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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자 (고후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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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으로 돌아가자 (고후 7:1)

   
조선왕조의 시작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세 곶 됴코 여름 하나니” 풀이해 보면 이런 말입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 이제 막 개국한 조선왕조가 뿌리 깊은 나무가 아름다운 꽃도 피우고 열매도 풍성이 맺는 것처럼 창대하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뿌리가 깊은 나무”라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당시 막 개국한 조선의 사상적이고 정신적 상황을 암시해 줍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창건된 조선은 개국 초기 정통성의 시비 때문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든든히 세워주고 발전할 수 있는 기초가 되어줄 사상적이고 정신적인 뿌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속히 이 뿌리가 깊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이 어서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신앙적이고 신학사상적인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패역한 세상 속에서 그리고 이렇게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흔들림 없이 든든히 서 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대를 이어 부흥을 이어가며 더욱 번성하여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뿌리를 찾고, 그 뿌리를 잘 보존하며, 나아가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 교회의 뿌리는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입니다. 이 교회가 주후 11세기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서방교회는 주후 16세기에 종교개혁으로 로마 천주교회와 개신교로 나뉘었습니다. 이 때 개신교는 로마 천주교회를 개혁하는 형태에 따라 다양한 분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심이 되는 분파가 둘입니다. 하나는 루터교회입니다. 루터가 중심이 돼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여 독일과 북유럽 중심으로 뻗어나간 교회를 말합니다. 이 루터교회는 로마 천주교의 잘못된 신학사상을 철저하게 개혁을 했지만 예배 의식은 대체로 계승했습니다.

둘은 개혁교회입니다. 요한 깔뱅이 중심이 돼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여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 운동으로 발전해 나간 교회를 말합니다. 이 개혁교회는 로마 천주교의 신학사상은 물론이고, 예배 의식까지도 철저하게 개혁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교회는 교회정치의 형태까지도 철저하게 개혁했습니다. 당시 로마 천주교의 교황 중심의 감독제를 과감하게 철폐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 성경에 나타나는 장로제도를 기초로 하여 장로회 중심의 정치제도를 도입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장로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개혁교회와 장로교회는 같은 교회를 말합니다. 신학사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개혁교회라고 하고, 정치형태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장로교회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교단 소속의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교회의 뿌리는 멀리는 초대교회에 있고, 가까이에는 이 개혁교회(Reformed Church) 또는 장로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뿌리가 깊은 교회가 되려면 우리의 뿌리를 정확히 알고 그 뿌리를 보다 튼튼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장로교회가 정치형태로는 그 뿌리인 장로회를 유지하고 있지만, 신학 사상적으로는 그 뿌리인 개혁교회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신학 사상이 순복음 교회인지, 감리교회, 침례교회인지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이단 사상까지 유입되어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장로교회는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뿌리 깊은 교회가 되려면 정치형태로서 장로회를 잘 유지할 뿐 아니라 신학사상적으로 개혁신앙의 뿌리를 찾아서 그 뿌리를 굳게 붙잡아야 하겠습니다. 즉 더욱 철저하게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의 뿌리인 개혁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 핵심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절대 주권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회의 신학사상의 핵심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있습니다. 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도텔레스의 철학사상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삶은 존재의 원리인 신을 탐구하는 삶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각색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은 하나님을 탐구하는 삶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가장 이상적인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태도는 자칫 인본주의로 흐를 수가 있습니다. 명상을 하는 사람이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주체요 하나님은 객체가 될 수 있습니다. 

개혁신앙은 이 점을 철저하게 개혁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은 단지 하나님을 명상하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그 절대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한마디로 신본주의적 신앙인 것입니다.

신 11:8-12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네가 들어가서 차지하려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모세는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가나안 땅은 애굽에서 저들이 농사짓던 땅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저들이 농사를 지을 때 물이 풍부한 나일 강에서 물을 끌어들일 수 있었지만, 저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는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의지해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애굽보다 가나안 땅에 더 좋은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가나안 땅은 1년에 두 차례 비다운 비가 내립니다. 하나는 우기가 시작되며 내리는 이른 비이고, 다른 하나는 우기가 끝나가며 내리는 늦은 비입니다. 가나안 땅의 흙은 석회질이 많아서 가물면 땅이 시멘트처럼 굳어집니다. 그래서 이른 비가 내려 굳어진 땅이 부드러워져야 농부들이 밭을 기경해서 씨를 뿌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하기 전 늦은 비가 와서 곡식들이 열매를 잘 맺어야 거둘 수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농사를 지으며 늘 하늘을 우러러보게 됩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밭에 씨를 뿌리며 뜨거운 마음으로 이른 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가을에 추수를 한 뒤에 뜨거운 마음으로 늦은 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가나안 땅은 늘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는 땅입니다. 하나님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땅입니다. 그래서 신본주의적 관점에서 이 땅이 가나안 복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하는 땅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가나안 땅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사는 땅이어야 합니다. 반대로 애굽이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뜻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땅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땅에서 탈출해 나와야 합니다. 바로 출애굽해야 합니다.

