아마 이런 삶을 한번 살아봤으면 하고 부러워할 만큼 성공한 삶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이 사람이 돈을 모을 때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는 기록도 없고 또 악했다든지, 무자비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 대문에는 거지가 살 수 있었습니다. 

그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남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을 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사는 존재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사로는 세상의 것으로는 빈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지에게 축복입니다. 가난이 칭찬을 들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난은 소유한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음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몸과 마음이 함께 가난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통해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22절에 갑자기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뱀,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 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저가 음부에서" 라고 말합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불꽃 가운데서 사정없이 고통 받는 곳입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쵸프의 형제들'이라는 책에서 보면 이렇게 지옥을 설명했습니다. '만일 지옥에서 붙는 불이 물질에 붙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몸이 타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지옥의 불은 육체가 타는 곳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알지 못하는 불에 타는 곳이라서 그것이 육신이 타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아픔과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생을 제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옥을 예비하셨습니다. 

여기 보세요. 지옥에 간 부자가 눈을 들어 보니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불꽃 속에서 고통 하는 것 이상으로 안타깝고 자존심 상하고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었습니다. 견디다 못해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사로를 나에게 좀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내 혀에 물 한 방울만 찍어서 떨어뜨리게 해 주십시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살아생전에 대문 밖의 거지 나사로는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거절당했습니다. 

물 한 방울 달라는 요구가 너무나 냉정하게 거절을 당하자 이 부자는 부끄럽고 자존심 상했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세상에 있는 우리 형제 다섯 명에게 보내 주십시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믿고 이 무서운 곳에 오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너무나 쉽게 들어주리라고 여겼던 그 요구도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습니다. "세상에는 이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또 복음을 기록한 성경말씀도 내가 주었다. 성경말씀을 읽으면 믿을 수 있고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누구든지 들을 수 있다." 죽은 자가 살아서 갈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부자는 포기하지 않고 애걸복걸 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은 자가 무덤을 열고 일어나서 무언가 한마디를 하면 사람들이 다 믿을 것입니다. 우리 형제들도 믿을 것입니다. 부디 그렇게 해주십시오." "아니야. 네 말이 틀렸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듣지 아니하는 사람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보고 직접 천국과 지옥에 대해 들어도 절대 안 믿는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심각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 땅에서 자신이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알았다면 어찌 이런 무모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지금 건강하지만 언젠가 다 죽음 앞에 설 것이고 그리고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음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 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이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70 이후에는 너무 그렇게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늙어 눈치 보며 오래 살면 또 무엇 하겠습니까? 남에게 피해주며 오래 살 필요가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므로 성실하게 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둘째는 육신적 죽음입니다. 세째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히9:27절에 보면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러분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여러분 법원에서 판사가 호출을 해도 가슴이 덜렁덜렁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십니까? 이 심판 앞에 하나님의 기준은 딱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예수를 믿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입니다. 믿으면 천국이고 믿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땅에서 그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가졌는가, 뭐,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말을 유치하게 생각합니다. 지옥을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불신자들은 지옥에 대하여 모르니까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자기 위안을 삼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입에서 지옥이라는 말이 열여덟 번이나 나왔다는 사실에 주의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핵심을 피해서도 안 됩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불교계에서 추앙하는 스님이 바로 성철입니다. 이분은 고행에 도가 튼 사람입니다. 결혼직 후 처자식을 버리고 집을 떠나서 수행을 했습니다.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된다고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처에 철조망을 치고 10년 동안이나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답니다. 16년 동안 쌀가루와 솔잎가루만 먹고살았습니다. 그리고 8년 동안 눕지 않고 자면서 수행을 했다고 하니 보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서 수미산보다 더 높다. 산채로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가 푸른 산에 걸려 있다." 한평생을 후회하는 말인데 그 속에는 구원받은 자의 소망이 없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지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심각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인간이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 예외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속성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공의요, 하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 앞에 죄인은 어느 누구도 그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합1:13절에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을 충족시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는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가?" 지옥은 사람들을 위하여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가두기 위하여 만든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마귀에게 속아 지옥에 가게 된 것입니다. 왜 부모가 자녀 교육을 할 때 때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회초리를 예비시켜 놓고 교육하지 않습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적당히 넘기실 수 없습니다. 죄를 공의롭게 처리하십니다. 응분의 댓가를 치루게 하시는데 그것이 죽음 곧 영원한 죽음, 지옥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마련하고 계획하셨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큼 사람들을 지옥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수 천 년 동안 노력하셨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자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지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지옥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내가 지옥에 가면 당할 고통입니다. 지옥의 고통을 그가 십자가에서 친히 다 담당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살리신 다음 예수님을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시고 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곳으로 가면 영원히 희망이 없다" 얼마나 힘을 다해 막으시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우리들은 중요한 결단을 해야 됩니다. 슈바이처라는 젊은 철학도가 박사학위 공부하면서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에 늘 오르간을 연주했습니다. 그래서 교수하면서 오르간 연주자로 평생을 살까 하다가 오늘 본 이 성경 구절을 읽고 삶의 변화를 일으켜 의과대학 들어갔습니다. 의과대학 마친 다음 그는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평생을 흑인들을 살피면서 살았습니다. 이 구절 때문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결정하셔야 됩니다. 

그가 아프리카 람바네레로 떠나가기 직전에 그가 살던 고향 도시지역 신문들은 닥터 앨버트 슈바이처가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사실을 1면 톱기사로 보도했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가 좋은 의료인의 조건, 또 여러 개의 학위, 보장된 미래와 출세를 포기하고 떠나간다는 것이 그 때만 해도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런 결단을 하셨습니까?” 닥터 앨 버트 슈바이처는 조용히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빚 갚기 위해 서 입니다.? ?제가 철이 들면서 생각해 보니까, 저라는 인생은 온 통 빚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제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저는 온통 빚지고 산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상적인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30살에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흑인들을 위해 의사로 복음전도자로 90평생을 보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는 미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부탁인 복음을 위해 산 한 인생의 모습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태신자를 품고 기도해 왔습니다. 이제 남은 한 주간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예배에 동참한 여러분 자신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오늘이 있기까지 우리는 온통 빚지고 산 것입니다. 여기 누가 예외가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목회를 하면서 늘 느끼는 것은 “이제 빚 갚는 생애를 살고 싶다.?는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이 은혜에 빚지고 사는 자들 어떻게 빚을 갚을 수가 있을까요? 탈무드에 보니까 이런 유명한 말이 있어요. “빚진 자들이여! 힘을 합하십시오. 그리고 누군가 당신들 곁의 한 사람에게 축복의 등불이 되어 주십시오.” 

나는 이번 집회가 행사나 프로그램으로 끝나지를 않기를 바랍니다. 최선을 다합시다. 이제 한 주간 릴레이 기도와 새벽에 교회 오래 오래 머물러서 한 생명을 끌어안고 기도하십시다. 반드시 열매가 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간 자는 기쁨의 단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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