2. 성경 중심의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회는 성경보다 교회의 전통과 교황의 가르침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그 결과 성경에 위배되는 면죄부를 만들어 판매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게 된 배경은 교회가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헌금을 받아들여 교회의 필요를 채우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위해 좋은 일이 아니냐는 실용주의적 발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결정을 내리게 됐고, 그 결정이 권위를 가지고 집행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실용주의적 발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이 선하지 않더라도 눈 감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발상이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개혁신앙은 이 점을 단호하게 개혁해 갔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든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성경 외에 권위 있게 세워져있던 판단 기준들을 다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목적과 과정 모두 성경의 권위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철저하게 강조했습니다.

육상이나 수영 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지켜야 할 자기 레인이 있습니다. 선수가 아무리 잘 뛰어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해도 그 레인을 이탈했다면 바로 실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경주를 할 때도 반드시 지켜야 할 삶의 레인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말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단이나 방법이야 어떻든지 결과만 좋으면 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개혁신앙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입니다. 결과도 성경대로여야 하고, 방법도 성경대로 여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사우스다코다 주의 러시모어에는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 중 네 사람의 얼굴이 조각되어있습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 그리고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입니다. 

그런데 이 네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성경을 사랑했고, 성경대로 살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워싱턴은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올바로 다스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습니다. 이것이 미국 대통령 선서의 전통이 됐습니다.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면서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 있다”라고 한 바가 있습니다. 링컨은 성경을 통해 지혜를 터득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중 가장 귀한 것은 성경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인생을 참되게 살기 원한다면 그에게 성경을 주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혁신앙은 이처럼 성경을 귀중히 여기고 성경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성경대로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3.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의 신앙

당시 로마 천주교의 영적 지도하에 살아가는 신자들은 개인적 경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제를 비롯한 종교지도자들 역시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경건한 신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더 이상 경건한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라틴어로 코람 오미네(Coram homine)라고 합니다. “코람”이라는 말은 전치사로 “앞에서”라는 뜻이고, “오미네”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과 삶이 철저하게 분리되어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잠깐 동안 그리고 기도하는 잠깐 동안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만 상대하며 살아갑니다.

개혁신앙은 이점을 단호하게 개혁해 갑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늘 하나님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께 칭찬받을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라틴어로 코람데오(Coram Deo)라고 합니다. 역시 “코람”이라는 말은 “앞에서”라는 전치사입니다. 그리고 “데오”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신앙과 삶이 하나가 되어있다는 점입니다. 예배드릴 때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늘 하나님을 상대하며 살아갑니다.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눈동자처럼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가까운 친구 목사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중견교회가 되었습니다만 그 교회 개척 때 이야기입니다. 상가를 얻어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 간판을 걸고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개척 예배 때는 가까운 친지들과 전에 사역하던 교회 교우들이 참여해서 100여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개척 후 첫 예배를 드렸는데 자기 가족들하고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 포함해서 7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아무도 없고 자기하고 아내 둘이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배 인도하고 아내가 반주하고 새벽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중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 낙심이 돼서 그 다음날부터는 예배 인도하지 않고 단에 오르지 않고 그냥 기도만 했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성령께서 그 마음에 강하게 책망을 하시더랍니다. “새벽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회중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정식으로 인도하라” 그래서 순종하는 마음으로 회중이 아무도 없더라도 정성껏 설교 준비를 해서 설교도 하고 순서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3일째 되던 날 지나 가던 교인이 들어오더랍니다. 이사 온 사람인데 새벽 기도할 교회를 찾다가 교회에 불이 켜지고 찬송소리가 들려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더욱 정성을 다해서 말씀도 전하고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분이 그날부터 빠지지 않고 새벽에 나오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좋다고 전도해서 새벽기도가 부흥되기 시작했답니다. 

이 목사님이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회는 사람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사람을 보고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보고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코람데오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 코람데오의 신앙이 우리 개혁신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493주년 종교개혁개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부패한 로마 천주교를 개혁하고 새롭게 신앙의 기치를 들었던 날을 기념해서 지키는 날입니다. 특히 우리는 개혁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개혁신앙이란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신앙, 성경중심의 신앙, 그리고 코람데오의 신앙을 핵심으로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 신앙의 뿌리를 잘 지켜야 합니다. 이 개혁신앙을 떠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철저하게 돌아서서 이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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